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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삶에 도움 돼야”…2차원 회화, 3차원 현실과 접목

바우하우스 이야기 〈31〉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그래픽=이은영 lee.eunyoung4@joins.com

카메라의 ‘아웃포커스(out of focus)’ 기능 덕분에 사랑받던 시절이 있었다. 카메라의 f값을 최소로 해서, 즉 조리개를 최대한 열어서 여자친구 얼굴에 초점을 맞추면, 그녀의 얼굴은 무지 또렷하게 나오고 배경은 아주 흐릿해진다. 어지간하면 죄다 예쁘게 나온다. 망원렌즈를 동원하면 이 효과가 극대화된다. 나는 한 때 ‘아빠통’으로 불리는 값비싼 망원 줌렌즈를 메고 다녔다. 오로지 ‘아웃포커스’를 찍기 위해서였다. 요즘 ‘아웃포커스’는 아주 흔하다. 거의 모든 휴대폰 카메라의 기본 기능으로 장착돼 있다.
 

벽에만 걸려있던 표현주의 회화
가구·식기 등 인간 삶에 스며들어
두스부르흐, 진화의 촉매제 역할

‘보고 싶은 대로’서 ‘있는 그대로’
새로운 구성주의적 예술로 전환
바우하우스, 역사적 소명 구체화

그러나 이 같은 ‘카메라 장난’에 일찌감치 반기를 든 사람들이 있었다. ‘F64그룹(Group f/64)’이다. 1930년대의 일이다. 안셀 아담스, 에드워드 웨스턴 등의 사진가들은 ‘보고 싶은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배경의 다른 것들은 왜곡하는 사진은 순수하지 못한 것이라 여겼다. 사진에 온갖 조작을 동원해 회화처럼 인화하는 ‘영상주의(pictorialism)’ 같은 ‘예술사진’은 철저히 거부했다. 사진을 구시대의 ‘예술’로 만들고자하는 그릇된 욕망의 산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몬드리안은 ‘2차원적 균형’ 평생 고집
 
바우하우스를 ‘접수’하려는 두스부르흐의 속내가 낙서를 통해 그대로 그러난 우편 엽서.

바우하우스를 ‘접수’하려는 두스부르흐의 속내가 낙서를 통해 그대로 그러난 우편 엽서.

이들은 ‘아웃포커스’와는 반대로 f값을 최대로, 즉 카메라의 심도를 최대로 높여 대상을 모두 같은 수준의 선명함으로 촬영했다. 이 사진들을 가리켜 ‘즉물사진(Straight Photography)’이라고 부른다. ‘즉물사진’은 독일 바이마르 시대의 ‘신즉물주의(Neue Sachlichekit)’에서 끌어온 개념이다. 신즉물주의는 어떤 주관적 개입도 거부하고 철저하게 건조한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20세기 초반의 예술적 흐름을 일컫는다. 내면의 시선에 초점을 맞춘 표현주의와 같은 아웃포커스적 예술이 더 이상 어떤 감동도 주지 않게 되었을 때 나타났다.
 
‘신즉물주의’와 바우하우스는 표현주의 혹은 독일적 낭만주의의 비판적 극복이라는 측면에서는 뿌리가 같다. 그러나 ‘기계적 사실주의’를 지향하는 ‘신즉물주의’가 여전히 2차원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반면, ‘예술과 기술의 통합’을 추구하는 바우하우스는 3차원의 세계로 진화해간다. 두스부르흐는 바로 그 진화의 촉매제였다.
 
인상파에 의해 ‘원근법’이 해체된 후, 유럽의 화가들은 제각기 대안적 세계를 찾아 나섰다. 피카소는 하나의 관점이 아닌 ‘다중관점(multiple perspective)’을 구현하려 했다. 몬드리안은 전경과 배경의 구분 자체를 폐기했다. 화면 위에 중심이 되는 모티브는 더 이상 없었다. 화면 위에 모든 대상은 모두 동일한 무게로 표현되었다. 현대음악이 재미없는 이유는 중심 멜로디가 없거나 찾아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도무지 어느 부분에 집중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몬드리안이 추구했던 것도 바로 이런 현대음악과 같은 회화였다. 화면에 중심이 되어야 할 초점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이는 ‘아웃포커스’적 사진으로부터 ‘즉물사진’으로의 전환과 비교될 수 있다. 하나의 소실점으로 대상을 모두 환원시키는 원근법이 아웃포커스적이라면, 화면의 중심을 해체한 몬드리안의 회화는 즉물사진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리시츠키의 ‘프로운(Proun)’에서 영감을 얻어 구현한 두스부르흐의 아이소메트릭 투시도법 또한 즉물사진적이라 할 수 있다. ‘보이는 그대로’, 혹은 ‘보고 싶은 대로’ 그리는 인간중심의 아웃포커스적 투시도법(원근법)에서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대상중심의 즉물사진적 투시도법(아이소메트릭)으로의 전환인 것이다.  
 
그러나 몬드리안과 두스부르흐의 즉물사진적 접근방식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두스부르흐는 ‘대립’과 ‘불균형’으로 인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성’이야말로 삶의 본질이라 여겼다. 그러면서 ‘수평과 수직에 의한 평면상의 균형’을 고집하는 몬드리안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1922년 그는 ‘역동성’의 표현 가능성을 리시츠키의 ‘프로운’에 담겨진 아이소메트릭의 ‘대각선(diagonal)’ 구도에서 찾아냈다. 같은 해, 그는 흥분해서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학생들에게 새로운 예술의 도래를 역설했다. 불만에 가득 차 냉소주의적 불평만 쏟아내는 낡은 2차원적 표현주의로는 결코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없다, 바우하우스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구성주의적 예술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대각선으로 ‘역동성’을 표현하고자 한 두스부르흐의 작품 ‘반구성(Counter-Composition)-5’(1924)

대각선으로 ‘역동성’을 표현하고자 한 두스부르흐의 작품 ‘반구성(Counter-Composition)-5’(1924)

1923년 이후 두스부르흐는 ‘대각선’이 구현된 일련의 작품을 ‘반구성(counter-composition)’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다. 몬드리안은 수직과 수평의 평화를 깨는 두스부르흐의 예술세계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두스부르흐와 몬드리안의 갈등은 단순히 ‘대각선’이냐, ‘수직과 수평’이냐의 차이가 아니었다. 예술관, 혹은 세계관의 차이였다.
 
몬드리안은 ‘2차원적 균형’을 평생 고집했다. 그러나 두스부르흐는 2차원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듯한 아이소메트릭의 대각선 구도에서 2차원적 평면세계로부터의 탈출 가능성을 발견한 두스부르흐는 몬드리안의 ‘2차원적 균형’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결국 둘은 더 이상 화합하지 못하고 결별한다.  
 
2차원적 회화의 유일한 존재방식은 벽에 걸리는 것이다. 타틀린이나 말레비치가 1915년 미래주의 전시회에서 모서리에 자신의 작품을 걸어두었던 것은 바로 이 2차원적 회화의 한계를 분명히 하려는 시도였다. 사각형의 프레임에 갇힌 회화는 벽에 걸리는 장식이외에 또 다른 존재방식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1922년 베를린에서 전시된 리시츠키의 ‘프로운’은 2차원적 회화를 극복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에 도전한 것이었다.
 
왕과 귀족을 위한 예술로서의 2차원적 회화는 벽에 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다. 1차 세계대전은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같은 유럽에 마지막 남은 군주제 국가들의 철저한 몰락으로 끝이 났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는 해체되었고, 뒤늦게 통일된 황제의 독일제국은 채 50년도 못 버티고 사라졌다. 차르 체제를 무너뜨린 러시아 혁명은 세계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사건이었다.
 
기다란 복도와 넓은 벽의 장식을 위해 예술가들에게 기꺼이 돈을 내줄 왕과 귀족은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도시 노동자나 농민의 구체적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예술의 설자리는 없었다. 2차원의 회화가 인간의 삶에 구체적 도움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2차원적 평면으로부터 벗어나야했다. 3차원의 구체적 삶, 즉 식기·가구·집으로 회화는 스며들어가야만 했다.
 
바우하우스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역사적 사명’을 구체화했기 때문이다. 두스부르흐는 바우하우스가 이 ‘2차원의 평면 예술’로부터 ‘3차원의 구성주의적 예술’로의 전환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922년 두스부르흐는 바빴다. 베를린과 네덜란드를 오가며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만났다. 데 스틸 잡지를 편집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쏟았다. 바이마르에 차려놓은 사설학원의 수업에는 바우하우스 학생들로 붐볐다. ‘건축 아래 모든 예술의 통합’을 선언한 그로피우스의 교육프로그램에 큰 기대를 갖고 입학했지만 바우하우스에서의 건축수업은 시작할 기미도 안 보였기에, 학교 밖에 개설된 두스부르흐의 사설강좌는 그들의 지적 욕구를 채워주는 오아시스였다. 두스부르흐는 그로피우스가 곧 자신을 바우하우스의 정식 마이스터로 초빙할 것이라고 곳곳에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로피우스는 이에 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두스부르흐, 바우하우스 ‘접수’ 야망
 
사실 두스부르흐는 바이마르를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바우하우스를 ‘접수’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그 속내는 1921년 9월 친구 안토니 코크에게 보낸 우편엽서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엽서 사진의 바우하우스 본관 기둥에 ‘데 스틸’을 잔뜩 써 넣었다. 그는 바우하우스를 데 스틸의 학교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바우하우스에서 그로피우스와 암묵적으로 리더십 경쟁을 펼치던 요하네스 이텐에 대한 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다다이즘을 소개하기 위해 두스부르흐가 ‘본젯(I.K. Bonset)’이라는 가명으로 1922년 창간한 잡지 ‘메카노(Mécano)’의 7월호에는 두스부르흐의 사설강좌에 열심히 참가했던 바우하우스 학생 칼 페터 뢸의 ‘엉컹퀴 연구자’라는 제목의 그림이 실렸다.
 
‘엉컹퀴 연구자’는 이텐을 상징한다. 예비과정에서 ‘엉컹퀴’와 같은 재료를 이용해 학생들의 상상력을 키우려 했던 이텐을 빗댄 것이다. 이텐 앞에는 사각형의 인물이 마주 서 있다. 바로 두스부르흐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1922년 바이마르에서 일어난 자연인과 기계인의 충돌’이라 적혀 있다. ‘자연인’은 이텐이고, ‘기계인’은 물론 두스부르흐다. 칼 페터 뢸은 이 둘 중 산업화, 기계화라는 시대적 흐름에 누가 더 적합한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스부르흐가 아무리 흔들어대도 그로피우스는 꼼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스부르흐라는 외부의 압력을 이용해 내부의 적 이텐을 쫓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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