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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의 시시각각] 자가 격리 나흘째의 단상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오늘(27일)로 자가 격리 나흘째입니다. 24일 오전에 하윤수 한국교총 회장의 코로나19 확진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로 마스크를 쓰고 가방을 챙겨 퇴근했습니다. 그날로부터 12일 전에 열린 한 회의에서 한 자리 건너에 앉아 하 회장과 두 시간 동안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뉴스는 하 회장이 22일에 확진됐다고 했습니다. 언제 감염됐는지는 기사에 없었습니다. 이미 제가 코로나19의 숙주이자 유포자가 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났습니다. 최근 함께 밥을 먹었거나 가까이에서 대화했던 사람들 얼굴이 시간 역순으로 떠올랐습니다.
 

위정자 오만·무능이 부른 재앙에
격리 대상 돼 보니 화병 생길 판
환자들 부디 이겨내고 심판하길

1339로 전화했습니다. 발열·기침·인후통 증세는 없다고 하니 상담원이 확진자 접촉으로부터 보름 정도 될 때까지는 자가 격리를 하는 게 좋겠다고 했습니다. 증상이 생기면 보건소나 선별 진료소로 가라는, 지금은 가 봐야 검사 안 해줄 것이라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이낙연 전 총리나 황교안 대표는 증상이 없어도 검사받지 않았느냐”는 말이 혀끝에 매달렸지만, 그냥 꾹 삼켰습니다. 정해진 절차에 잘 따르는 게 올바른 시민의 자세라고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보름이 다 돼 가는 이 시점에도 다행히 의심 증상은 없습니다. 하 회장을 만난 때가 조금 더 가까운 때였다면 사정은 달랐을 수 있습니다. 그런 작은 차이가 운명을 가르는, 누구나 언제든 확진자가 될 수 있는 현실이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오판과 실기를 거듭해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화가 커졌습니다. 제가 이런데 감염돼 입원해 있거나 확진 판정을 받고도 병실이 없어 입원도 못한 국민은 오죽하겠습니까.
 
갇힌 신세가 됐으니 미뤄둔 것들을 했습니다. 우한 사태로 중국에서 인기라는 미드 ‘체르노빌’ 시리즈를 봤습니다. 원전이 폭발했는데, 인민의 지도자는 보신에 급급한 정치인·관료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전문가 경고는 과도한 공포를 조장하는 불순한 말이 돼 지도자 귀에 닿지도 못했습니다. 대재앙이 불어닥치는 순간에도 지도자는 “곧 잘 해결된다”는 거짓 또는 희망을 말하며 과학과 의학을 무시했습니다. 그 결과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숨지고 병들었습니다.
 
장면마다 우리 모습이 오버랩돼 내내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았습니다. “머지않아 승기를”(집권당 원내대표), “과도한 공포”(경제 부총리), “공기가 탁한 데가 아니면 마스크 안 해도 돼요”(총리), “머지않아 종식”(대통령)…. 우리 지도자들의 용감무쌍한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2020년의 이 사태를 누군가가 영화로 만든다면 ‘체르노빌’ 못지않게 오만하고 무능한 권력의 위험을 잘 보여줄 것 같습니다.
 
집권당 대표는 마스크를 한 번도 안 써본 듯, 아래쪽 날개는 펴지도 않고 입 위에 대충 걸쳤습니다. 25일 아침에 찍힌 사진에 그렇게 등장했습니다. 승용차 뒷자리에만 타고 다녀 쓸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유일한 ‘믿을 구석’인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다 분노하고 좌절하는 국민 마음을 알 턱이 없습니다. 훗날의 영화에 ‘청와대 짜파구리’ 오찬과 더불어 마스크 대란이 반드시 들어갈 것이라는 예감이 듭니다.
 
최근에 출판된 『최명길 평전』도 읽었습니다. 병자호란 직전에 조선 조정이 청(靑)의 군사력을 얕잡아보자 명(明)의 사신 황손무가 이렇게 꾸짖는 대목이 나옵니다. “귀국의 학사나 대부가 송독하는 것이 무슨 책이며, 경제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뜻도 모르고 그저 웅얼거리고 의관을 갖춘 채 영달만 누리니….” 실력은 없으면서 큰소리치고 헛된 욕심만 부리는 것은 오래된 전통인 모양입니다.
 
‘오만과 무능’은 3년 전 박근혜 정부를 겨냥해 전여옥 전 의원이 쓴 책 제목입니다. 이 두 단어가 이렇게 빨리 다시 역사가 아닌 현실을 묘사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 회장을 비롯한 모든 코로나19 감염증 환자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꼭 살아남아 기억하고, 증언하고, 심판해야 합니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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