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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필의 미래를 묻다] 4차 산업혁명이 탄생시킨 ‘반값 법률 서비스’

리걸 테크(legal tech) 시대

Justice theme with hand pressing a button on a technology screen; Shutterstock ID 1452654242; 프로젝트: 중앙일보 지면; 담당자: 디자인데스크

Justice theme with hand pressing a button on a technology screen; Shutterstock ID 1452654242; 프로젝트: 중앙일보 지면; 담당자: 디자인데스크

중세 영국에는 ‘결투 재판’ 제도가 있었다. 원고와 피고가 각자 뽑은 투사들이 결투해 재판 결과를 가리는 방식이다. 미개한 중세 시대의 유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원래 법정은 증거로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가리는 곳이다. 하지만 기록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중세에는 제대로 된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증거에 따른 재판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고육지책으로 발전한 것이 결투 재판이었다고 이해할 법도 하다. 어차피 증거가 없다면, 신이 정해 준 결투의 결과에 따라 판결하는 것이 공정해 보였을 수도 있다.
 

법·기술 결합한 리걸 테크 기업
미국서 한 해 2조원 투자 몰려
인공지능이 법 체계 바꿀 수도
법·공학 융합한 학문 도입해야

현대에 이르러 증거가 넘치는 사회가 됐다. 변화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친자확인 소송이다. 과거 유전자 검사가 불가능했던 시절에는 친부 확인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관련자들의 진술과 정황을 근거로 친부인지 아닌지를 가려야 했던 판사는 그야말로 난감했을 것이다. 이제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손쉽게 당사자 주장의 진위를 가릴 수 있어, 비교적 간단한 소송이 돼 버렸다.
  
신기술 도입, 로펌 생존의 관건
 
이처럼 기술의 발전은 소송 제도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컴퓨터 시대를 맞아 전자 기록으로 소송하게 됐다. 요즘 소송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증거는 e메일, 휴대전화 메시지, CCTV 영상 등 전자 증거다. 우리 법원은 세계에서 선도적으로 모든 소송 서류를 전자 파일로 제출할 수 있게 하는 전자 소송 제도를 시행하고 있기도 하다. 흔히 사법부가 가장 보수적인 곳이라고들 이야기하지만, 거대한 기술 변화의 흐름에 따라 함께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4차 산업혁명은 앞으로 소송 제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소송뿐 아니라 계약 관계나 각종 규제 등 사법 시스템 전반에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을까.
 
조짐이 보인다. 법률 분야에 신기술을 접목하려는 시도를 ‘리걸 테크(legal tech)’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2018년 한 해 동안 리걸 테크 기업에 대한 투자가 총 2조원에 이를 정도로 시장 규모가 성장했다. 2018년 ‘리걸 줌(Legal Zoom)’은 5억 달러(6000억원) 신규 투자를 유치했다. 리걸 줌은 온라인으로 계약서나 유언장 등 법률문서의 초안을 제공해 주는 서비스에서 시작해 법인 설립, 지식재산권 등록, 계약서 검토에 이르기까지 확대하고 있다. 특히 인공지능(AI)을 이용해 이용자에게 적합한 계약서 초안을 제공하고 검토해 준다. 온라인 서비스에 대해 월정액 이용료만 받으므로 기업 입장에서 법무 비용 절감 효과가 크다.
 
리걸 테크 기업의 성장을 지켜보며 로펌의 인식도 바뀌는 모양새다. 신기술 도입을 실험적으로 고려하던 단계에서, 이젠 신기술을 도입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청구서 작성이나 사건 관리 등 단순한 작업에서 벗어나 법령 리서치, 법률 분석, 준법 감시 등 다양한 분야로 활용 영역을 빠르게 넓혀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는 이른바 ‘반값’ 법률 서비스 업체가 등장해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개인이나 중소기업이 흔히 겪는 정형화되고 반복적인 법률 질의에 대한 답변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온라인으로 법률 자문을 제공함으로써 업무 효율을 높인 덕분이다.
 
리걸 테크의 장래를 밝게 보는 견해는 신기술 도입의 효과가 그저 법률 서비스가 저렴해지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사법 제도가 더 근본적으로 변할 것으로 전망하는데, 특히 법률의 제정과 집행, 계약의 체결과 이행 과정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대체될 것이라 예상한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법률도 복잡해지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에는 총 282개의 규칙이 있었을 뿐이다. 오늘날의 정부 규제는 금융·회계·독과점·환경·건축·안전·보건·소비자 보호·차별금지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있다. 워낙 규제가 복잡하다 보니, 관련 업무를 오래 담당한 전문가도 어떤 상황에 어떤 규제가 적용되는지 답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아졌다.
 
복잡성을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는 규제 내용을 컴퓨터 프로그램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기업의 업무처리 전산시스템에 법 규제를 코드화해 통합할 수도 있다. 만약 전산시스템상으로 회사 담당자가 법령이 정한 범위 내에서만 업무처리가 가능하게 돼 있다면, 실수로라도 규제를 어기는 경우를 막을 수 있다. 자동차에 안전띠를 매야만 출발할 수 있도록 장치해 놓으면 안전띠를 단속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미래에는 법제처가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고용해, 법을 제정할 때 컴퓨터 프로그램 코드도 함께 배포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더딘 한국의 리걸 테크 혁신
 
법률을 컴퓨터 프로그램화할 수 있다면, 계약도 마찬가지다. 조만간 계약도 프로그램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소프트웨어 형태로 체결되고 자동으로 실행되는 계약을 ‘스마트 계약’이라고 부른다. 최근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스마트 계약의 안전성이 높아지면서 다시금 관심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전자계약 서비스 업체 도큐사인(DocuSign)이 주목받고 있다. 기업이 종이서류에 서명할 필요 없이 안전하게 온라인으로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계약서의 분실, 위·변조 위험도 사실상 없어지고, 계약 관리 업무도 간소화된다. 지난해 3월 상장 당시 도큐사인의 기업 가치는 44억 달러(5조원)로 평가됐다.
 
이처럼 법률 서비스의 혁신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리걸 테크 혁신이 더디다. 벤치마킹할 만한 좋은 사례는 미국 스탠퍼드대 로스쿨이다. 2008년 컴퓨터 공학부와 공동으로 법률 정보학 센터인 코덱스(CodeX)를 설립했다. 법학자와 컴퓨터공학자 간에 협업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실험해 보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법학과 컴퓨터 공학 간 크로스오버가 이뤄질 수 있는 법공학 연구소 혹은 법공학 대학원 설치를 고려해 봄 직하다. 판사·검사·변호사들과 컴퓨터공학자들이 함께 리걸 테크 발전을 위해 협업하는 미래를 상상해 본다.
  
‘인간 변호사의 종말’ 올까
인공지능 변호사 시대가 온다는 전망이 많다. 인공지능이 계약서도 검토하고, 소송 서류 초안도 작성해 주니 인간 변호사가 설 자리가 점점 없어져 갈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영국 대법원 IT 자문위원인 리처드 서스킨드 박사는 2008년 “변호사의 종말이 올 것”으로 예견한 바 있다. 서스킨드 박사는 변호사가 재단사와 같은 길을 걷게 되리라 전망한다. 예전에는 양복을 재단사에게서 직접 맞춰 입었지만 이제 대부분 공장에서 생산된 기성복을 입는 것처럼, 미래에는 대다수 국민이 IT 법률 기업이 제공하는 ‘기성’ 법률 서비스 소프트웨어를 활용하고, 소수만이 인간 변호사의 ‘프리미엄’ 서비스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이 빠르게 발전한다면 변화가 가속화될 수도 있다.
 
현업 변호사들도 이런 전망에 동의할까? 적어도 10~20년 내 가까운 미래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보는 듯하다. 사무 보조 직원의 단순 반복 작업은 효율화·자동화될 수 있을지언정, 변호사 본연의 업무는 전략적 사고, 숙련된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하니 인공지능이 수행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도 있다. 2016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로스쿨 교수가 MIT 교수와 함께 미국 로펌 변호사들의 업무 일지를 분석한 결과, 단기간 내에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있는 업무는 5%도 채 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미래의 기술 변화를 쉬이 단정하면 안 되겠지만, 현재로써는 갈 길이 먼 셈이다.
 
오히려 리걸 테크가 변호사 시장의 파이를 더 키울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된다. 종래 비싼 변호사 비용 때문에 법률 서비스에서 소외됐던 계층에까지 서비스가 확대되면서 시장이 더 커질 수도 있다. 현재 리걸 테크의 주된 고객층이 개인 사업자나 중소기업인 점을 고려하면 일리가 있다. 물론 더 커진 시장의 ‘파이’를 변호사가 아니라 리걸 테크 기업이 가져갈 수도 있다. 리걸 테크 발전의 혜택을 누가 얻게 될 것인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김병필 교수
서울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프로그래머로 일하다 변호사가 됐다. 현재 KAIST 기술경영학부에서 법률 인공지능, 그리고 인공지능과 관련된 법제도와 규제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한국인공지능법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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