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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풍파 이겨낸 나무가 휘지만, 열매는 더 잘 열려”

“이 소나무는 세 번 휘었어요. 밑동에서 한 번, 잘 자라다 또 한 번, 가지 앞에서 다시 한번. 이 나무를 보면서 내 인생을 돌아봐요. 태어나자마자 한국전쟁을 겪었고, 20대 땐 월남전을 갔다 왔고, 수목원을 열고선 IMF 외환위기를 맞았어요. 나무는 시련을 이겨낸 다음 휘어요. 상처가 살아가는 힘이 되는 거죠. 저 향나무는 죽은 줄기와 산 줄기가 엉켜 있어요. 죽은 줄기가 산 줄기를 지탱해줘요. 그렇게 향나무는 천 년을 살았어요.”
 

한상경 아침고요수목원 대표
파킨슨병과 16년, 친구 삼아 살자
약 줄여 병 악화됐지만 의식 또렷
첫인상 보다 뒷모습 아름답기를

경기도 가평 ‘아침고요수목원’ 한상경(70) 대표가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2004년 진단을 받았다. 꼿꼿이 버텨내 수목원 바깥세상엔 알려지지 않았다. 병세가 나빠진 건 지난해 여름 이후다. 지난 20일 아직 봄이 내려앉지 않은 수목원에서 그를 만났다.
 
아침고요수목원 한상경 대표. 수목원 ‘쉼의 언덕’에서 ‘기적’이라는 이름의 소나무 앞에 섰다. 구릉 지대인 쉼의 언덕은 한 대표가 제일 먼저 조성한 수목원 지역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침고요수목원 한상경 대표. 수목원 ‘쉼의 언덕’에서 ‘기적’이라는 이름의 소나무 앞에 섰다. 구릉 지대인 쉼의 언덕은 한 대표가 제일 먼저 조성한 수목원 지역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요즘 부쩍 안 좋아지셨다고요.
“파킨슨병이란 게 나았다는 사람이 없어요. 난치병, 불치병이지요.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병 하나 친구 삼아 구슬리며 사는 것도 인생이겠구나. 작년 이맘때 약을 절반으로 줄였어요.”
 
왜요?
“아픈 건 나니까. 내가 결정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약을 줄이니 의식이 깨어났어요. 사고가 분명해졌어요. 대가로 떨림이 심해지고 거동이 더 불편해졌지요. 사람들이 그걸 보고 안 좋아졌다고 하는 것 같아요.”
 
한상경 대표는 원예학자다. 90년대 미국에 공부하러 갔을 때 여러 수목원을 둘러본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그는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정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994년부터 아내 이영자(68) 원장과 수목원을 일궜고, 2004년 삼육대 원예학과 교수를 퇴임했다. 그즈음 병이 찾아왔다는 걸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1996년 수목원을 열었으니 25년이 됐습니다. 소회를 여쭌다면.
“처음 드는 생각은…. 참 좋은 시절을,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감격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가난한 대학교수가 너무 넘치는 꿈을 꿔 인생이 고달프지 않았는가 생각도 들고.”
 
행복한 경험뿐인가요? 고생도 많으셨잖아요.
“수목원 만들 땐 수목원법 같은 게 없었어요. 화전민이 흑염소 놔 기르던 데 나무를 심었어요. 황무지에 나무를 심고 꽃을 피운 건데, 공무원에겐 달리 보였나 봐요. 농지 불법전용, 산림 훼손 이런 거로 고발을 당했어요. 정면돌파했어요. 법 논리에 의지하지 않고 내 신념을 주장했어요. 내가 여기서 나무 심고 꽃 심은 것, 이게 내 신념이다. 2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아냈어요. 그게 제일 힘든 일이었네요.”
 
파킨슨병은 신경퇴행성 질환이다. 손발이 떨리고 근육이 굳는다. 대화가 길어지자 한 대표의 상태가 급속히 나빠졌다. 손이 떨리더니 팔이 떨리고 다리가 떨리고 끝내 머리도 흔들렸다. “꼭 하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끊길 듯 이어졌던 그의 마지막 말을 옮겨 적는다.
 
“이다음에 하늘에 가서 ‘넌 뭐하고 왔느냐’ 물으면 ‘전 나무 심다 왔습니다. 나무를 심고, 또 심고, 또 심었습니다….’ 젊었을 땐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지금은 말을 바꿨어요. ‘첫인상을 믿지 말아라.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돼야 한다.’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건 슬픈 거야…. 저는 곡선이 있는 휘어진 나무를 좋아합니다. 모진 풍파를 겪은 나무에요. 휘어진 가지에서 꽃이 피어요. 휘어진 가지에서 열매가 더 잘 열려요. 아팠던 나무가 휘어져요. 휘어진 나무는 펴지지 않아요. 그러나 꽃은 피울 수 있어요.”
 
외람된 고백이나, 바이러스로 온 세상이 시름에 빠진 지금 평생 나무만 심고 산, 나무처럼 꼿꼿이 평생을 산 어른의 말씀이 궁금해 찾아뵀었다. 그래도 몰랐다. 가쁜 숨 몰아쉬며 당신 인생을 죄 털어놓을 줄은.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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