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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동독 최초·최후의 민주선거, 빠른 통일 열망 재확인

한스 자이델 재단과 함께하는 독일 통일 30돌 〈6〉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1990년 3월 동독 총선 지원을 위해 에르푸르트시를 방문했다.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1990년 3월 동독 총선 지원을 위해 에르푸르트시를 방문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동독의 변화 필요성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그 체제가 와해되고 통일 독일로 편입되리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콜, 통일 염두에 둔 연합형태 제안
동독인들 요구로 총선 두 달 당겨

기민당 중심 사회연합당·민주혁신
‘독일을 위한 동맹’ 결성 48% 득표

통일 주저하던 사민당은 22% 그쳐
동독 SED 후신 민사당은 16% 얻어

당시 서독의 연방 총리였던 헬무트 콜이 89년 11월 28일에 통일을 위한 10개 조항을 발표할 당시에도 통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염두에 둔 일종의 연합 형태를 제안했다. 그러나 실제로 동독 주민들은 빠른 통일을 원했다. 동독 주민들이 사회주의통일당(SED)의 통치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외쳤던 ‘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는 구호는 곧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로 바뀌었다.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 중 하나가 민주 선거 이후에 표출되었다. 89년에 시작된 지방선거 결과 조작에 대한 저항이 동독 체제의 종말로 연결되는 단초가 된 셈이다.
  
동독의 종말, 지방선거 조작이 도화선
 
인민회의 선거는 언론의 커다란 관심 대상이었다. 사진은 처음으로 설치된 인민회의 선거 결과 보도를 위한 전용 스튜디오 모습.

인민회의 선거는 언론의 커다란 관심 대상이었다. 사진은 처음으로 설치된 인민회의 선거 결과 보도를 위한 전용 스튜디오 모습.

동독 주민들의 이해관계를 실질적으로 대변하는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는 일은 따라서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이었다. 그때까지 활동하던 동독 인민회의는 전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인민회의는 통치의 주체인 공산당이 결정한 정책들에 대한 거수기 역할을 하는 기관이었다.
 
동독 SED는 2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 사민당과 독일공산당이 강제로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당이다. 동독은 민주주의에서 볼 수 있는 경쟁 체제가 동독 사회에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 주기 위해서 기독교민주당이나 자유당, 심지어는 국가민주당과 같은 정당들의 존재를 형식적으로는 허용하였지만 이러한 정당들은 노조나 여성연맹, 자유청소년단 등과 같이 SED가 장악한 관변조직들의 관리 아래 놓여 있었다.
 
총선 관련 기사를 보도한 브란덴부르크 지역 신문. ‘최초로 자유 의지에 따라 나라를 위한 정치의 미래에 관해 결정을 내렸다’는 제목을 달았다.

총선 관련 기사를 보도한 브란덴부르크 지역 신문. ‘최초로 자유 의지에 따라 나라를 위한 정치의 미래에 관해 결정을 내렸다’는 제목을 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거는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투표용지에는 기표란이 없이 출마자들의 이름만 쭉 적혀 있어서 현실적으로 선거란 투표용지를 그냥 접어서 투표함에 넣는 방식이었다. 기표소에 들어가서 투표용지에 적혀 있는 이름을 지우는 행위를 하면 바로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선거 결과는 늘 99%의 찬성으로 발표됐기 때문이다.
 
당초 원탁회의에서는 인민회의 선거를 90년 5월에 하기로 합의를 했지만 동독 주민들의 계속되는 강력한 요구에 따라 선거 날짜를 90년 3월 18일로 앞당기게 되었다.  
 
기민당과 ‘독일을 위한 동맹’의 선거 포스터. 빠른 통일과 사회주의 거부가 ‘독일을 위한 동맹’의 선거 핵심 공약이었다. [사진 연방 문서 보관소]

기민당과 ‘독일을 위한 동맹’의 선거 포스터. 빠른 통일과 사회주의 거부가 ‘독일을 위한 동맹’의 선거 핵심 공약이었다. [사진 연방 문서 보관소]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마자 동독 지역에서 사민당이 결성됐으며 동독 사민당은 서독 사민당의 지원을 받았다. 동독의 시민운동가들은 민주혁신(DA)이나 ‘민주주의 지금’과 같은 유권자 그룹들을 결성했다.
 
형식적으로만 존재했던 동독의 여러 정당이 SED의 통제에서 벗어나서 서독의 새로운 파트너 정당들과 연합했다. 기민당도 물론 그러했으며 자유민주당과 국가민주당이 자민당으로 통합됐다. 이러한 기존의 정당들은 사민당이나 민주혁신 또는 서독의 기사당과 협력했던 독일사회연합당과 같은 신설 정당들과 비교할 때 동독 지역 전역에 이미 구축된 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기민당과 ‘독일을 위한 동맹’의 선거 포스터. 빠른 통일과 사회주의 거부가 ‘독일을 위한 동맹’의 선거 핵심 공약이었다. [사진 연방 문서 보관소]

기민당과 ‘독일을 위한 동맹’의 선거 포스터. 빠른 통일과 사회주의 거부가 ‘독일을 위한 동맹’의 선거 핵심 공약이었다. [사진 연방 문서 보관소]

물론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정당은 SED에서 개명한 민사당(PDS)이었다.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 민주혁신과 독일사회연합당(DSU) 그리고 기민당은 ‘독일을 위한 동맹’으로 단일화했다. 이를 통해 동독 기민당은 민주적인 혁신과 협력을 기반으로 SED의 절대적인 통제를 받는 부속 정당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선거운동과정에서 서독으로부터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체제 개선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신호
 
베를린장벽 붕괴 전인 1989년 5월 동베를린시의 한 구의회 선거 투표용지. 기표란 없이 출마자들의 이름이 모두 적혀 있다. [사진 연방 문서 보관소]

베를린장벽 붕괴 전인 1989년 5월 동베를린시의 한 구의회 선거 투표용지. 기표란 없이 출마자들의 이름이 모두 적혀 있다. [사진 연방 문서 보관소]

콜 서독 총리는 선거전에 매우 능숙한 정치지도자였으며 선거전의 목표를 바로 서독의 주도하에 신속하게 통일을 달성하는 방향으로 잡았다. 에르푸르트, 바이마르, 드레스덴 등 가는 곳마다 수십만 명의 동독 주민들이 콜 총리를 열렬히 환영했다.  
 
전통적으로 작센 지역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던 사민당은 예전의 전성기를 되찾고 싶은 기대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았다. 사민당은 70년대와 80년대에 서독에서 이미 통일 의제와는 결별한 상태였기 때문에 90년 3월 동독 총선에서 통일을 목표로 삼는 데 계속 주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는 기민당이 중심이 된 ‘독일을 위한 동맹’의 압승으로 나타났다. 투표율은 93.4%에 달했으며 기민당이 40.8%를 얻었고 독일사회연합당이 6.3%, 민주혁신이 0.9%를 득표해 ‘독일을 위한 동맹’이 합해서 약 48%의 지지를 받았다. 사민당은 약 22%를 얻는 데 그쳤으며 민사당은 16%의 표를 얻었다. 이 밖에 6개의 군소정당이 몇 개의 의석을 차지했다. 시민운동가들이 만든 연대90은 녹색당과 나중에 합당했다.
 
‘독일을 위한 동맹’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민주혁신은 그 끝이 매우 좋지 않았다. 선거를 불과 사흘 앞둔 시점에서 당 대표였던 볼프강 슈누어가 슈타지의 비공식 정보원임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민당 동독 지역 당 대표였던 이브라힘 뵈메 또한 슈타지의 비공식 정보원이었던 사실이 밝혀진다. 이는 동독의 슈타지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당시에 새로 결성된 시민운동조직이나 정당들에 정보원을 침투시켰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문제는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사안이다.  
 
이렇게 90년 3월 18일에 치러진 동독 총선으로 평화혁명의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동독 주민들이 이제는 더는 체제의 개선에 만족하지 않고 신속한 통일을 원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로써 90년 3월의 동독 총선은 동독 시절에 치러진 최초인 동시에 마지막 민주선거가 되었다. 그렇게 선출된 인민회의의 목표가 의회와 동독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 됐기 때문이다. 〈계속〉
 
※ 번역 : 김영수 한스 자이델 재단 사무국장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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