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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동지를 아는구나" 지령 받고 급조한 팥죽의 위력

기자
푸르미 사진 푸르미

[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12)

2019년 12월 22일 오후, 전화벨이 울렸다. 강릉 사는 ‘언니 2호’다. “여보세요?” 하자마자 지령을 내리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아직 저녁 준비 안 했으면 얼른 팥죽 사와야 할 것 같아.”
이어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죽 전문점 지도와 전화번호가 전송된다. 바로 전화해 포장 주문한 뒤, 시간 맞춰 찾아와 저녁 식탁에 올린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팥죽을 마주한 아버지, 점잖게 한 말씀 하신다.
 
“네가 ‘동지’를 아는구나.”
“에이, 아무리 ‘동지’를 모를까 봐.”
언니 귀띔에 가까스로 시간 맞춰 팥죽을 공수해 놓고 미리 준비해 놓은 듯 여유 있는 웃음으로 대답한다.

 
언니의 귀띔에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아버지께 팥죽을 공수했다. [중앙포토]

언니의 귀띔에 가까스로 시간에 맞춰 아버지께 팥죽을 공수했다. [중앙포토]

 
아버지가 1년 중 무게를 두고 챙기는 날이 있는데 본인 생일, 절기 중에서는 정월 대보름과 동지다. 그리고 그 날 먹는 음식, 즉 생일에는 미역국, 대보름엔 오곡밥, 그리고 동지팥죽 드시는 것을 매우, 매우 중하게 여기시고, 제때 못 드시는 일이 발생할 경우 두고두고 서러워하며 말씀하신다.
 
1년 중 단 세 번, 더욱이 크게 어려운 음식도 아닌데 때맞춰 챙기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냐 하겠지만, 문제는 세 날 모두 ‘음력’ 날짜라는 것이다. 휴대폰에, 달력에 표시해 두어도 깜박! 놓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음력 날짜. 언니들과 크로스 체크하며 챙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버지 생신은 음력 정월 초엿새이기 때문에, 그나마 설 연휴를 계기로 달력을 짚어가며 챙기는데, 빠뜨리기 쉬운 것이 바로 ‘동지’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전혀 기억할 필요가 없던 것을 챙기게 된 것도 이 ‘동지’에 얽힌 사건 때문이다.
 
대학 들어가면서부터 집에서 저녁 먹는 일이 거의 없었던 탓에 나는 잊고 있었는데, 부모님은 정월대보름이나 동지 때 외가에서 저녁을 함께하셨다. 그래서 오곡밥도 부럼도 동지팥죽도 자연스럽게 챙겨 드실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 돌아가신 뒤론, 아버지 혼자 외갓집 가는 것이 어색해지신 거다.
 
함께 사는 내가 알아서 챙겨야 하는데, 일하느라 정신없던 나는 달이 둥근지 실눈 같은지 알 턱이 없었다. 아내 잃은 상실감에, 늘 챙겨 먹던 팥죽도 못 얻어먹는 서러움이 더해진 아버지는 그날 밤 영문도 모르는 언니들에게 전화를 걸어 “너는 오늘 팥죽 먹었냐?”물어보기 시작하셨다고. 그 이후로도 오곡밥과 팥죽을 두고 비슷한 몇 번의 사건이 있었고, 이후 나에게 동지와 대보름은 생신 버금가는 중요한 기념일이 되었다.
 
아버지가 1년 중 무게를 두고 챙기는 날이 있는데 본인 생일, 절기 중에서는 정월 대보름과 동지다. 생일에는 미역국, 대보름엔 오곡밥, 그리고 동지팥죽 드시는 것을 매우 중하게 여기신다. [사진 pixabay]

아버지가 1년 중 무게를 두고 챙기는 날이 있는데 본인 생일, 절기 중에서는 정월 대보름과 동지다. 생일에는 미역국, 대보름엔 오곡밥, 그리고 동지팥죽 드시는 것을 매우 중하게 여기신다. [사진 pixabay]

 
언니 2호 도움으로 가까스로 2019년 동지를 챙긴 뒤 새해 달력을 꺼내 정월 초엿새를 짚어봤다. “2020년 1월 30일, 아버지 생신” 혹시 몰라 언니들에게 문자 공지를 보냈다.
 
“OK! 형부에게도 인지시켜 놓을게.”
“아버지 연세가 많으시니 이제 생신도 잘 챙겨야 할 것 같아.”
“우리는 생신 때 못 가는 대신 설에 미리 케이크 만들어 갈게.”
 
각자 스타일대로, 형편대로 답신이 속속 도착한다. 팔순 잔치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올해 여든셋. 겉보기엔 키도 크고 허리도 전혀 안 굽으셔서 청년 같으신데, 혈압에 당뇨에 드시는 약이 점점 늘어난다. 동네 병원으로 다 감당이 안 돼 대형병원 한 곳에서 진료를 몰아받으시는데, 최근 ‘변비’ 사건 이후 소화기내과가 추가되어 정기적으로 다니는 병원 진료과가 9곳, 여기에 수시로 가시는 안과, 치과, 피부과까지 포함하면 10곳을 훌쩍 넘는다. 며칠 전 진료 때 아버지는 접수증에 찍힌 나이 ‘80세’를 보시더니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호적 문제로 병원 나이는 아직 ‘80세’이시다.)
 

아버지의 병원안내문. 검진받으실 때마다 진료받는 곳과 드시는 약이 점점 늘어난다. [사진 푸르미]

 
“내가 여든이냐? 나는 잊어버렸다.”
“병원 나이가 정확한 거지. 올해 여든이세요” 했더니 표정이 밝아지신다.
“그래? 나이 같은 것 잊고 살자. 거꾸로 빼면 더 좋고!”
 
숫자에 민감하신 걸 보면 점점 연세가 들고 계신 것은 확실한데, ‘나이는 잊어버리는 것’이라는 말씀은 고무적이다. 아버지가 정월대보름 오곡밥이나 동지 팥죽에 집착하시는 것도 건강에 대한 염려의 표출이 아닌가 싶다. 오곡밥이나 부럼, 팥죽이 모두 한 해를 시작하고 보내면서 액운을 쫓고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먹었던 음식이 아닌가. 흐르는 세월이야 막을 길 없지만,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좋은 음식을 시절에 맞춰 먹음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거스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에구, 아버지 나이 헤아리는 데 몰두한 사이, 나 역시 오십을 향해 가고 있다. 잊어야지, 나이 따윈 잊고 사는 것이라니 잊어버려야지. 아버지가 팔순 잔치 때 그 밝은 정정한 모습으로, 영원히 팔순에 멈춰 계시면 좋겠다. 그럼 나도 덩달아 함께 멈추는 거 아닐까? ㅋ
 
공무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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