
한국은행이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 사상 처음으로 금융회사에 유동성을 무제한 공급하기로 했다. 한은이 한국판 양적완화에 돌입한 것이다. 사진은 지난해 9월 한국은행 강남본부에서 관계자들이 추석 자금을 방출하는 모습. 뉴스1
한은, 발빠르게 전례 없는 카드 꺼냈다
공개시장운영의 일환인 RP 거래는 한은이 시중 유동성을 관리하는 대표적인 수단이다. 유동성 공급 필요성이 있을 때는 RP를 매입하고, 반대의 경우엔 매각해 돈을 거둬들인다. RP를 무제한으로 매입한다는 건 시장의 자금 수요가 있으면 원하는 만큼 전액 공급한다는 의미다.
이는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쓰지 않았던 파격적인 카드다. 그만큼 지금 상황을 엄중하게 인식한다는 의미다. 한은은 이달 기준금리를 연 0.75%로 급히 내렸다. 원화가치 하락 및 부동산 시장 자극 우려 등을 고려하면 추가 금리 인하 여력은 충분하지 않다. 이런 가운데 유동성 부족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한은이 특단의 대책을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종우 이코노미스트는 “2008년 금융위기 때 학습효과로 신용 경색만은 막아야 한다는 전 세계적인 공감대 속에서 한은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식 양적완화 정책 등장
이번 조치에 따른 RP 매입 대상 확대 규모는 약 70조원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윤여삼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한은이 지난주 3조5000억원 규모로 RP 매입을 확대했지만, 유동성 위축 우려는 여전한 상황이었다”며 “기축통화국이 아닌 현실을 고려할 때 한은이 제시할 수 있는 최선책이고, 자금 조달과 관련한 불안이 큰 폭으로 줄 것”이라고 말했다.
채권금리 하락 등 시장 안정

‘코로나19’ 확산 후 한국은행 주요 금융 정책.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한은의 조치로 24일 정부가 발표한 100조원 규모의 민생·금융안정 패키지 프로그램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100조원 중 상당 부분은 금융회사의 참여로 이뤄진다. 유동성 부담이 크면 참여를 꺼릴 수밖에 없는데 한은의 측면 지원을 받게 된 셈이다. 한은이 공급한 자금 중 얼마를 각각의 프로그램에 투입할지는 각 금융회사가 결정한다. 윤 부총재는 “이번 조치가 금융시장 안정에 기여하고, 나아가 정부의 민생·금융안정 패키지에 필요한 유동성을 원활히 공급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금통위는 지난 23일 발표한 대로 공개시장운영 대상기관에 증권회사 11곳을 추가하고, 대상증권을 8개 공공기관 특수채로 확대하는 방안도 의결했다. RP 거래 대상기관을 늘려 돈 풀리는 효과를 극대화하겠다는 취지다. 이 결정에 따라 한은과 RP 거래를 하는 증권회사는 5개사에서 16개사로 늘어나게 됐다.
회사채 매입, 정부가 결단하면 가능

윤면식 한국은행 부총재가 26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무제한 유동성 공급 방안을 의결한 뒤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한은의 회사채 직접 매입이 거론된다. 현재 구조상 한은이 회사채나 CP를 직접 살 순 없다. 정부가 보증하면 가능하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경우 정부가 출자하는 특수목적법인(SPV)에 자금을 제공해 회사채·CP를 매입한다. 정부 출자금이 손실을 떠안는 구조기 때문에 사실상 정부가 보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윤 부총재는 “정부가 회사채를 보증한다면 한은 금통위가 매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용이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다만) 정부의 지급 보증은 국회를 통과해야 가능한데,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할지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결단하면 한은이 나설 수 있다는 의미다.
이종우 이코노미스트는 “정부가 사실상 개별 기업 경영에 개입하는 것이라 신중할 수밖에 없다”며 “자칫 기업의 손실을 국민이 떠안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신용도가 어느 정도인 회사채까지 매입할 것인지 등에 관해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