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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구하려 계급 5단계 강등하고 참전한 프랑스 장군

기자
남도현 사진 남도현

Focus 인사이드 

 
맥아더(오른쪽)와 대담하는 랄프 몽클라르 중령(왼쪽), 그가 바로 마그랭-베르느네다. [사진=지평리 전투기념관]

맥아더(오른쪽)와 대담하는 랄프 몽클라르 중령(왼쪽), 그가 바로 마그랭-베르느네다. [사진=지평리 전투기념관]

 

3성 장군이 중령 계급으로 참전
한국에서 레지스탕스 저력 보여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프랑스는 승전국의 위치를 차지했지만,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할 만큼 뭔가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전쟁 초기인 1940년, 독일과 맞붙어 불과 6주 만에 항복했고 4년 동안 지배를 받은 후 해방도 미국과 영국의 주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겉으로 드러난 결과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많이 알려진 것처럼 드골이 이끌던 자유 프랑스나 레지스탕스의 저항이 있었다.
 
사실 그들의 성과는 실제로는 미미했지만 그래도 그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망명지에서 편성한 제2기갑사단이 파리 해방과 독일 본토 공략 시에 선봉에 설 수 있었다. 분명히 수많은 프랑스인의 노력은 종전 후 프랑스를 예전의 강대국 위치로 돌려놓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라울마그랭-베르느레(Raoul C. Magrin-Vernerey)'도 그렇게 대독 항전을 펼치는데 앞장섰던 인물 중 하나였다.
 
1940년 5월 노르웨이 나르빅 일대에서 작전을 펼치는 프랑스군. 이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프랑스가 독일에 거둔 유일한 전략적 승리였다. [사진=wikimedia]

1940년 5월 노르웨이 나르빅 일대에서 작전을 펼치는 프랑스군. 이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프랑스가 독일에 거둔 유일한 전략적 승리였다. [사진=wikimedia]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초급지휘관으로 활약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외인부대를 이끌고 전쟁 초기에 프랑스군이 유일하게 거둔 전략적 승리인 나르비크(Narvik)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프랑스가 항복하자 500여 부하를 이끌고 망명 자유 프랑스군에 가담하여 대독 항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종전 이후 3성 장군의 위치까지 올라갔을 만큼 새롭게 재건 된 프랑스군의 핵심이 되었다.
  
그런데 1950년 마그랭-베르느레 중장은 계급을 무려 5단계나 하향한 중령을 달고 또다시 전쟁에 참전하는 보기 드문 일을 벌였다. 그동안 전쟁터에서 무려 18번의 상처를 입었고 18번 훈장을 받은 맹장이었던 그가 60세에 스스로 계급장을 낮추어 달았던 이유는 단지 지휘하려는 부대가 대대 규모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부대의 창설도 프랑스가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하자 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1920년대 레바논 주둔군 복무 당시의 라울 마그랭-베르느레. [사진=alchetron.com]

1920년대 레바논 주둔군 복무 당시의 라울 마그랭-베르느레. [사진=alchetron.com]

 
북한의 불법 남침에 유엔이 대응하기로 결의했을 때, 상임이사국이었던 프랑스는 지위에 맞는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따라서 적어도 영국 정도의 병력을 파견해야 했지만 처음 언급한 것처럼 승전국이었음에도 국가 재건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한창 식민지 베트남에서 진행 중인 전쟁도 골칫거리였다. 따라서 한국 파병을 위한 대대급 부대의 편성조차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한국전쟁에 파병돼 계곡에서 작전 중인 프랑스 대대원의 모습 [사진=wikimedia]

한국전쟁에 파병돼 계곡에서 작전 중인 프랑스 대대원의 모습 [사진=wikimedia]

 
이에 마그랭-베르느레는 제2차 대전에 참전한 경험 많은 예비역을 주축으로 해서 일부 현역 자원병을 지원받아 1950년 10월 1일, 부대를 창설했고 스스로 지휘관이 되었다. 덕분에 규모는 작지만, 지휘관의 역량 등을 고려했을 때 미국·영국 등과 견주어 외견상으로 결코 비중이 작지 않은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국방차관이 어떻게 장군이 계급을 낮출 수 있냐고 걱정했을 정도로 내부에서 만류하기도 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편성된 프랑스대대가 1950년 11월 29일 지구를 반 바퀴 돌아 한반도에 도착했을 때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뒤집혀 유엔군이 어려운 시기였다. 스스로 강등을 자원한 마그랭-베르느네 대대장은 미 2사단에 배속되어 곧바로 최전선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1951년 2월 전세를 일거에 반전시킨 지평리 전투에서 대승의 당당한 한 축을 담당했다.
 
지평리 전투 당시 마그랭-베르네르와 프랑스군 병사들 [중앙포토]

지평리 전투 당시 마그랭-베르네르와 프랑스군 병사들 [중앙포토]

 
경험이 많은 마그랭-베르느네는 압도적인 적의 대공세에 당황하지 않았다. 최대한 적을 유인하여 일격을 가하고, 적의 심리전에 역 심리전을 펼치며 육박전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다양한 전술로 중공군을 무너뜨렸다. 이 전투의 의의는 실로 대단하여 유엔군이 지난 2개월간의 후퇴를 끝내고 재반격으로 전환되는 결정적 도화선이 되었다. 바로 직전까지 미 합참은 만일 50여 ㎞를 더 후퇴하면 대한민국을 포기할 생각마저 하던 중이었다.
 
2011년 지평리 전투 상기행사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과 프랑스군 노병들이 다시 만났다. [중앙포토]

2011년 지평리 전투 상기행사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과 프랑스군 노병들이 다시 만났다. [중앙포토]

 
지평리 전투에서 프랑스대대가 보여준 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허무하게 무너진 약체의 모습이 아니라 나폴레옹 당시 전 유럽을 호령하던 세계 최강 군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상징인 닭 중에서도 자신을 스스로 낮추면서 야전을 뛰어다닌 용맹한 그는 진정한 최고의 싸움닭이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사를 살펴보면 마그랭-베르느네라는 이름은 상당히 낯선 이름이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프랑스군에서 활약할 때 사용한 가명인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라는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참전 프랑스대대의 전설적인 지휘관이었던 몽클라르 중령이 바로 마그랭-베르느네 중장이었다. 아마도 그는 가명으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어려웠던 당시를 기억하며 용기를 반추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때문에 그는 위대한 몽클라르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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