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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절친 ‘장미 화가’ 황염수, 허름한 초밥집서 아이 미소

예술가의 한끼

황염수(오른쪽)가 동료 한묵(왼쪽), 박고석(가운데)과 어울렸다. 한묵 현대화랑개인전, 1985년. [사진 갤러리현대]

황염수(오른쪽)가 동료 한묵(왼쪽), 박고석(가운데)과 어울렸다. 한묵 현대화랑개인전, 1985년. [사진 갤러리현대]

장미는 화려하지만 ‘장미의 화가’ 황염수의 삶은 화려하지 못했다. 그는 외로웠고 다소 쓸쓸했다. 황염수에게는 같은 평양 출신의 친구 이중섭과 박고석이 있었다. 이중섭은 요절했고 박고석은 늦게까지 가까운 동네에서 가까운 친구로 남아 주었다.  
 

평양 출신 또래 박고석과도 친구
호기로운 그들과 달리 검박·절제

동선동 한옥서 양반다리로 그려
지인에게 갈비 대접 땐 뿌듯해 해

느린 붓질로 영원의 장미 피워내
다소 외로웠지만 불멸의 꿈꾼 듯

황염수는 호사와 소비를 즐길 줄도 알던 이 둘과는 대조적인 성격이었다. 그는 수입도 별로였지만 소비는 더 빈약했다. 언어조차 별로 소비하지 않았다. 황염수는 평양고보를 다녔다. 고보 시절 이미 미술에 두각을 드러냈다. 가업으로 평양에서 비단염색공장을 했다. 그의 모친은 색감과 디자인 감각이 뛰어났는데, 색동비단을 개발해 큰돈을 벌었다. 황염수는 자신의 색채감각은 모친에게서 물려받았다고 주위사람들에게 가끔 자랑하기도 했다.
 
일본으로 가서 제국미술학교를 다녔다. 조선인 재학생들이 많은 학교였다. 부잣집 아들에게 도쿄의 학창생활은 지낼 만했다. 도쿄의 문물과 교양이 좋아 그는 5년 내내 방학이 와도 일본을 떠나지 않았다. 다만 아침마다 열리는 조례시간은 고역이었다. 일본은 전시상황이었다. 전교생이 외쳐대는 천황폐하만세에 혼자서 침묵으로 저항했다. 당연히 제재가 가해졌다. 황염수는 반항했다. 체제 내부에 쉽게 포섭되지 않는 기질이 이때부터 드러났다.
  
엄청난 독서량에 클래식 음악 즐겨  
 
황염수 부부. 황염수 개인전, 갤러리현대, 1989년. [사진 갤러리현대]

황염수 부부. 황염수 개인전, 갤러리현대, 1989년. [사진 갤러리현대]

6·25 전쟁 때 그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여기서 이중섭, 박고석 등 평양 출신의 같은 또래 화우들을 다시 만났다. 영도에 있는 대한도기에 취직했다. 수출용 접시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주어졌다. 동양화가 소정 변관식은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공업전습소 도기과 출신이라 대한도기와 인연이 있었다. 피란을 온 김은호, 변관식, 장우성 등 동양화의 대가들이 직장동료였다. 황염수는 여기에다 이중섭을 취직시켰다.  
 
황염수와 이중섭은 나이가 비슷하고 같은 평양 출신에다 제국미술학교를 다니며 도쿄 유학시절을 함께하였기에 사이가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이중섭은 동일한 행위의 반복을 싫어했다. 도기회사 일도 그만두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피란지 부산에서도 그나마 이중섭의 그림은 가끔씩 팔렸다. 그림을 팔고서 돈이 생기면 요령 없이 기분 내기에 열중하여 며칠 만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중섭은 생활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의지가 나약하다는 자기혐오감이 밀려오면 황염수를 찾아와 어린애처럼 마구 울었다.
 
황염수는 쌍욕에 가까운 말로 이중섭을 호되게 나무랬다. 남자가 가정을 꾸렸으면 생활을 책임지라는 내용이었다. 이럴 때 황염수는 강했고 이중섭은 약했다. 이 말을 이중섭은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이남덕)에게 그대로 전했다. 이중섭, 박고석 등 북방사내들의 호기는 매력적이었지만 생활을 꾸려야 하는 일본인 여성에게 그런 개성들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같은 평양 출신이라도 황염수는 검박하고 절제가 있었다. 만약 황염수가 그림을 팔았다면 그 돈으로 분명히 가족을 위해 쌀을 샀을 게다. 마사코가 믿을 만한 한국인 남자는 실속의 생활인 황염수가 유일했다.
 
황염수의 ‘장미’, 캔버스에 유채, 33.5x24cm, 1990년대. [사진 표갤러리]

황염수의 ‘장미’, 캔버스에 유채, 33.5x24cm, 1990년대. [사진 표갤러리]

황염수는 부산에서 부인 남경숙을 만났다. 경기여고와 서울대 미대를 나온 재원이었다. 전쟁 중에 일본으로 돌아간 마사코는 그 길로 이중섭과 영원히 이별했다. 이중섭은 전쟁이 끝나고 3년 후에 죽었다. 그의 사후에 마사코는 서울을 자주 찾았다. 서울에 오면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고 오직 그녀가 믿고 의지한 황염수 부부만을 찾았다.
 
황염수는 성북구 동선동의 한옥촌에 살았다. 마당은 비교적 넓었지만 본채는 작았다. 사랑채가 화실이었다. 그는 거의 평생 장미를 그렸다. 절약이 몸에 밴 그이지만 장미만큼은 가장 비싼 걸로 샀다. 남대문 꽃시장에 가서 꽃대가 굵고 색상이 좋은 장미를 골랐다. 좋은 장미를 마주해야 좋은 감정이 생기고 좋은 감정이 생겨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장미 화병이 놓인 소반 앞에 낮은 키의 이젤을 놓고 3호나 4호쯤의 자그마한 캔버스를 얹혀 양반다리로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큰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현실 속의 장미보다 더 높은 차원의 그 무엇을 그리고 싶어 했다. 마찬가지로 현실 속의 캔버스를 뛰어넘는 높은 차원의 관념의 세계를 갈구했기에 캔버스의 크기 또한 무의미했다. 캔버스도 역시 과잉소비는 허용하지 않는 게 황염수의 스타일이었다.
 
황염수는 사교성이 별로 없었다. 친구라곤 책, 음악, 부인, 박고석이 전부였다. 이중섭은 요절하고 황염수는 박고석과 단짝이 되었다. 둘은 동갑내기로 서로 반말을 하는 사이였다. 염수는 염소로, 고석은 돌멩이로 장난스럽게 부르기도 했다. 1973년 박고석의 처남 김수근이 대표로 있는 공간사랑에서 장미그림 34점을 걸어 놓고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 소식을 들으면 수십 년 동안 헤어졌던 옛친구들이 찾아올 거라는 기대 때문에 전시를 열기로 결심한 외로운 사나이 황염수였다. 그는 일부러 친구를 찾아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매일 전시장으로 나가서 하염없이 옛친구들을 기다렸다.
 
동료들이 다 나가는 대학에도 나가지 않았다. 화가로서의 벌이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생활은 경기여고의 미술교사인 부인이 꾸려나갔다. 황염수는 그 점을 항상 미안해했다. 환갑이 넘어서야 그림이 겨우 팔리기 시작했다.
 
황염수에게 가성비가 가장 높은 소비활동은 독서와 음악감상이었다. 작업실의 턴테이블에서는 언제고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어쩌다 돈이 생겨 명동의 일본서점 거리에 가서 원하던 책을 구하면 표정이 환해졌다. 광화문에 교보문고가 생기자 일서코너 산보가 잦아졌다.  
  
칠순 되자 그림 제법 팔려 여유도
 
소설가 이즈미 교카(泉鏡花)의 문고판 전집을 손에 쥔 그의 표정은 어린애처럼 득의만면했다. 서점 안의 커피숍에서 책갈피 냄새에 커피향을 블랜딩해가며 흐뭇한 시간을 즐겼다. 독서량이 엄청났다. 미술사뿐 아니라 지식 전반에 박식한 교양인이었다.
 
명륜동에 사는 박고석과 근방의 샘터화랑 엄중구는 일주일에 몇 번씩 제법 그럴듯한 식사자리를 가졌다. 여기에 한 달에 한두 번 황염수가 나타났다. 황염수는 답례로 가끔 엄중구를 데리고 자신의 단골인 초밥집과 장어집을 찾았다. 미아삼거리에서 장위동으로 가다보면 나타나는 허름한 식당들이었다. 그가 떠올리는 초밥집은 젊은 날에 본, 밥알 숫자까지 균질한 도쿄의 일급노포였지만 현실은 서울 변두리의 거친 초밥집이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을 방문한 듯 행복해했다.
 
황염수의 동선동 자택 근처에는 갈비집이 있었다. 식당 안 담벼락에는 시커먼 연탄이 쌓여있어 창고를 방불케 하는 컴컴하고 허름한 가게였다. 칠순이 되자 그림이 제법 팔려 생활에 다소 윤기가 흘렀다. 갈비집에 가는 날은 황염수로서는 엄청난 소비의 날이었다. 갈비와의 전투라도 치르듯, 틀니를 끼우고 자세를 가다듬는 모습이 사뭇 엄숙했다. 연탄불에 벌겋게 구워진 갈비를 손님에게 다정스레 권한다. 오랫동안 그를 억누르던 생활의 곤궁에서 벗어나 이제는 그림을 팔아 갈비쯤은 대접할 수 있다는 뿌듯함이 온 얼굴에 숨김없이 다 드러날 정도로 순수한 사나이 황염수였다.
 
황염수의 장미그림은 장미의 잎과 꽃을 가르는 검은 윤곽선이 두툼한 표현파풍의 그림이다. 그런데 표현파답지 않게 선 하나를 긋는 데 걸리는 시간은 엄청 길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선을 그어 나갔다. 그림의 완성이 더뎠다.
 
황염수는 평생 캔버스 위에 장미를 피워내었다. 현실의 장미가 피는 시간보다 더 느리게 붓으로 장미를 피웠다. 현실의 장미는 화려하나 현실의 황염수는 결코 화려하지 못했다. 현실 속의 그 어떤 화려함도 결국은 시들어 버린다. 현실의 시간성을 넘어서는 영원의 장미를 느린 붓질로 피워내어, 시들지 않는 불멸의 시공간에 황염수는 존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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