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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 퇴계가 어느날 논을 갈아엎고 밭으로 만든 까닭

기자
송의호 사진 송의호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67)

세시(歲時) 풍속이 지난해 다르고 올해 다르다. 10년 전쯤과 비교하면 변화에 가속도가 붙는 느낌마저 든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설 연휴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선물 꾸러미를 든 어른이 색동옷 입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집안을 방문하는 걸 쉽게 볼 수 있었다. 올해는 그런 풍경을 마주하기 어려웠다.
 
아파트에서는 이제 두루마기 등 한복 차림을 한 어른이 잘 보이지 않았다. 경북 안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80대 어르신이 설날을 회고한 게 따스하게 와 닿는다. 그 시절엔 정월 대보름까지 설 분위기가 이어졌다. 지금과 비교하면 그때가 먹고 입는 것은 부족해도 마음은 도리어 넉넉했던 것 같다. 변화의 속도도 느렸던 것일까.
 
퇴계종택을 지키는 16대 종손 이근필 옹이 손님을 맞아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송의호]

퇴계종택을 지키는 16대 종손 이근필 옹이 손님을 맞아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송의호]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났다. 어머니가 마련한 소박한 설빔으로 갈아입고 집안 사당과 어른을 찾아 세배를 했다. 집에서 먼저 차례(茶禮)를 올린 뒤 다시 큰집에 모여 차례를 지낸다. 이어 지손(支孫)들은 종가로 옮겨 세배와 차례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면 점심때가 됐다. 종가에서 모두 떡국으로 점심을 먹는다. 그러고도 설날 차례는 하나가 더 남았다. 마지막은 제일 큰 상계(上溪) 종가(퇴계 이황의 사당이 있는 종택) 방문이다. 후손들이 모여 세배를 하고 차례를 마치고 나면 저녁 무렵이었다. 음복(飮福)을 마치고 우리 동네 하계(下溪)로 내려오면 저녁 쇠죽(소의 먹이)을 쑤는 연기가 여기저기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상계 종가 차례를 마치면 어른들은 그 자리에서 일가들이 살아가야 할 길과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고 한다. 하계 마을은 옆으로 낙동강 상류가 지나간다. 퇴계 선생은 하계 마을에 터전을 잡았다가 낙동강에서 나는 은어가 진상품임을 알고 자손들이 혹여 범법을 저지를까 봐 상계로 옮기기 전 거처한 곳이었다. 회고가 이어진다.
 
하계마을 입구에 서 있는 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비. 독립유공자 25명을 배출한 하계마을이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내력을 새겼다. [사진 송의호]

하계마을 입구에 서 있는 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비. 독립유공자 25명을 배출한 하계마을이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내력을 새겼다. [사진 송의호]

하계마을 뒷산 능선에는 '쌍봉‧윷판대'라는 시인 이육사의 '광야' 시상지가 있다. [사진 송의호]

하계마을 뒷산 능선에는 '쌍봉‧윷판대'라는 시인 이육사의 '광야' 시상지가 있다. [사진 송의호]

 
“퇴계께서는 상계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지었는데 논을 만드셨다. 마을 옆으로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토계천이 흐른다. 그러자 아랫마을인 하계마을 다른 성씨 주민들은 물은 적고 물 댈 지역은 넓어져, 먼 곳은 가물어도 벼에 물을 적셔줄 수 없게 됐다. 결국 그들은 해를 거듭하며 벼를 수확하지 못했다. 선생이 사정을 알고 번민 끝에 말씀하신다. ‘이것은 우리 논이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마른 밭이라도 먹고 살 수 있지만, 저들은 논을 적셔 주지 않으면 거둘 수가 없다.’ 그리고는 곧바로 논을 밭으로 바꾸었다. 언젠가 설날 차례를 지낸 뒤 어른들이 들려준 이야기다. 『퇴계집』 ‘언행록(言行錄)’에 나오는 일화이기도 하다.”
 
하계마을은 입구 산에 퇴계 묘소가 있다. 또 하계는 도산면사무소와 경찰지서, 도산초등학교 등이 있던 도산면 소재지였다. 지금은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로 폐허가 되고 도산초등학교의 쓰러져가는 건물과 집 몇 채가 겨우 남아 있다. 색동옷과 두루마기를 입은 설날 풍경도 이제는 이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예의를 숭상해 온 하계마을의 세시 풍속은 이렇게 저녁연기처럼 사라졌다.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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