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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자툰 “일국양제 매섭게 비판하는 선쥔산 이해시킬 필요”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18〉

문혁 10년은 천주더(앉은 사람 오른쪽 첫째)의 청춘을 삼켜버렸다. 문혁이 끝난 후 40이 넘은 나이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네웨이핑(앉은 사람 오른쪽 둘째)과 후룽화(앉은 사람 왼쪽 첫째)의 대국을 지켜보는 천주더. 1980년 1월, 수저우창랑정. [사진 김명호]

문혁 10년은 천주더(앉은 사람 오른쪽 첫째)의 청춘을 삼켜버렸다. 문혁이 끝난 후 40이 넘은 나이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네웨이핑(앉은 사람 오른쪽 둘째)과 후룽화(앉은 사람 왼쪽 첫째)의 대국을 지켜보는 천주더. 1980년 1월, 수저우창랑정. [사진 김명호]

영국은 신중국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한국전쟁 참전했을 때도 중국지원군과 기를 쓰고 싸우지 않았다. 부산 유엔군 묘지에 영국군 무덤이 많다. 전사자가 많아서가 아니다. 사망자를 현지에 묻는 습관 때문이다. 홍콩총독부도 대륙에 신경을 썼다. 대만 군부나 관방 인사들의 방문을 제한했다. 1982년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제창하자 중국 정부는 대만의 명망가들과 대화를 원했다. 홍콩은 제쳐놓고 영국 정부와 교섭했다. “대만 정치가들의 홍콩 방문 제한을 풀어달라.”
  

장징궈 “시대가 변했다” 빗장 풀자
대만 상인들 홍콩 거쳐 대륙행 급증
선쥔산도 홍콩 자주 찾아 바둑 즐겨

쉬자툰 “저우언라이도 탐낸 인재”
진융에게 부탁해 선쥔산 만나

바둑 고수 천주더, 진융 소설 읽고 감탄
 
진융의 말년은 화려했다. 틈만 나면 중국의 명승지를 유람했다. 가는 곳마다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신파 무협소설의 대가였지만 인색했다. 얌체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사진 김명호]

진융의 말년은 화려했다. 틈만 나면 중국의 명승지를 유람했다. 가는 곳마다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신파 무협소설의 대가였지만 인색했다. 얌체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었다. [사진 김명호]

대만 총통 장징궈(蔣經國·장경국)는 요지부동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인재 발굴과 경제성장이다. 공산 비적들과의 담판이나 대화는 할수록 손해다. 중공과는 그 어떤 담판도 안 한다. 소련과의 접촉도 절대 안 한다.” 몇 년 지나자 생각을 바꿨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했다. 우리도 변해야 한다”며 제 손으로 빗장을 풀었다. 미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대만 상인들이 홍콩을 경유해 대륙으로 들어갔다. 투자도 서슴지 않았다.
 
대륙에 충성을 다짐한 홍콩 명사들이 신화통신홍콩분사에 건의했다. “홍콩에서 대륙 비자 받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홍콩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주기 바란다. 관방인사들의 방문규제도 해제할 때가 됐다.” 분사 사장쉬자툰(徐家屯·허가둔)이홍콩총독 만난 자리에서 대만인 비자 문제를 꺼냈다. 총독은 “대만의 관방인사도 포함되느냐”고 반문했다. 이미 베이징의 동의를 받아놓은 쉬자툰은 즉석에서 답을 줬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우리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홍콩 밍바오(明報)사장 진융(金鏞·김용)은 대륙의 국수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중국 최초의 9단 천주더(陳祖德·진조덕)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쉬자툰의 회고를 소개한다. “1980년 1월 장수성서기 시절, 중국 현대바둑의 태두 천주더가 제자 네웨이핑(聶衛平·섭위평)과 함께 수저우(蘇州)에 왔다. 바둑 얘기로 꿈같은 한나절을 보냈다. 나는 장난기가 동했다. 중국 장기의 사령관 후룽화(胡榮華·호영화)와 네웨이핑의 대국을 권했다. 상하이에 있는 후룽화를수저우로 초청했다. 남송(南宋) 명장 한세충(韓世忠)의 저택이었던, 유서 깊은 정원 창랑정(滄浪亭)에서 대국이 벌어졌다. 나는 일정관계로 참관하지 못했다.”
 
쉬자툰은천주더와 진융의 끈끈한 관계도 빠뜨리지 않았다. “진융은 바둑 광이었다. 자신의 무협소설에 등장하는 고수와 협객들도 한결같이 바둑의 고수들이었다. 창랑정 대국이 있었던 그 해 겨울, 천주더는네웨이핑과 바둑판을 마주했다. 대국 도중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진융은 추앙하던 대가의 중병 소식에 당황했다. 일면식도 없던 천주더에게 편지를 보냈다. “홍콩의 겨울은 따듯한 편입니다. 병을 다스리기에 적합합니다. 제집에서 휴식과 양병(養病) 취하시면, 제겐 그런 영광이 없습니다.”
 
중공총서기 장쩌민(오른쪽)은 선쥔산을 3번 만났다. 총 6시간 동안 기탄없는 대화를 나눴다. 1990년 12월 1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사진 김명호]

중공총서기 장쩌민(오른쪽)은 선쥔산을 3번 만났다. 총 6시간 동안 기탄없는 대화를 나눴다. 1990년 12월 1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사진 김명호]

천주더는 시와 서예에 능했다. 무협소설을 글로 취급하지 않았다. 무례한 사람이라며 무시해 버렸다. 병문안 온 친구가 진융의 소설을 들고 왔다. 거리에 널려있는 해적판이었다. 심심풀이 삼아 읽다 보니 몰입해 버렸다. 숙련된 문체와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다. 친구들이 홍콩에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진융의 환대는 극진했다. 도가 지나쳐도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6개월간 머물며 건강을 회복했다.
 
대만인의 홍콩방문이 수월해지자 선쥔산(沈君山·심군산)도 홍콩을 자주 찾았다. 진융의 집에 머물 때가 많았다. 진융은 선쥔산을 만나게 해 달라는 쉬자툰의 부탁에 어리둥절했다. 이유를 물었다. 쉬자툰도 숨기지 않았다. “선쥔산은 중국의 인재다. 진짜 애국자다. 부모도 중국 식량 개선의 공신이다. 모친은 전쟁 시절 보리(大麥) 품종 개량에 주야를 가리지 않았다. 과로로 순직했다. 총리 저우언라이도 생전에 선쥔산을 탐냈다. 선쥔산은 덩샤오핑 동지의 일국양제를 매섭게 비판했다.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통전 대상은 아니다.”
 
진융은 꾀를 냈다. 천주더와선쥔산을 홍콩으로 초청했다. 두 사람은 온종일 바둑에 심취했다. 하루는 천주더가 외출했다. 훗날 선쥔산이 구술을 남겼다. “홍콩에서 쉬자툰을 두 번 만났다. 첫 번째는 신문사 주관 파티였다. 악수와 형식적인 인사말이 다였다. 쉬자툰은 명의만 신화통신홍콩분사 사장이었다. 실제는 중공의 홍콩주재 최고 책임자였다. 지하 총독이나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은 하늘과 통하는 통천인물(通天人物)이라며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자본가들이 특히 심했다. 처음 부임했을 때는 어찌나 강경했던지 간담이 서늘했다고 한다. 홍콩 사정을 이해한 후부터 사람이 변했다고 들었다.”
  
“선쥔산 부모는 중국 식량개선의 공신”
 
두 번째 만남은 진융의 사저였다. 천주더가 외출하자 선쥔산은 정원을 산책했다. 갑자기 고용인이 달려왔다. 사장이 신문사에서 곧 귀가하니 외출하지 말라는 말 남기고 황급히 사라졌다. 잠시 후, 진융이 도착했다. 상기된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쉬자툰이 당신과 만나고 싶어한다. 제발 거절하지 마라. 부탁한다.” 선쥔산은 바둑 관련 일은 아니라고 직감했다. 비밀 많은 인물과의 대화에 입맛이 당겼다. 흔쾌히 수락했다.
 
두 대의 흑색 리무진이 도착했다. 대형 버스가 토해낸, 색안경에 방탄복 착용한 수십 명이 진융의 집을 에워쌌다. 쉬자툰이 앞장서고 네 명의 보좌관이 뒤를 따랐다. 첫 번째 파티장에서 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옆에 있던 진융은 어디로 피했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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