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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지위의 상징 옷, 보고픈 것만 보는 ‘AR 패션’ 뜰 수도

미래 Big Questions 〈10〉 옷·외모의 미래는

지오바니 바티스타 모로니(1520-1579) ‘재단사’.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지오바니 바티스타 모로니(1520-1579) ‘재단사’.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아침마다 거울을 바라보며 고민하는 우리. 나는 왜 이렇게 생긴 걸까? 얼굴은 퉁퉁 부었고, 사자 머리에 입가엔 침 흘린 자국까지 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거울 안에서 졸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저 평범한 중년 아저씨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상상 속에서는 언제나 젊고, 아름답고, 특별한 우리. 하지만 현실은 잔인할 정도로 추하고, 늙었고, 평범하다. “뭐, 그게 다 자연의 진리이지 않을까?”라며 포기하고 살던 우리에게 다행히도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 바로 뇌과학적으로 ‘진짜’ 우리는 거울에 보이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게 생겼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뇌가 아는 것과 ‘진짜’는 큰 차이
보이고 들리는 것만 참이라 믿어

연인의 미소, 아이의 눈빛 등도
‘뇌’라는 운영체제 통해 형상화

뇌는 세상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뇌에 발이 달려 바깥세상에서 뛰어다니며 현실을 인식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을 평생 동굴 안에 갇혀 살아와 현실을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무지한 존재로 비교한 바 있다. 비슷하게 인간의 뇌는 평생 두개골이라는 어두 컴컴한 ‘감옥’ 안에 갇혀 사는 ‘죄인’이기에 눈, 코, 귀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기반으로 세상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뇌가 알고 있는 세상과 진짜 세상과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뇌가 아는 세상과 진짜 세상의 차이
 
다른 포유류와 같이 우리 뇌 안에는 몸을 표현하는 ‘호문쿨루스(homunculus, 작은 인간)’가 존재한다. 뇌 특정 영역에 있는 신경세포들이 신체 특정 부분 자극에만 반응하기에, 이런 신경세포들의 반응 영역을 합쳐 구현한 ‘신체 지도’다. 두 개의 눈 그리고 손과 다리. 얼핏 보면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가졌지만, 호문쿨루스에겐 특이한 점이 있다. 지나칠 정도로 큰 손과 얼굴과 입술, 반대로 상대적으로 너무 작은 발과 다리. 그렇다. 뇌 안의 신체 지도는 현실의 몸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생존과 기능에 중요한 부분은 확장됐지만, 나머지 영역들은 축소된 상태로 그려져 있다. 뇌가 아는 우리 자신의 모습인 호문클루스는 진짜 생김새 그 자체가 아닌, 생존의 중요성을 표현한 기능성 지도이다.
 
더구나 호문쿨루스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뇌에 정보를 전달하는 눈, 코, 귀 역시 현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먼저 색깔을 생각해보자. “색깔”이란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에는 전자파 스펙트럼만 존재할 뿐이다. 실질적으로 망막 안에서 빛에 반응을 보이는 세포들이 감지할 수 있는 전자파 영역은 매우 한정적이며(400~700nm, 가시광선), 파장이 낮을수록 우리는 “보라” 또는 “파란”색이라 부르고, 높은 파장의 가시광선은 “빨간” 색으로 인지된다. 인간 눈으로는 감지 불가능한 적외선, 자외선, X-선, 감마선 등은 특정 장비를 통해 숫자나 색깔로 번역해야 한다. 색채만이 아니다. “단단함”, “딱딱함” 같은 촉감 역시 피부에 있는 촉감 센서의 해상도와 감지영역을 통해 인지되고, 특정 주파수를 가진 공기 파동만 달팽이관 안에 있는 신경세포들을 통해 전기신호로 번역된다.
 
흑사병 전문 의사의 유니폼.(쉬나벨 박사, 1656년)

흑사병 전문 의사의 유니폼.(쉬나벨 박사, 1656년)

색깔, 형태, 소리…모두 인간의 뇌를 통해 해석되거나 만들어진다면, 질문해볼 수 있겠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은 세상을 다르게 인식할까? 당연하겠다. 그렇다면 인간이 없는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무도 보지 않는 색깔은 무슨 색을 가졌으며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은 과연 어떤 소리일까? 인간을 통해 인지되지 않은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인간에게 원칙적으로 불가능할 수도 있다. 어차피 모든 상상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전제로 시작될 테니 말이다.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현실을 인간의 인식 과정과 독립된 진짜 세상의 “아프리오리”(a priori)와 인간의 감각과 이성을 통해 해석된 “아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로 구별한 바 있다. 모든 철학과 과학은 어쩌면 진짜 세상이 아닌, ‘인간’이라는 존재를 통해 필터링 된 ‘가상현실’ 만을 연구해 왔는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 역시 해볼 수 있겠다. 만약 인간을 통해 인식되지 않은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 본질에서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인식된 세상과 진짜 세상과의 상호 또는 인과관계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아포스테리오리 세상과 아프리오리 세상의 관계는 무엇일까?  
 
예를 들어보자. 아프리오리 세상에 (1, 2, 3)으로 나열 가능한 현상들이 있다고 가설해보자. 물론 인간의 눈, 코, 귀, 뇌를 통해 현실이 왜곡되기에, 우리에겐 (1, 2, 3)이 아닌 (A, B, C)로 인지된다고 상상해보자. 반대로 개는 동일한 현상을 (ㄱ, ㄴ, ㄷ)으로 감지하고 박쥐의 아포스테리오리 세상에선 (1, 2, 3)이 (α, β, γ)로 느껴질 수 있겠다. 아포스테리오리에서의 (A, B, C), (ㄱ, ㄴ, ㄷ), (α, β, γ) 모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1, 2, 3)이라는 동일한 아프리오리 현상을 표현한다면 아프리오리와 아포스테리오리 세상 사이에서의 인과관계를 분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캘리포니아 주립대 도널드 호프맨 교수는 최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상과 진짜 현실 사이에는 생각보다 훨씬 적은 인과관계만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해 관심을 받고 있다. 만약 아프리오리에서의 (1, 2, 3)이 단순히 (A, B, C)라는 왜곡된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면? 아포스테리오리에서의 (A, B, C)는 (1, 2, 3)이 진화과정에서 인류에게 미쳤던 영향이 통계화된 ‘진화적 성적표’라면? 빨간색이 빨간 이유는 아프리오리에서의 무엇인가가 과거 인류에게 치명적 영향을 미쳤기에 “이것엔 주의해야 한다”라는 진화적 메시지가 우리에게 ‘빨강’이라는 색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호문클루스(Homunclus)’라 불리는 뇌 안의 신체 지도.

‘호문클루스(Homunclus)’라 불리는 뇌 안의 신체 지도.

아름다운 연인의 미소, 귀여운 아이의 눈빛,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지중해 여름 바다. 현대 뇌과학은 이 모든 것들이 사실 존재하지 않으며 ‘뇌’라는 운영체제를 통해 형상화되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마치 컴퓨터 화면에서 마우스로 움직일 수 있는 아이콘과 반도체 안에서 벌어지는 프로세스 간엔 형태적 인과관계가 없듯,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진짜 현실의 진화적 임팩트를 시각적으로 인코딩한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만이 참이라고 강하게 느끼는 것이 인간의 존재적 조건, conditio humana이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우리에게 “나”는 언제나 타인의 눈에 보이는 그 누군가이기에, 마치 나라는 존재의 실체를 온 세상에 알려주고 싶듯, 우리는 타인만이 직접 볼 수 있는 우리의 외모에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한다. 신석기시대 인류는 이미 아름다운 돌들을 사용한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했다.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입기 시작한 옷은 점차 부와 지위의 상징이 되었기에 그런 멋진 옷을 만들 수 있는 재단사는 모로니의 그림에서 같이 자부심으로 가득했는지도 모른다.
  
‘주의’메시지가 빨강이라는 색으로 인식
 
그렇다면 옷과 외모의 미래는 과연 무엇일까? 첨단 소재와 OLED 스크린으로 만든 옷을 입은 미래 인류는 ‘걸어 다니는 광고판’ 같은 모습을 할까? 또는 화장과 패션 대신 기계 임플란트를 심은 사이보그적 외모를 선호할까? 아니면 증강현실이 보편화한 미래에서는 서로가 상대방의 보고 싶은 모습만 골라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외모의 미래는 외모 그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반복된 범지구적 전염병(pandemic) 덕분에 옷은 더는 나를 세상에 표현해주는 도구가 아닌, 반대로 혼란스럽고 위험한 세상과 나를 차단하는,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 될 수도 있겠다. 마치 중세기 흑사병 시대에 의사들이 입었던 ‘쉬나벨 박사의 옷’ 같이 말이다.
 
김대식 KAIST 교수·뇌과학자 daeshik@kaist.ac.kr
독일 막스-플랑크 뇌과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MIT와 일본 이화학연구소에서 각각 박사후 과정과 연구원을 거쳤다. 미국 미네소타대 조교수, 보스턴대 부교수를 지냈다. 2013~2015년 중앙SUNDAY에 ‘김대식의 Big Questions’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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