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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의 문화탐색] 한국형 거리가구의 진화

최범 디자인 평론가

최범 디자인 평론가

“나는 여름이 오길 기다립니다.” 지난여름 횡단보도 앞에서 활짝 팔을 벌려 햇볕을 막아주던 그늘막이 차려자세로 쉬고 있다. 볏짚을 두른 겨울나무처럼 비닐 커버가 씌워져 있고 지자체 로고와 함께 쓰인 문구가 눈에 띈다. 현대판 정자나무라고나 할 그늘막은 겨우 내내 저렇게 서서 제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자생적 문화생산과정에서
한국 풍토에 맞춤한 산물
‘하로동선’처럼 관리해야

새학기임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인적이 끊어진 대학 앞의 버스 정류장에는 텅 빈 방풍막만이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추운 겨울, 버스를 기다리는 학생들에게 잠깐이라도 안으로 들어와 찬바람을 피하라고 손짓하던 방풍막도 이제 봄기운이 완연해지면 비닐껍질을 벗고 퇴장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계절이 바뀌면 그늘막과 방풍막은 임무 교대를 해야 한다.
  
거리가구의 새 가족
 
계절이 바뀌는 시기, 찬바람을 피하는 방풍막과 불볕더위를 막는 그늘막(아래 사진)이 임무 교대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최범]

계절이 바뀌는 시기, 찬바람을 피하는 방풍막과 불볕더위를 막는 그늘막(아래 사진)이 임무 교대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최범]

언제부터인가 이전에 볼 수 없던 거리가구(스트리트 퍼니처)가 하나둘씩 눈에 띈다. 폭염 주의보가 내려진 이태 전 여름에는 그늘막이 등장했고, 그 뒤를 이어 겨울에는 비닐 방풍막이 선보였다. 한반도의 극단적인 기후가 만들어낸 발명품들이다.  이들을 처음 도입한 지자체는 서울 서초구로 알려져 있는데, 서초구는 그늘막에 ‘서리풀 원두막’, 방풍막에 ‘서리풀 이글루’라는 센스 있는 이름을 붙였다. 이 작품들(?)로 인해 서초구는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는 ‘공공디자인대상’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초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서리풀 원두막. 전국 그늘막의 표준’이라는 문구가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거리가구라고 하면 펜스, 가로등, 벤치, 쓰레기통 같은 것들이 익숙하다. 최근에는 전에 볼 수 없던 새 가족이 하나씩 등장하면서 거리 풍경을 바꾸고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지역 주민의 편의를 위해서 고안된 것들인데, 반응이 좋아 다른 지자체들도 따라 하게 되면서 전국적으로 보급된 듯하다. 이러한 주민편의형 시설물과 ‘착한’ 디자인 경쟁은 일단 좋은 것이고 칭찬할 일이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거리가구와 달리 한국적 특수성이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한국형 거리가구라고 부를 만하다.
  
어메니티, 도시의 최고 가치
 
계절이 바뀌는 시기, 찬바람을 피하는 방풍막(위 사진)과 불볕더위를 막는 그늘막이 임무 교대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최범]

계절이 바뀌는 시기, 찬바람을 피하는 방풍막(위 사진)과 불볕더위를 막는 그늘막이 임무 교대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최범]

오늘날 도시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로는 ‘어메니티(amenity)’를 꼽는다. 우리말로는 ‘쾌적함’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 말은 도시의 물리적 환경과 경관적 아름다움, 환경적 청결함이 조화를 이루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두루 만족을 주는 상태를 가리킨다. 한마디로 말하면 어메니티는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음이라고 하겠다.
 
어메니티를 제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도시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잘 조화를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결코 쉽지 않다. 도시라는 복잡계는 무수한 이질성과 불균형, 모순과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능이 다른 기능과 충돌하기도 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일이 과잉되어 불편함을 초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도시를 보기 좋게 꾸미려고 한 것이 정반대의 흉물로 전락하기도 한다. 아직 한국의 도시들은 이런 것들을 잘 통합해내기에는 마인드나 시스템이 부족한 편이다.
  
여름 화로와 겨울 부채
 
199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노무현과 동료들이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을 열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여름 화로와 겨울 부채를 뜻하는 이 말은 비록 지금은 필요 없지만 쓸모 있을 때를 준비하며 기다린다는 뜻이다. 여름이 와도 화로를 버리지 않는 것은 지난겨울의 추위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고 겨울에 부채를 장만하는 것은 여름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형 거리가구도 마찬가지이다. 아직은 어설프고 다른 것들과 잘 조화를 이루지도 못하지만, 조금씩 한국 현실에 맞는 것을 창안하고 발전시켜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일찍이 여름용 마루와 겨울용 온돌을 창조적으로 융합시킨 한옥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바이러스로 인해 흉흉한 시절이지만 그래도 봄은 오고 있다. 거리가구에도 ‘하로동선’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최범 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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