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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식 궁궐 중로엔, 병자호란 일으킨 홍타이지 흔적이…

[윤태옥의 중국 기행-변방의 인문학] 만주족 선양 고궁

누르하치가 시작해 홍타이지가 완공한 선양 고궁 동로의 대정전. [사진 윤태옥]

누르하치가 시작해 홍타이지가 완공한 선양 고궁 동로의 대정전. [사진 윤태옥]

민가 건축에는 백성들의 일상이 배어 있고, 궁궐 건축엔 황제들의 정치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만주족 역사에서는 선양 고궁(故宮), 베이징 고궁 자금성, 청더의 피서산장과 외팔묘가 그런 대표적 건축물이다. 선양 고궁에서는 누르하치에서 홍타이지로 승계된 만주족 역사의 변신과 도약을 읽을 수 있다. 자금성에선 아편전쟁 이후 청조 쇠락기의 역사가 더 실감 나게 읽힌다. 피서산장엔 변방의 만주족이 또 다른 변방인 몽골과 티베트를 정복해 가는 역사가 짙게 새겨져 있다. 누르하치까지 짚어온 만주족 역사기행은 세 개의 궁궐을 찾아가 누르하치 후손들의 스토리를 소환해보려고 한다.
 

누르하치가 시작한 선양의 동로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가 완공

협치 유훈 저버린 채 권력 휘둘러
조선이 군신관계 거부하자 침략

누르하치는 1625년 랴오양의 동경성에서 선양으로 천도하면서 선양 고궁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당시 요동에선 랴오양이 가장 컸고 선양은 네 번째였으나 누르하치가 수도로 삼으면서 선양이 가장 큰 도시가 됐다.
 
선양 고궁은 누르하치의 동로(東路), 홍타이지의 중로(中路), 건륭제의 서로(西路), 세 묶음으로 나눌 수 있다. 동-중-서 순으로 서쪽으로 확장해 갔다. 동로는 누르하치(재위 1616~1626)가 시작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재위 1626~1643)에게 승계됐다. 홍타이지는 동로 바로 서쪽에 자기 시대를 웅변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궁궐을 증축했다. 훗날 건륭제(재위 1735~1796)는 중로를 일부 증축하면서 서로를 신축했다.
 
동로는 대정전(大政殿)과 십왕전이 핵심이다. 누르하치가 정무를 보는 대정전은 북극성처럼 북에 앉아 남을 보고 있다. 팔각지붕은 몽골의 게르를 연상시킨다. 대정전의 당시 명칭의 하나는 자쿤 호숑고 오르도였다. 여덟 개의 각이 있는 오르도란 뜻이다. 오르도는 칸의 텐트라는 뜻의 투르크어가 몽골을 거쳐 만주로 유입된 말이다.
  
누르하치 동로엔 강렬한 대정전·십왕전
 
홍타이지가 세운 선양고궁 중로의 봉황각. 중로는 집단지도체제를 강조한 누르하치의 동로와는 달리 중원식 황제 단일권력을 표방했다. [사진 윤태옥]

홍타이지가 세운 선양고궁 중로의 봉황각. 중로는 집단지도체제를 강조한 누르하치의 동로와는 달리 중원식 황제 단일권력을 표방했다. [사진 윤태옥]

십왕정은 대왕전 남쪽으로 좌우 다섯 개씩의 왕정(王亭)이 전개된 건축군이다. 좌익왕 우익왕의 두 왕정과 팔기의 여덟 개 왕정이 다섯 개씩 마주 보고 있다. 열 개 왕정의 배치는 팔(八)자 형이고 대정전에서 멀어질수록 간격이 넓어진다. 동로 남문으로 들어서면 좌우 다섯 개씩의 왕정이 소실점인 대정전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기세 넘치는 입체적인 건축미가 넘친다. 누르하치가 지존의 창업자라는 것을 강렬하게 보여 준다.
 
홍타이지의 중로는 누르하치의 동로와는 다르다. 전체 구조나 풍격은 중원의 양식을 가져 왔다. 북쪽은 황제와 황후의 거처인 내정(內庭)이고, 남쪽은 정무를 집행하는 외조(外朝)다. 개별 건축물도 중원의 방식을 채용한 스타일이다. 구들이나 기둥의 장식, 샤머니즘 제사를 위한 신간(神竿) 등이 만주족 특색도 곳곳에 녹아 있다.
 
동로와 서로의 건축을 비교해보면 누르하치 시대가 홍타이지 시대로 탈바꿈해 간 양상과 유사하다. 홍타이지는 대정전과 십왕정이 집체를 이루는 것과 같은 집단지도 체제를 깨뜨리고 내정외조의 황제라는 단일권력으로 전환시켰다. 팔기의 버일러(왕)들이 협의해 통치하라는 게 누르하치의 유언이었으니 홍타이지는 일인 계승자로 특정된 것은 아니었다.
  
중원 지식인 기용하며 통치체제 차용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로 대청제국을 이룩한 홍타이지. [사진 윤태옥]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로 대청제국을 이룩한 홍타이지. [사진 윤태옥]

즉위 초기의 홍타이지는 팔기의 여덟 왕 가운데 셋과 권력을 공유했다. 대정전에는 네 개의 의자가 나란히 놓였고, 홍타이지는 세 명의 버일러와 나란히 앉아서 정무를 집행했다. 그러나 세 왕을 하나씩 제거하거나 무력화시켰다. 그는 문서처리 기구인 서방에 한인 관리를 기용하고, 중원 통치체제의 핵심인 육부와 감찰기관을 도입해 권력을 독점해 나갔다. 아울러 팔기의 왕에 자기 아들과 조카를 기용했다. 요약하자면 중원의 지식인을 직속 관리로 기용하고, 중원의 통치체제를 차용하면서 중원 스타일의 궁궐을 지어 스스로 황제를 칭한 것이다.
 
주션(명과 조선에서는 여진이라 불렀다)이란 족칭을 만주(滿洲)로 개칭한 것은 강력한 내부통합 정책이었다. 누르하치의 통일이란 내부적으로는 복합골절과 같은 깊은 상처가 아니었던가. 상당수의 부족장과 그 추종자들이 죽임을 당했고, 부민들은 새로운 땅으로 강제이주해야 했다. 씨족이나 부족과 같은 혈연 공동체는 해체돼 여덟 개의 구사, 곧 새로운 병영국가의 하부조직인 팔기 체제 안에 흡수되었다. 홍타이지는 상처투성이 여진인은 물론 이미 그의 휘하에 흡수되어 있던 적지 않은 수의 몽골족과 한인들을 한데 묶어 ‘만주족’이라는 새로운 통합의 정체성을 부여한 것이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 시대에 크게 진일보했다. 그는 남(내)몽골을 공략해 북방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북원(北元) 이후 칭기즈칸의 적통은 차하르(察哈爾)로 계승됐다. 릭단 칸은 차하르의 수장인 동시에 전체 몽골의 대칸이었다. 홍타이지는 1635년 차하르를 공략했다. 릭단 칸이 칭하이에서 천연두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에제이는 몽골 대칸의 지위를 상징하는 전국옥새를 홍타이지에게 바치면서 투항했다. 홍타이지는 남몽골에 대한 우위를 실현한 것이다. 홍타이지는 다섯 후비를 모두 몽골에서 맞아들였다. 셋은 코르친(科爾沁) 출신이고 둘은 차하르 출신의 릭단 칸 부인들이었다. 이들을 중로의 내정에 기거하게 했으니 청녕궁·관저궁·인지궁·연경궁·영복궁이 그것이다.
 
한인 정책도 크게 전환됐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가 동경성에서 한인을 학살한 것을 비판하면서 한인 노예들을 평민으로 올려 주었다. 한인 지식인들을 관리에 기용했다. 명나라와 긴밀한 조선에 대해서도 군사적 우위를 확보했다. 1626년의 정묘호란이 바로 그것이다.
 
누르하치는 여진의 한(汗)이었으나, 홍타이지는 만주의 한과 몽골의 대칸 그리고 한인의 황제를 겸하는 북방의 강력한 패자가 되었다.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를 칭한 것이다. 그러나 칭제는 국제정치적으로는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홍타이지가 황제에 오르는 명분의 하나로 ‘조선도 정복했음’을 들었고, 황제 즉위식에 참가한 조선 사신들에게 홍타이지에 대한 삼궤구고두의 예를 강요했다. 기존의 형제관계라는 명분을 묵살하고 군신관계를 강요한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오랑캐의 칭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짓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사신은 이를 거부했다. 이것이 병자호란(1636년 12월)의 직접 도화선이 됐다.
 
조선 정벌을 결심한 홍타이지는 약 8개월에 걸쳐 면밀히 준비하며 강물이 얼어붙는 겨울을 기다렸다. 대청에 복속한 몽골 각부에 동원령을 내린 것은 수개월 전이었다. 조선출병 전에 명나라에 원정군을 보내 약탈전을 벌였다. 조선에 출병했을 때 명나라가 틈을 노리지 못하게 미리 칼로써 단속한 것이다. 홍타이지는 최대의 병력을 동원했고 1636년 12월 조선정벌이 시작됐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국호 대청으로 바꾸고 황제에 올라
 
홍타이지가 썼던 칼. [사진 윤태옥]

홍타이지가 썼던 칼. [사진 윤태옥]

선봉대는 압록강을 건넌 지 6일 만에 한양에 들이닥쳤다. 강화도로 파천하려는 인조의 도피로를 가로막고는 남한산성에 몰아넣었다. 인조를 구하려던 각지의 근왕병들을 차례로 격파했다. 남한산성을 포위하고는 인조에게 항복을 요구했으나 그는 버텼다. 세자가 피신해 있던 최후의 보루 강화도가 점령당하자 인조는 항복하고 말았다.
 
치욕적인 항복의례가 삼전도에서 거행됐다. 조선의 사신들이 거부함으로써 불완전하게 이루어진 황제 즉위식을 삼전도에서 다시 거행한 셈이다. 인조는 용포가 아닌 쪽색 옷을 입고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을 겸한 항복의례를 감수해야 했다. 홍타이지와 함께 하늘을 향해 삼궤구고두를 함으로써 이 일이 하늘의 뜻임을 인정했다.  
 
다시 홍타이지를 향해 삼궤구고두를 함으로써 군신 관계임을 천하에 고한 것이다. 홍타이지의 요구에 따라 제 손으로 대청황제 공덕비를 쓰고 새기고 세웠으니 우리 문물 목록에는 삼전도비라고 되어 있는 게 바로 그것이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에게서 물려받은 여진족 금나라의 한(汗)을, 만주·몽골·한인 그리고 조선까지 지배하는 북방의 패자이자 천하의 황제로 업그레이드했고 1643년 세상을 떠났다. 선양 고궁에서 홍타이지를 다시 읽어보자. 국사는 최소한 동아시아 역사에서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이라 생각한다. 홍타이지는 병자호란만으로 운위할 인물은 아니지 않은가.
 
※ 답사동행·도움말 이훈 만주사 연구자
 
윤태옥 중국 여행객
중국에 머물거나 여행한 지 13년째다. 그동안 일년의 반은 중국 어딘가를 여행했다.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경계를 걷는 삶’을 이어오고 있다. 엠넷 편성국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사업총괄 등을 지냈다. 『중국 민가기행』 『중국식객』 『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독립운동사』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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