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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드세요, 영유아·장애인도 환영…문턱 낮추는 공연장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영국의 뮤지컬 공연장에선 로비에서 산 식음료를 허겁지겁 먹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스마트폰 앱으로 주문해 좌석으로 배달된 스낵을 먹고, 와인과 맥주를 마시며 느긋하게 공연을 즐긴다. 클래식 공연장도 해외에선 축제 분위기다. 공연 전후 로비에서 주류와 스낵을 즐기며 화기애애하게 네트워킹을 한다.

예술의전당 어린이 체험공간 오픈
세종문화회관 ‘스마트폰 프리’도

정동극장 순수예술 고집 관행 없애
국립극장 휠체어 탑승 버스 운행
“다양성 포용 위해 엄숙주의 허물어”

 
한국 공연장은 딴판이다. 장르를 막론하고 ‘객석에 생수 반입만 허용된다’는 규칙을 내걸었다. 뮤지컬 전용극장인 샤롯데씨어터만 유일하게 뚜껑 있는 음료 반입을 허용한다. 비싼 관람료에 걸맞는 엄숙주의를 추구하다보니 객석 분위기도 딱딱하다. 공연을 즐기러 갔다가 예술의 권위에 눌리곤 한다.

 
그런데 최근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공연장들이 앞다퉈 문턱 낮추기 시동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세종문화회관을 필두로 순수예술 분야 최고 아티스트만 무대에 세우던 공공극장부터 권위와 파격 사이를 오가며 대중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모양새다.

 
36개월 미만도 저변 확대 타깃

 
세종문화회관은 지난 연말 최초로 객석 맥주 반입을 허용했다. [사진 각 세종문화회관]

세종문화회관은 지난 연말 최초로 객석 맥주 반입을 허용했다. [사진 각 세종문화회관]

지난해 12월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 수제 맥주가 등장했다. 연말 기획공연 ‘인디학 개론’에서 객석에 맥주 반입을 허용한 것이다. 1978년 개관 이래 처음이자, 국내 공공극장 최초의 시도였다. 올해는 한발 더 나간다. 7월 무용기획공연 ‘컨템포러리S’에서 맥주를, 8월과 11월 ‘해리 포터 필름 콘서트’ 시리즈에서는 팝콘과 콜라 반입을 시도한다. 11월 온라인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 음악을 오케스트라 라이브로 편곡한 ‘게임콘서트 LoL Concert’에는 ‘스마트폰 프리’까지 내걸었다.

 
공연장 기피 대상이던 영유아도 적극 끌어안는다. 36개월 미만을 위한 공연 ‘다섯, 하나’(4월)는 안무가와 배우가 몸짓과 대사로 형태와 색깔, 소리를 감각적으로 표현해가다가 축제의 장으로 발전시키는 구성이다. 오정화 세종문화회관 공연기획팀장은 “‘82년생 김지영’처럼 육아에 지친 2030 엄마들에게 공연장 나들이를 선사해 관객층을 유모차 부대까지 확대하고자 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예술의전당 ‘1101 어린이라운지’는 에르베 튈레가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사진 예술의전당]

예술의전당 ‘1101 어린이라운지’는 에르베 튈레가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사진 예술의전당]

예술의전당이 1월 ‘1101 어린이라운지’를 오픈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7세까지의 어린이가 놀이를 통해 예술을 느끼도록 한 체험 공간인데, ‘한 살부터 즐긴 예술이 101살까지 이어진다’라는 의미다. 36개월 미만도 입장이 가능하고 예술체험에 포커싱돼 있다는 점이 기존 돌봄시설과의 차별점이다.

 
민간업체에 운영을 위탁해 2시간에 2만원(관람객 50% 할인, 워크샵 참여료 별도)이라는 이용료가 다소 부담스럽다는 반응도 있지만, 오픈하자마자 입소문을 타고 북적이고 있다. 카림 라시드가 디자인한 쇼파부터 앤서니 브라운의 ‘행복한 미술관’으로 꾸며진 비스트로 카페까지, 예술로 뒤덮인 공간에서 아이들이 뒹굴다 책도 읽고, 집단 미술작품을 만들어 전시도 한다. 6개월 동안은 프랑스 창의 예술가 에르베 튈레가 개발한 워크숍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6개월마다 작가를 새로 초청할 계획이다. 예술의전당 유인택 사장은 “가장 왕성하게 문화예술을 향유하다가 결혼·출산과 동시에 문화향유 단절에 내몰리는 2030 여성들을 공연장으로 이끌고 유아들에게도 어릴적부터 예술을 즐기게 하고 싶다”고 전했다.

 
국립국악원의 ‘토요국악동화’. [사진 국립국악원]

국립국악원의 ‘토요국악동화’. [사진 국립국악원]

영유아 공연은 국립국악원이 한발 앞섰다. 2016년부터 미래 관객 개발을 목표로 ‘12개월 이상 영유아’에게 문을 연 ‘토요국악동화’다. 동화에 국악을 접목시킨 다양한 레퍼토리로 매번 전석매진을 기록해, 지난해 기준 27회 공연을 올해 40회로 크게 늘렸다.

 
서울시향 '우리 아이 첫 콘서트'는 뉴욕필 출신 전문가 등이 기획한 충실한 프로그램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 서울시향]

서울시향 '우리 아이 첫 콘서트'는 뉴욕필 출신 전문가 등이 기획한 충실한 프로그램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 서울시향]

공연장만 문턱을 낮춘 건 아니다. 국내 최고 교향악단으로 자부심 높은 서울시향도 지난해 ‘우리아이 첫 콘서트’를 시작했다. 36개월 이상 아이와 가족이 함께 하는 체험활동과 연주회의 결합 형태다. 5월 서울시향 대연습실에서 진행한 첫 공연이 티켓 오픈 30분 만에 전석매진된 데 힘입어 11월 두 번째 공연은 정식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두 차례 진행됐다.  
 
순수예술에 대한 집착도 사라지고 있다. 지난 20년간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전통 상설공연장의 정체성을 유지해왔던 정동극장은 최근 대변신을 선언했다. 극장의 메인 콘텐트였던 전통상설 공연을 과감히 폐지하고 국악 뮤지컬, 대중음악 콘서트, 유명 배우를 앞세운 연극시리즈까지 아우르는 시즌 레퍼토리를 내놨다. 김희철 대표는 “공공극장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고 국민과 보다 가깝게 소통하기 위해 전통예술극장을 넘어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뮤지컬 배우 양준모와 함께 오페라를 쉽게 전달하는 ‘브런치콘서트’, 어린이 축제 등을 도입해 ‘도심 속 문화 휴식처’를 자처한다. 예술의전당이 올 상반기 음악당에 오픈하는 인춘홀은 장애인 등 문화소외층 연주자와 관객에게 예술의전당 무대를 제공할 취지로 지어져 다양한 콘셉트의 ‘열린 음악회’를 수용할 예정이다.  
 
해외에서도 공연 관객 노령화 추세를 벗어나고자 파격을 시도하고 있다. 런던 심포니는 2017년 바비컨센터 객석에서 술도 마시고 스마트폰으로 연주자 클로즈업과 전자 프로그램북을 볼 수 있는 ‘하프 식스 픽스’ 공연을 시작해 대히트했다. 젊은 직장인들이 퇴근길 러시아워를 피해 공연을 보고 느긋하게 저녁을 누리라는 뜻에서 6시 30분부터 딱 90분간 공연한다. 한정호 에투알 클래식&컨설팅 대표는 “‘하프 식스 픽스’에선 공연 중 스마트폰을 켜서 소셜미디어 활동을 하기도 한다”며 “젊은 세대가 일단 공연장으로 오게 하는 개방 정책으로, 해외에서는 관객층 확대와 관객 간 네트워킹을 위해 주류 등의 식음료를 도구로 활용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안호상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은 “많은 해외 공공극장이 공연이 없을 땐 파티장이 되는 등 커뮤니티 센터 역할을 하는데 비해 한국에선 초창기 하이엔드 순수예술을 배워온 유학파들이 공연계를 좌우하면서 공연장 문턱이 지나치게 높았다”면서 “최근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회적 변화와 지나친 억압에 대한 반발로 엄숙주의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고 해석했다.

 
관객층을 장애인까지 확대하려는 시도도 보인다. 국립극장은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미니버스를 지하철역까지 운행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도 지난해 대대적으로 장애 관람객을 위한 시설 개선을 했다. 휠체어 접근이 용이한 경사로와 객석 리프트 설치로 보행성과 시야 장애도 개선했다. 안내 데스크도 휠체어 높이로 낮추고, 휠체어 이동이 불편한 회전문은 자동문으로 교체했다.

 
해외 공연장들은 장애인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훈련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영국의 자선단체 ‘애티튜드 이즈 에브리씽’이 만든 ‘장애평등 및 고객서비스 훈련’에는 연간 500여명의 공연계 종사자가 참여한다. 이 단체가 장애인 공연관람 현황을 조사한 ‘2018 접근 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에서 매년 330만 명의 장애인이 공연을 보러 가고, 응답자들은 2017년 평균 9회 음악 공연을 보러 가서 공연당 관람료로 48파운드(약 7만 3600원), 식음료에 30파운드(약 4만6000원)를 사용했다. 장애 관람객의 구매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얘기다.

 
해외 공공극장은 커뮤니티 센터 역할도

 
경기도 문화의전당이 제작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연극 ‘알퐁스 도데의 별’. [사진 경기도문화의전당]

경기도 문화의전당이 제작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연극 ‘알퐁스 도데의 별’. [사진 경기도문화의전당]

장애 관객을 위한 공연 콘텐트도 곳곳에서 싹트고 있다. 경기도문화의전당은 지난해 11월 시각장애인을 위한 연극 ‘알퐁스 도데의 별’을 선보였다. 국내 최초의 ‘라이브 사운드 드라마’로, 음향감독이 총연출을 맡아 60여개 스피커로 이머시브 사운드 시스템을 구현했다. 음향효과를 내는 ‘폴리 아티스트’들을 무대 위에 올려 별도의 해설 없이 현장감 넘치는 음향으로 무대의 감동을 전달했다. 올해는 전국투어에 돌입한다. 김열수 문화사업본부장은 “문화나눔도 맞춤형으로 해야 한다”며 “소수자 입장에 맞춘 콘텐트 제공의 시발점 역할을 하겠다. 치매노인을 위한 공연도 구상중”이라고 밝혔다.

 
세종문화회관도 11월 국내 최초로 배리어프리 뮤지컬을 소개한다. 영국 BOP극단과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이 공동제작한 ‘나의 왼오른발’은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연출 겸 작가 로버트 소플리 게일의 이야기를 담은 유쾌한 공연으로, 자막·수화·음성 해설을 제공한다.

 
안호상 원장은 이런 움직임에 대해 “일반 관객이 장애 관객을 배려하고 불편을 감수하는 쪽으로 인식이 바뀐 덕분에 가능한 것”이라며 “공연의 치유효과가 증명되고 있기에 고무적인 흐름이다. 동일한 콘텐트를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환경적 요소가 갖춰진다면 보이지 않는 장벽들도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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