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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이 준 선물…폭탄 세일에서 건진 양가죽 코트

기자
홍미옥 사진 홍미옥

[더,오래]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45)

지하철 출구에 한 무리의 어르신들이 모여 있다. 오랜만의 동창 모임인 듯 저마다 반가움에 어쩔 줄 모른다. “아이고 어쩜, 하나도 안 변했다, 고등학교 때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네”, “얘, 너는 더 젊어진 거 아니냐?” 훈훈한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중이다.
 
그때였다. “다들 왜 이래? 우리가 모두 노안(老眼)이 와서 주름도 안보이고 기억 속의 모습만 보이는 거 알잖아? 호호호” 매정하게(?) 정답을 내리는 어르신의 말에 다시 한번 웃음이 쏟아진다. 우스갯말로 이런 걸 두고 요샌 ‘팩트폭력’이라고 한다던가? 노안? 맞다. 나도 얼마 전에 노안 때문에 겪었던 해프닝이 있었다.
 

이제는 쇼핑도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의류 할인매장에서 사소한 해프닝이 있던 날. 아이패드7 프로크리에이트. [그림 홍미옥]

 
지난해 겨울, 추위가 제법 매서운 날이었다. 친정엄마를 모시고 안과에 갔다. 자꾸만 침침해지는 눈 탓에 불편함을 토로하신다. 병원에선 피할 수 없는 노화로 인한 안구질환이라며 몇 가지 처방을 내려줬다. 딱히 특효약도 없다는 말과 함께. 나도 아직은 돋보기를 쓰지 않지만 침침하긴 마찬가지다. 게다가 휴대폰,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눈 건강엔 최악이니 더 나빠질 일만 남은 셈이다.

 
돌아오는 길, 지하철역 근처 백화점을 지나는 참이었다. 커다란 글씨로 깜짝 기절 세일 90%라는 광고문구가 보였다. ‘기절이라니, 얼마나 싸게 팔길래?’ 얼핏 봐도 두툼하고 세련된 겨울 아우터를 대폭 할인판매 중이란다. 딱히 겨울옷이 필요치 않았는데도 ‘깜짝 기절 세일’이라는 문구에 저절로 발걸음이 매장으로 향했다.
 
몇 년 전부터 유행인 전 국민의 겨울옷인 ‘롱패딩’부터 요즘 들어 부쩍 눈에 띄는 일명 ‘개장수 양털 점퍼’가 착한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그중에 첫눈에 들어온 복슬한 코트가 맘에 들어 슬쩍 가격표를 보았다. 9만9000원! 음, 나쁘지 않다. 더구나 꼭 진짜 양가죽 같고 장식된 모피도 따뜻해 보였다. 더구나 입어보니 웬걸? 맞춤처럼 딱 맞는다. 행여 누가 낚아챌세라 얼른 카운터로 향했다. “이걸로 할게요.” 망설임 없이 기분 좋게 쇼핑을 마쳤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도 괜히 기분이 좋았다. 쇼핑 가방 속의 옷을 만지작거리며 또 한마디. ‘요즘 기술은 정말 끝내주는군. 진짜 양가죽하고 똑같지 뭐야.’
 
그런데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암만 봐도 양가죽이다. 혹시나 하는 맘에 라벨을 살펴보았다. 겉감 양가죽 100%라고 쓰여 있다. 뭔가 이상하다. 가격표를 확인했다. 세상에! 아까는 분명 9만9000원이었는데 앞에 숫자 하나가 더 있었다. 59만9000원. 몇 번을 봐도 그 가격이다. 영수증을 봐도 똑같은 숫자가 쓰여 있다. ‘아! 이젠 가격표도 잘 안 보이는 나이가 되었구나.’ 순간 멍해졌다. 깜짝 기절 세일이라더니 정말 기절하게 생겼다.


동안·몸짱 열풍에 젊어진 듯 착각하기도

수시로 찾아오는 건망증을 슬기롭게 극복하는게 중년의 숙제다. 갤럭시탭 s3 아트레이지. [그림 홍미옥]

 
앞자리 숫자 때문에 살림이 망하거나 곤경에 처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실수를? 그것도 글자가 잘 안 보여서? 온갖 생각으로 착잡해졌다. 내가 십 년만 젊었어도 그게 뭐 대수냐고 했을 게다. 잘 못 볼 수도 있고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더구나 반품·환불이라는 편리한 방법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누가 봐도 중년, 갱년기의 한복판에 서 있는 나로선 서글픈 일이었다.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노안’은 너무도 센 강적이었다. 내가 벌써 이런 실수를 한다니, 온종일 이런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언젠가부터 광풍처럼 번진 동안, 몸짱 열풍은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너도나도 동안이 미덕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예전보다 겉모습은 젊어졌지만, 신체의 나이를 속일 순 없는 모양이다. 특히 ‘노안’과 ‘건망증’이 대표적이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의 눈은 매정하게도 정직하다. 아무리 젊게 꾸며도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건 만고불변이다. 더불어 찾아온 건망증은 또 얼마나 곤혹스러운지…….
 

'메노포즈' 오늘이 제일 젊고 예쁜 날!

갱년기 주부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다룬 뮤지컬 '메노포즈'. [사진 메노포즈 포스터]

갱년기 주부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다룬 뮤지컬 '메노포즈'. [사진 메노포즈 포스터]

 
몇 년 전 보았던 뮤지컬 ‘메노포즈’, 폐경기라는 뜻으로 갱년기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려 인기를 끌었던 뮤지컬이다. 건망증과 외로움에 시달리던 갱년기 여성들이 함께 소통하면서 ‘늙음’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웃으며 받아들이는 유쾌한 내용이다. 중년의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보는 에피소드를 그려내 절대적 공감을 받았다. 같은 현상을 두고 어떤 시선으로 보는가에 따라 인생도 바뀔 수가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준 작품이었다.
 
다소 식상한 말 같지만, 지금이, 오늘이 현재의 내 인생에서 제일 젊고 예쁜 날 아닌가. 두렵고 얄미운 건망증도 노안도 까짓거 친구처럼 함께 하면 어떨까? 잘 어르고 다스리면서. 노안이라는 친구 덕에 내 것이 된 ‘깜짝 기절’할 뻔한 겨울 코트도 열심히 입어야겠다. 그리고 애써 미루었던 돋보기도 맞추러 가야겠다.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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