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김초희 감독이지난달 27일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인터뷰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5일 개봉 '찬실이는 복도 많지'
전 홍상수 사단 영화 프로듀서
김초희 감독의 실제 경험 토대
실직한 40대 프로듀서 성장담
반찬가게 하려다 감독 데뷔해
"홍 감독 영향? 열심히 만드는 것"
“코로나가 막 터졌을 땐 심란했는데 지금은 하나도 안 심란해요. 오히려 절대 못 잊을 것 같아요. 늦은 나이에 데뷔하는데 이런 시국이라니, 누구나 겪는 상황은 아니잖아요.”
질박한 부산 사투리, 자신의 영화보다는 감염자 수며 부족한 병상 걱정이 앞서는 모습이 영화 속 잔정 많은 찬실(강말금) 판박이었다.
유명감독 돌연사로 실직한 프로듀서
![[사진 찬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3/04/dbf322d5-526e-4b75-92aa-ba39e508a30f.jpg)
[사진 찬란]
‘발연기’ 댓글에 상처받는 소피, 오늘만 사는 집주인 할머니(윤여정), 솔직하고 다정한 불어 선생 영(배유람), 장국영을 자처하는 의문의 사내(김영민)까지. 굵직한 사건보단 석류알처럼 톡톡 튀는 인물들이 재밌다. 일상에서 주고받는 감정들이 모과처럼 무심히 무르익어 기분 좋은 잔향을 남긴다.
김 감독이 직접 각본을 써 지난해 부산영화제 한국감독조합상, KBS독립영화상, CGV아트하우스상 3관왕, 서울독립영화제에선 관객상을 받았다.
영화 관두고 반찬가게 할까 고민했죠
![김초희 감독의 단편 '산나물 처녀'에선 외계인 역을 맡은 배우 윤여정은 이번 영화에선 "고단한 삶의 지혜가 체화된"(김 감독) 따뜻하고 다부진 집주인 할머니를 연기했다. [사진 찬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3/04/5f4c09c4-eace-4811-be5a-35ad6bdecbed.jpg)
김초희 감독의 단편 '산나물 처녀'에선 외계인 역을 맡은 배우 윤여정은 이번 영화에선 "고단한 삶의 지혜가 체화된"(김 감독) 따뜻하고 다부진 집주인 할머니를 연기했다. [사진 찬란]
마지막 작품이 ‘지금은맞고그때는 틀리다’(2015). 홍 감독은 이 영화로 만난 배우 김민희와 스캔들, 부인과 이혼소송까지 휩싸였다. 김초희 감독은 영화사를 떠났고, 이후 프로듀서 일도 끊겼다.
![맨 오른쪽부터 실직자가 된 찬실(강말금)은 친한 배우 소피(윤승아)네 가사도우미로 살길을 도모하는데 소피의 불어 교사 영(배유람)에게 가슴이 설렌다. [사진 찬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3/04/9a5d549f-4c7b-41cb-b3c6-7181c343b500.jpg)
맨 오른쪽부터 실직자가 된 찬실(강말금)은 친한 배우 소피(윤승아)네 가사도우미로 살길을 도모하는데 소피의 불어 교사 영(배유람)에게 가슴이 설렌다. [사진 찬란]
“시집은 못 가도 영화는 찍고 살 줄 알았는데….” “지 감독님 영화는 유일무이한 예술영화야. 막말로 찬실이 같은 PD가 없어도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는 영화였다고.”
“영화를 계속해야 하나, 반찬가게라도 해야 하나.” 41살에 찾아온 혼란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배우 윤여정의 제안으로 그는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의 경상도 억양 지도 일을 하게 됐고 그러면서 이번 영화의 구상이 떠올랐다. “캐릭터에 직업적 이력이 묻어난 것은 맞지만, 나머지는 만든 것”이라 설명했다.
"왜 그리 일만 하고 살았을꼬"
영화 제목도 수차례 바뀌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땐 ‘기다리는 마음’, 촬영하면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편집할 땐 ‘눈물이 안 나와’로 수정됐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는 찬실(강말금)이 영화를 처음 좋아했던 시절 동경했던 홍콩 배우 장국영이라 자처하는 의문의 사내도 나온다. 배우 김영민(왼쪽 사진)이 영화 '아비정전'(오른쪽 사진) 속 장국영과 닮은 분장을 하고 연기했다. '아비정전'의 "오후 3시"에 관한 명대사도 오마주했다.[사진 찬란, 디스테이션]](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3/04/20628691-7414-4de7-bca7-f751b7268bbe.jpg)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는 찬실(강말금)이 영화를 처음 좋아했던 시절 동경했던 홍콩 배우 장국영이라 자처하는 의문의 사내도 나온다. 배우 김영민(왼쪽 사진)이 영화 '아비정전'(오른쪽 사진) 속 장국영과 닮은 분장을 하고 연기했다. '아비정전'의 "오후 3시"에 관한 명대사도 오마주했다.[사진 찬란, 디스테이션]
“초고는 한 달 반 만에 썼어요. 이거 아니면 길이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나를 완성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큰 줄기는 지금과 비슷한데 자기연민이 정말 심한, 객관화가 전혀 안 된 시나리오였죠.”
1년 정도 고치며 자신을 빼닮은 찬실을 “객관화하려 노력했”단다. 편집을 다 끝내고야 “마치 다른 사람이 만든 것처럼” 영화를 보며 “찬실이는 정말 복이 많네…”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삶의 힘든 과정 속에서도 자신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이다, 싶었다. 찬실이를 멀리 우주에서도 응원해준 사람들이 보였다.
윤여정 "요즘 저런 아이 있을까"
프로듀서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운 윤여정이 그런 이다. 그는 언론시사회 때 김 감독을 두고 “요즘에도 저런 아이가 있을까, 싶을 만큼 사람에게 감동받았다”며 “정말 고생하며 촬영했는데 상을 많이 받아 뿌듯하다”고 진심을 드러냈다.
![영화는 찬실(강말금)이 산동네로 힘들게 이사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서울 홍제동 개미마을에서 촬영했다. [사진 찬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3/04/cb605e92-13df-4929-86da-17b6a142f74e.jpg)
영화는 찬실(강말금)이 산동네로 힘들게 이사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서울 홍제동 개미마을에서 촬영했다. [사진 찬란]
23살에 꿈꾼 감독, 23년 후 이뤄
“영화는 절대 혼자 만들 수 없으니 나보다 잘 만들 사람들이 있다면 기꺼이 그들을 도와 영화가 만들어지는 데 전력을 다할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감독보다 프로듀서 경력이 앞서며 멀리 둘러온 길이었다.
단편에선 전기밥솥·외계인 주인공
![김초희 감독의 단편 '산나물 처녀'에서 외계인을 연기한 윤여정. 이번 영화 배우들이 이를 비롯한 김 감독의 예전 단편들을 새삼 챙겨 보곤 ’감독님 진짜 ‘똘끼’ 다분히다“ 했을 만큼 개성이 남다르다. [사진 서울독립영화제]](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3/04/e416374f-2ce3-4065-97a1-3fa9cc680586.jpg)
김초희 감독의 단편 '산나물 처녀'에서 외계인을 연기한 윤여정. 이번 영화 배우들이 이를 비롯한 김 감독의 예전 단편들을 새삼 챙겨 보곤 ’감독님 진짜 ‘똘끼’ 다분히다“ 했을 만큼 개성이 남다르다.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전원사에 들어간 이후 찍은 ‘겨울의 피아니스트’(2011)는 홍상수식 연애담의 풍자버전, ‘우리순이’(2013)는 주인공이 전기밥통이었다. ‘산나물 처녀’는 평생의 짝을 찾아 지구에 온 외계인 처녀와 선남(仙男)의 사랑 이야기. 윤여정·정유미‧김의성‧안재홍‧예지원 등 홍상수 사단 배우가 자주 출연했다.
홍상수 감독 영향? "무의식 속에"
빛날 찬(燦), 열매 실(實). 찬실은, 마흔 되도록 결실이 없었던 주인공이 뭔가 맺어봤으면, 소망하며 지은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 ‘초희’도 사연이 있다. “처음 초(初)에 기쁠 희(喜). 본명은 경희에요. 초희란 이름을 20년 전 법적으론 아니고 집에서 바꿔서 부르기 시작했죠. 저희 엄마가 사주를 봤는데 본명이 너무 평범하다고. 이름 바꾸고서 조금, 살림살이가 나아졌어요. 그전에는 경제적으로 진짜 어려웠거든요.”
나전칠기 장인 아버지…가족 뿔뿔이

27일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김초희 감독. 왼쪽 팔에는 수전 손택의 저서에서 따온 '해석에 반대한다'는 문구의 문신이 새겨져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입시 점수에 맞춰 대학 불문과에 가선 비디오가게 ‘알바’에 더 열중했다. “방황하던 시기, 온통 심각했던” 그를, 우연히 본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 영화 ‘집시의 시간’이 사로잡았다. 그렇게 영화라는 “미지의 세계”가 열렸다.
새벽 3시까지 옷가게 등 하루 알바 3탕을 뛰어 파리1대학 유학길에 올랐다. 프랑스에선 외국인 유학생도 국립대는 무료에 가까운 학비로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비정전' 속 장국영 추억하며
![장국영인지 아닌지 모를 의문의 사내는 찬실이 한때 순수하게 푹 빠졌던 영화의 상징처럼 나타나 힘든 상황에 처한 그를 꼭 안아준다. [사진 찬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3/04/cf4f0590-c8f2-45a6-b72a-2eb9e43bc4c4.jpg)
장국영인지 아닌지 모를 의문의 사내는 찬실이 한때 순수하게 푹 빠졌던 영화의 상징처럼 나타나 힘든 상황에 처한 그를 꼭 안아준다. [사진 찬란]
“한 4년 전까지만 해도 예술영화만 좋아했다”는 그는 첫 장편을 만들면서 생각이 달라졌단다. “예전엔 취향을 벗어난 영화는 생각을 안 하고 싶었어요. 그런 한계나 편견에서 폭이 좀 넓어졌달까요.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고, 관객 입장에서 감동받아 여기까지 온 사람이 관객을 생각 안 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찬실이가 쓰던 시나리오 실제로…
영화 말미 찬실이 쓰고 있던 시나리오도 실제 그가 준비하던 것이다. 품어왔던 이야기들의 풍요로운 범람이다.
![시나리오를 쓰다 잠든 찬실(강말금)의 노트북을 친구인 배우 소피(윤승아)가 들여다본다. [사진 찬란]](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003/04/4803f950-3bb6-4f62-80b4-491c59c8e504.jpg)
시나리오를 쓰다 잠든 찬실(강말금)의 노트북을 친구인 배우 소피(윤승아)가 들여다본다. [사진 찬란]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