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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놀이 위해 돌고래를 가두는 것, 폭력은 아닐까

[더,오래] 강하라·심채윤의 비건라이프(19)

 
낯선 방에서 뜨거운 햇살에 잠을 깼다. 테라스 문을 여니 물비린내가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코를 덮쳤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건너편 방에 있는 낯선 이의 얼굴이 보였다. 방과 방 사이에는 물이 있었다. 그 물에 돌고래가 보였다. 그들이 물과 물의 끝을 오가는 데는 채 5~6초도 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불편했다. 낯설어서 설레는 이국의 감정이 아니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은 돌고래와 물비린내 때문일까. 눈부시게 밝은 햇살이 비치던 객실 아래의 물은 어둡고 슬퍼 보였다.
 
하와이 카할라 호텔의 돌고래 체험장. 돌고래 4~5마리가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적지 않은 비용을 내면 물속에서 돌고래를 만지며 먹이를 주는 체험을 한다. [사진 강하라]

하와이 카할라 호텔의 돌고래 체험장. 돌고래 4~5마리가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적지 않은 비용을 내면 물속에서 돌고래를 만지며 먹이를 주는 체험을 한다. [사진 강하라]

 
그로부터 수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불편했던 감정은 폭력을 감지하는 감수성의 시작이었다고 회상한다. “폭력의 감수성 당신은 몇 도씨인가요?"
 
우리는 폭력의 감수성이 저체온증이었다. 길고양이나 동물원 동물들의 삶은 알 바가 아니었다. 관심이 없어서 무지했던 것이 아니라 무지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나’이외 타자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받은 교육은 “친구와 싸우지 마세요.”, “차례를 지키세요.”, “인사를 잘하세요.” 이런 것들이었다. 우리는 나와 가까운 사람과 거기에서 조금 더 확장된 사람들까지만 생각하도록 배웠다. 돌이켜보니 어린 시절과 학창시절 우리가 받은 타자화 교육은 그것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2020년, 현재의 교육은 과연 달라졌을까?
 
욕이 많이 나와도, 사람이 사람을 때려도 12세 기준에 적합하다고 구분된 영화를 보며 자랐다. 어른이 되어서 12세 미만의 영화를 아이들과 다시 본다. 우리가 얼마나 폭력에 둔감한지 놀라게 되었다. 얼마나 때리느냐보다 얼마나 벗느냐가 영화 등급을 결정하는 더 중요한 부분이라고 믿게 되었다. 때리는 것과 벗는 것, 어떤 것이 더 폭력적일까. 아니면 둘 다 괜찮은 걸까.
 
게임은 어떨까. 때리거나 죽이거나 폭파하는 게임에서 우리는 배운다. 누군가를 때리고, 구속하고, 경쟁에서 이겨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교육받는 우리는 게임판만 다를 뿐 게임 속 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경쟁이 싫어도 해야만 했다. 나와 우리 편 이외 모두가 적이 된다. 그렇게 나와 타자를 구분 짓는 삶에서 폭력의 감수성은 뜨거워질 기회가 없었다. 하찮은 감상주의가 될 뿐이었다. 폭력임에도 폭력임을 감지할 수 없고, 다소 감지하더라도 나와 우리가 아니면 괜찮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한집에 사는 개, 고양이나 친구의 개는 ‘우리’에 속한다. 타자가 아닌 우리이기에 누군가가 그들을 괴롭힌다면 모른척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타자에 포함된 체험장의 돌고래와 동물원 동물들, 공장 사육 동물들에 대해서는 감지하지 못한다.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노숙자에게는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만, 공장 사육 동물을 키우기 위해 고용된 제3세계에서 온 노동자에게는 감정이입을 하지 못한다.
 
기후변화로 시작된 호주의 산불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5억마리 이상의 동물이 죽었다. ‘우리’만 살피면 된다고 배웠기에 타자의 고통은 잠시 슬프고 안타까운일이 되고 만다.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사진 Kelly Slater Instagram]

기후변화로 시작된 호주의 산불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5억마리 이상의 동물이 죽었다. ‘우리’만 살피면 된다고 배웠기에 타자의 고통은 잠시 슬프고 안타까운일이 되고 만다.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사진 Kelly Slater Instagram]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영역의 타자들은 ‘우리’가 되지 못해서 우리는 그들이 처한 폭력과 고통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내가 볼 수 없다 하여 존재하지 않음은 아니기에 타자들에 대한 인식의 세계를 넓혀본다. ‘먹고 살기 바쁜데 언제 그런 것까지’라고 해버리니 모순적이게도 삶이 더 서글퍼졌다. ‘나’와 ‘우리’는 아니지만 본 적 없고 경험해 본 적 없는 타자들에게 감정이입을 해 갈 때, 우리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보이지 않더라도 인식할 수 있고 인식하면 비로소 세상이 달리 보인다.
 
일상을 살아감에 있어서도 폭력에 노출된다. 폭력이라는 것은 단순히 타인에게 물리적 힘을 가하는 것이 아님을, 지하철을 타고 내리면서 바쁘다고 다른 사람을 밀치기도 하는 것, 뒤에 오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은 채 문을 닫아버리거나 담배 연기를 내뿜는 것, 걸어가는 사람은 무시하며 쌩하니 운전하는 것, 개똥을 치우지 않는 것,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던지는 말, 사람이 아닌 다른 생명에게는 고통과 두려움, 슬픔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 이 모든 것에 대한 감수성을 생각해본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폭력이 아무렇지 않게 일상의 모습으로 깊숙이 존재하는지 감지해본다.
 
우리는 돌고래를 가까이에서 보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여행지의 낯선 방에서 바라보는 돌고래가 우리 삶에 과연 얼마나 대단한 것을 줄까? 그 하찮은 즐거움과 볼거리를 위해 수천 킬로를 오가는 돌고래를 가두는 것이 폭력임을 감지했을 때, 내가 먹는 것, 내가 입는 것, 내가 쓰는 것 하나를 허투루 선택하지 않아야겠다는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 이외의 모든 타자에게 더 조심스러워졌다.
 
하와이 바다에서 자유로운 돌고래 커플을 보았다. 호텔에 갇혀있던 돌고래의 눈빛이 기억났다. [사진 강하라]

하와이 바다에서 자유로운 돌고래 커플을 보았다. 호텔에 갇혀있던 돌고래의 눈빛이 기억났다. [사진 강하라]

 
작가·PD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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