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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직전의 런던…실험정신 빛나더라

 
패션위크는 전 세계 패션 트렌드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또 바이어가 디자이너·브랜드의 옷을 사고파는 실질적인 ‘비즈니스’가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세계 4대 패션위크는 2월부터 뉴욕을 시작으로 런던-밀라노-파리 순으로 약 1주일씩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진행된다. 이 중 런던은 4대 패션위크 중에서도 가장 과감한 실험과 도전이 넘쳐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코로나19의 팬데믹이 진행되기 전인 지난 2월 14~18일 동안 중앙일보 강남인류가 그 현장을 찾았다.   

2020 가을·겨울 런던패션위크를 가다
지숙가능한 패션, 공공 확대 등 보여준 패션의 미래

지난 2 월 16 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록산다’의 2020/21 가을겨울 컬렉션 쇼 현장. 비주얼 아티스트 라나 베굼이 폐어망으로 만든 작품 ‘No.976 네트(NET)’를 쇼 공간에 설치해 지속가능성과 실험성을 함께 보여줬다. 어망과 비슷한 색감의 옷을입은 모델이 걸어나오자 작품과 옷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처럼 보인다. 사진 런던패션협회

지난 2 월 16 일(현지 시간) 영국 런던에서 열린 ‘록산다’의 2020/21 가을겨울 컬렉션 쇼 현장. 비주얼 아티스트 라나 베굼이 폐어망으로 만든 작품 ‘No.976 네트(NET)’를 쇼 공간에 설치해 지속가능성과 실험성을 함께 보여줬다. 어망과 비슷한 색감의 옷을입은 모델이 걸어나오자 작품과 옷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처럼 보인다. 사진 런던패션협회

런던 패션위크는 운 좋게도 코로나19의 습격을 피했다. 런던 패션위크 바로 뒤이어 열린 밀라노와 파리 패션위크는 코로나19의 유럽 확산 속도가 빨라지는 시점과 맞물려 한꺼번에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1000명 이상이 한 공간에 모이는 컬렉션 쇼의 안전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손님으로 초대됐던 가수 청하의 스태프가 귀국 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는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일주일 전의 일정이었던 런던 패션위크 기간에 런던에선 마스크를 쓴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코로나19로부터 자유로웠다.
 
지속가능한 패션 강조
런던 패션위크는 세계 4대 패션위크 중 가장 실험적이기로 유명하다. 바이어·기자 등 패션관계자들도 ‘영감’을 얻기 위해 가는 곳으로 꼽힐 정도다. 다섯 시즌 이상 이곳을 찾았다는 국내 편집매장 '분더샵'의 연문주 바이어는 "런던 패션위크는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의상과 퍼포먼스를 그 어떤 곳보다 많이 보여줘, 새로운 무언가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되는 곳"이라고 평했다.
200214 Shrimps AW20200214 LFW AW20London Fashion Week AW20Credit: Ben BroomfieldCredit Social: @photobephotoCopyright: Ben Broomfield Photography07734 852620photo@benbroomfield.com

200214 Shrimps AW20200214 LFW AW20London Fashion Week AW20Credit: Ben BroomfieldCredit Social: @photobephotoCopyright: Ben Broomfield Photography07734 852620photo@benbroomfield.com

런던의 실험은 패션위크 첫날인 2월 14일부터 시작됐다. 오후 4시가 되자 런던 중심가에 위치한 칼튼 하우스 테라스에는 브랜드 '쉬림프'의 쇼를 보기 위한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쉬림프는 2013년 론칭한 디자이너 한나 웨일랜드의 브랜드로, 인조 모피를 사용한 옷을 선보이며 동물 학대 문제에서 자유로운 '지속가능한 패션'을 보여주는 동시에 통통 튀는 젊은 감각으로 셀럽을 포함한 젊은 층의 사랑을 받으며 성공했다. 이번 쇼 역시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유명한 나오미 쉬마다, 올해 개봉한 영화 '원더우먼 1984'에 출연한 배우 가브리엘라 와일드 등 유명인사와 인플루언서들이 대거 참석해 그 인기를 짐작케 했다. 이번 시즌엔 정장 바지 위에 입은 파란색 오버사이즈 반코트, 분홍색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그 위에 인조 모피로 만든 모자를 쓰는 등 레트로 무드가 듬뿍 담긴 인조 모피 패션을 보여줬다.  
'지속가능성'은 런던 패션위크가 지난해 9월 열린 2020년 봄 시즌부터 강조하고 있는 테마다. 영국패션협회는 패션위크 기간 동안 지속가능성을 실천하는 브랜드들을 뽑아 긍정적 패션이라는 의미의 '포지티브 패션'(Positive fashion) 전시를 열고 있다. 올해는 53인치 대형 스크린을 몸에 걸치면 마치 옷을 바꿔 입는 것처럼 화면에 여러 가지 옷이 플레이되는 디지털 의상을 만든 니콜 지스만, 재생 직물과 윤리적으로 생산된 소재만으로 옷을 만들고 그 위에 화려한 보석 장식을 한 땀 한 땀 수놓아 '새로운 사치품'으로서의 옷을 창조한 패트릭 맥도웰 등이 포지티브 패션 멤버로 선정됐다.     
'포지티브 패션'에 전시된 디자이너 니콜 지스만의 디지털 의상. 윤경희 기자

'포지티브 패션'에 전시된 디자이너 니콜 지스만의 디지털 의상. 윤경희 기자

영국 브랜드 '멀버리'는 런던 뉴본 스트리트 매장에 공방을 옮겨와 식물성 소재로 만든 베지터블 레더로 만드는 가방 제조 과정을 보여주며, 지속가능성과 공공성 확대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사진 멀버리

영국 브랜드 '멀버리'는 런던 뉴본 스트리트 매장에 공방을 옮겨와 식물성 소재로 만든 베지터블 레더로 만드는 가방 제조 과정을 보여주며, 지속가능성과 공공성 확대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사진 멀버리

영국 브랜드 '멀버리' 역시 뉴본 스트리트에 있는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지속가능성에 대한 실험을 했다. 오래도록 사용할 제품을 만든다는 의미의 '메이드 투 라스트'(made to last) 캠페인을 패션위크 기간 전개한 것. 공방을 매장 안으로 옮겨와 매장을 찾은 사람들이 멀버리 장인이 가방 만드는 직접 과정을 보고 또 이들과 대화할 수 있게 했다. 이때 사용한 가죽은 식물 부산물로 만든 '베지터블 레더'를 선택해 지속가능성에 대한 의미를 더했다. 또 매장 한쪽에선 오래된 멀버리 가방을 수거해 이를 깨끗하게 손봐서 재판매하는 일종의 중고 재활용 마켓도 열었다. 새것처럼 손본 20년 된 서류 가방을 기존 가방의 3분의 1 가격으로 사거나,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옛 한정판 가방을 다시 만날 기회였다. '멀버리 익스체인지'라는 이름의 재활용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계속되는데, 런던 뉴본 스트리트 매장으로 오래된 멀버리 가방을 가져오면 장인들이 직접 이를 고친 후 판매하고, 가방을 제공한 사람에게는 멀버리 상품권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멀버리의 티에리 앙드레타 CEO는 "이 혁신적인 서비스는 수십 년간 기술을 쌓은 멀버리 장인들을 기념하는 동시에 순환 경제의 원칙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다. 또 고객에게 사랑받았던 가방에 두 번째 생명을 불어넣고, 시간이 흘러도 변함 없이 아름다운 디자인의 아카이브 백을 구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이라고 밝혔다.
 
대중을 패션에 끌어 들이다
'드 라 발리'의 퍼블릭 쇼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초대를 받아야만 참석할 수 있는 일반적인 패션쇼와 달리 퍼블릭 쇼는 누구든지 티켓을 구매해 쇼를 볼 수 있다. 윤경희 기자

'드 라 발리'의 퍼블릭 쇼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초대를 받아야만 참석할 수 있는 일반적인 패션쇼와 달리 퍼블릭 쇼는 누구든지 티켓을 구매해 쇼를 볼 수 있다. 윤경희 기자

한편에선 대중과 호흡하는 '퍼블릭 쇼'와 '토크 콘서트'가 열렸다. 퍼블릭 쇼는 일반인이 티켓을 사서 즐길 수 있는 패션쇼다. 지난 2019년 처음 시작해 이번이 두 번째다. 첫 회에는 자신의 패션 브랜드를 갖고 있는 인플루언서·방송인 알렉사 청의 패션 브랜드 '알렉사 청'과 '셀프 포트레이트' '헨리 홀랜드'가, 올해는 '텀펄리 런던'과 '드 라 발리'가 퍼블릭 쇼의 주인공이 됐다.  
영국 패션 컨설팅 업체 ‘오이코노모스'의 여인해 대표는 "퍼블릭 쇼는 대중에게 친숙한 브랜드, 컬렉션 쇼를 하지 않았던 브랜드로만 구성됐다"며 "평소 패션쇼를 직접 보고 싶었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빅 이벤트에 참여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환영받는다"고 말했다. 영국패션협회의 샬롯 버그만 커뮤니케이션 책임자는 "올해 약 2500명이 퍼블릭 쇼를 관람했다"고 밝혔다. 특히 토요일에 있었던 텀펄리 런던의 쇼는 티켓이 매진되는 등 인기가 높았다. 쇼와 쇼 사이에 열린 토크 콘서트에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 토미 힐피거, 레드카펫 패셔니스타로 유명한 배우 빌리 포터, 구두 브랜드 '지미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산드라 초이 등 유명인사들이 참가해 화제가 됐다.  
'드 라 발리'의 퍼블릭 쇼 피날레 무대가 시작되자 일반인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서 사진을 찍는 등 자유롭게 쇼를 즐기고 있다. 윤경희 기자.

'드 라 발리'의 퍼블릭 쇼 피날레 무대가 시작되자 일반인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서 사진을 찍는 등 자유롭게 쇼를 즐기고 있다. 윤경희 기자.

7번째 '도미 나우' 쇼를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개최한 토미 힐피거. 사진 토미 힐피거

7번째 '도미 나우' 쇼를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개최한 토미 힐피거. 사진 토미 힐피거

패션쇼를 런던의 주요 랜드마크에서 열어 패션위크를 일종의 도시 축제로 만든 것도 눈에 띄었다. 세계 주요 도시를 돌며 '토미 나우' 컬렉션 쇼를 진행 중인 토미 힐피거는 이번 협업 파트너인 카레이서 루이스 해밀턴의 고향인 런던에서 쇼를 개최하면서 테이트 모던 미술관을 장소로 선택했다. 시몬 로샤는 자신의 옷만큼이나 화려한 랭카스터 하우스를 장소로 택했다. 15세기 장미전쟁을 일으킨 요크 가문의 저택으로 지금은 영국 외무성이 관리하고 있는 역사적 건물이다.  
 
신진 디자이너 육성이란 이런 것
런던 패션위크의 실험성은 역시 ’옷‘에서 빛을 발한다. 현재 런던 패션계를 이끌고 있는 디자이너 리차드 말론, 리차드 퀸, 시몬 로샤, 몰리 고다드 등이 실험적인 꾸뛰르 패션(화려하고 예술적인 수작업 의상)을 보여줬다. 록산다는 화려한 의상과 함께 쇼 현장에 비주얼 아티스트 라나 베굼이 폐어망으로 만든 작품 'No.976 네트(NET)'를 설치해 지속가능성을 함께 실험한 무대를 선보였다. 
런던패션위크 2020 가을겨울. 리차드 말론

런던패션위크 2020 가을겨울. 리차드 말론

런던 패션위크 jw앤더슨, 몰리 고다드

런던 패션위크 jw앤더슨, 몰리 고다드

사실 꾸뛰르 풍의 옷들은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힘들다. 드레스 수준을 넘어 하나의 예술 작품같은 옷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디자이너의 풍부한 상상력과 창의성을 실현하는데 꾸뛰르 의상만 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런던 디자이너들이 이런 의상들을 자신 있게 내놓고 또 지속할 수 있는 이유는 영국 왕실과 런던패션협회 등이 직접 신진 디자이너를 발굴하고 또 키워내기 때문이다. 세계의 많은 바이어가 새롭고 참신한 디자이너를 찾기 위해 런던에 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브랜드 ’JW 앤더슨‘의 국내 수입ㆍ유통사인 리앤한의 조동석 마케팅 담당 역시 “런던에선 요즘처럼 급격하게 변화하는 패션 생태계에 발 빠르게 적응하는 신진 디자이너들의 모습은 늘 흥미를 유발한다"며 “타 패션위크와 차별화된 런던만의 독특함은 앞으로도 더욱 공고해 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수작업으로 만든 정교하고 화려한 니트 장식이 달린 드레스를 선보인 '시몬 로샤'.

수작업으로 만든 정교하고 화려한 니트 장식이 달린 드레스를 선보인 '시몬 로샤'.

올해 울마크 컴퍼니의 신진 디자이너 후원 프로그램인 ’울마크 프라이즈‘의 파이널 리스트에 오른 한국 디자이너 신규용ㆍ박지선 디자이너(블라인드니스)는 “런던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이 부럽다”고도 했다. 실력을 인정받은 신진 디자이너의 경우,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패션협회나 왕실이 나서 재정적으로나 회계ㆍ경영 컨설팅 등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진 디자이너 스폰서십 ’뉴젠‘(NEWGEN)이 대표적이다. 신진 디자이너를 뜻하는 ‘뉴 제너레이션’(New Generation)을 줄인 말로, 가능성 있는 젊은 디자이너들을 선정해 자신의 컬렉션을 보여줄 수 있는 런웨이 쇼 개최 자금을 대주고, 바이어ㆍ기자에게 옷을 보여줄 수 있는 전시 공간과 임시 쇼룸도 제공한다. 뉴젠의 첫 번째 수혜자는 바로 천재 디자이너로 손꼽히던 고 알렉산더 맥퀸. 국내에서도 유명한 J.W 앤더슨도 뉴젠 출신이다. 올해 런던 패션위크에선 2019~20년 뉴젠 수혜자들을 소개했는데 이미 유명한 리차드 퀸, 리차드 말론, 어-콜드-월 등이 명단에 있었다. 한국도 서울디자인재단이 운영하는 ’텐소울‘ 같은 지원 프로그램이 있지만, 뛰어난 디자이너에게 지속적인 지원을 하기보다 여러 디자이너에게 자원을 나눠주는 보여주기식 행정으로 운영되고 있어 아쉬움이 있다. 
 
런던=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런던패션협회, 각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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