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중앙시평] 국민 반쪽의 대통령

고현곤 논설실장

고현곤 논설실장

“한국 사회가 20대80이라는 두 개의 대한민국으로 나뉘었습니다. …소수의 승자만 존재하는 카지노 경제는 비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승자독식 체제에서 강자의 탐욕이 끝이 없습니다. 사자보다 100배, 1000배 더 잔인합니다.”
 

06년 지방선거 20대80 편가르기
국민 등돌려 대선·총선 내리 3연패
문 대통령, 진보 진영의 보스 행보
4월 총선서 참패한 전략 또 쓰나

피 뚝뚝 떨어지는 이 선동적인 글을 어디서 본듯하지 않은가. 대학가 대자보? 북한 불온전단? 2006년 2월 노무현 정부가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민정수석이었다. 김경수·윤건영·양정철·김수현·정태호 등 현 정부 실세들이 청와대에 있던 시절이다.
 
당시 집권 3년간 실정으로 부동산값이 치솟았다. 빈부 격차도 커졌다. 민심이 흉흉했다. 5월 지방선거를 3개월 앞둔 미묘한 시기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지금과 비슷했다. 노무현 정부는 양극화의 폐해를 설명하면서 국민을 20대80으로 나누고, 슬며시 ‘80% 없는 자’의 선봉에 섰다. ‘20% 있는 자’에게 부동산 폭등과 양극화의 책임을 돌리고, 증오를 불태웠다. 지지층 결집을 위해 ‘20%=보수, 80%=진보’ 프레임을 짠 것이다.
 
하지만 국민은 바보가 아니었다. 편 가르고 혼란을 부추기면서, 그 와중에 책임은 교묘히 회피하는 정부의 상투적 수법에 다들 진절머리를 냈다. 노무현 정부의 상당수가 ‘사자보다 잔인하다는 20%’에 속한다는 사실을 국민은 알아차렸다. 그 위선에 혀를 내둘렀다. 20대80의 싸움이 아니라, 같은 20% 안에 있는 진보 기득권층과 보수 기득권층 간의 ‘이권 다툼’이라는 사실도 눈치챘다.
 
5월 지방선거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참패로 끝났다. 2007년 대통령선거, 2008년 총선까지 내리 세 번 큰 선거에서 졌다. 열린우리당은 간판을 내렸다. 최고경영자(CEO) 출신 이명박 후보에게 정권을 내줬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기 ‘잘할 것’이라는 여론조사가 92%에 달했다가 추락했다.
 
그러던 진보 진영에 때가 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오만과 불통으로 거저 줍다시피 정권을 되찾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잇따른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용서와 화해를 통한 대통합’을 이루면 가능한 일이었다. 마음먹기에 따라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었다.
 
마침 진보와 보수가 촛불 아래 뭉쳐 있었다. 2017년 5월 문 대통령 취임 당시 지지율이 80%대 중반까지 치솟았다. 거의 모든 국민의 축복 속에 출범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말 뿐이었다. 이내 분열의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도덕적 우월감이 독(毒)이 됐다. 모든 사안을 내편과 네편,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이분법으로 재단했다. 적폐청산의 구호 아래 3년 내내 반대 진영을 잔인할 정도의 무관용으로 몰아붙였다. 한풀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2006년 ‘강자의 탐욕’ 운운하며 국민을 20대80으로 쪼갰던 핵심 멤버가 현 정부 곳곳에 포진해 있다. 분열과 증오를 부추겨 투쟁 강도를 높이고, 자기 세력을 극대화하는 데 익숙한 이들이다. 어제의 동료라도 노선이 다르면 가혹하게 주홍글씨 낙인을 찍으면서 살아남은 그들이다. 그러면서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고 장엄하게 노래하던 그들이다.
 
엄혹하고 의지할 데 없던 1980년대 운동권 시절, 편 가르기를 통해 내부 결속을 다질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라는 시대정신을 쟁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어떤 방법도 용인되던 시절이다. 그 뒤 민주화가 이뤄지고, 세상이 바뀌었다. 편 가르기는 시대착오적 운동권 DNA가 됐다. 이걸 20년 뒤 노무현 정부에서 다시 꺼내쓰고, 10여년 뒤 문재인 정부에서 또 집어 든 것이다.
 
지난해 조국 사태 때는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갈라졌다. 내전 같았다. 정부는 수습보다는 자기세력을 과시하고, 흐트러진 전열을 정비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문 대통령은 “국론 분열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년 회견에선 “조국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했다. 지도자로서 둘로 갈라진 나라에 대한 참담함, 책임감은 엿볼 수 없었다. 문 대통령 스스로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아니라 ‘진보 진영의 보스’임을 만천하에 고백한 셈이다.
 
현 정부는 집권 이후 손에 피를 너무 많이 묻혔다. 보수를 궤멸시키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그럴수록 보수 진영의 분노도 커졌다. 2016년 말 촛불 집회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감정의 골을 메우기엔 늦은 감이 있다.
 
정부도 이런 살벌한 상황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이 살아남는 길은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 4월 총선과 2년 뒤 대선에서 승리해 정권을 지키는 것이다. 세 결집을 위해 국민을 극렬하게 편 가르고, 서로 증오하도록 만들면서 이념의 정글, 정치의 과잉 상태로 몰아갈 게 틀림없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검찰 수사가 이어질수록, 지지율이 떨어질수록, 더 그럴 것이다. 현 정부 실세들이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썼던 방법 그대로다. 그런데 그건 국민이 등을 돌려 참패로 끝난 방법이기도 하다.
 
고현곤 논설실장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