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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해서와 초서 가장 흐드러지게 쓰던 한국 서단의 거목

당대 명필로 손꼽힌 학정 이돈흥 선생이 생전 작업실에서 붓글씨를 쓰는 모습. [중앙포토]

당대 명필로 손꼽힌 학정 이돈흥 선생이 생전 작업실에서 붓글씨를 쓰는 모습. [중앙포토]

현대 한국 서단에서 해서와 초서를 가장 흐드러지게 쓰는 명필가가 18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학정(鶴亭) 이돈흥 선생. 동갑으로 20대 초반에 만나 함께 보낸 세월이 50여 년, 생일도 딱 일주일 차이인데 그가 세상을 먼저 등졌다.
 

서예가 이돈흥
‘동국진체’ 계승 ‘학정체’ 개척
호남 서예 명가들의 맥 이어

1947년 담양 태생인 학정은 전남대 섬유공학과 1학년 당시 교장이었던 부친의 권유로 송곡(松谷) 안규동 선생을 찾아가 서예에 입문했다. 그는 전남에, 나는 전북에 살았고, 대학도, 전공도 달랐지만 서로 친했던 송곡 선생과 강암 송성룡의 제자로 처음 만났다.
 
학정은 호남의 명가들, 즉 송설주 선생-소전 손재형 선생으로 이어지는 서예의 맥을 정통으로 이은 한국 서단의 거목이었다. 원교(圓嶠) 이광사(1705∼1777)와 추사(秋史) 김정희의 전통을 계승, 자유분방한 필치에 해학과 여유까지 담아낸 조선 고유의 서체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전통을 이어온 주역이다.
 
학정은 전통 계승에 만족하지 않았다. 동국진체를 바탕으로 중국 명가들의 서풍을 섭렵해 독자적 서체를 개척했다. 이른바 ‘학정체’다. ‘신동국진체’라 불리기도 하는 학정체는 자유분방하면서도 정감 있고, 또 흐드러진 꽃처럼 무르익은 그의 솜씨를 보여준다.
 
학정 형이 27세에 만든 학정서예연구원에서 후학 3만여 명을 배출했고 이 중 상당수가 중견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와 의기투합해 2005년 1월 서울 인사동 공평아트센터에서 마련한 ‘삼문전’은 잊을 수 없다. 학정과 나, 그리고 소헌 정도준 셋이 서로 왕래가 없는 문하생 45명의 전시를 함께 연 자리였다. 폐쇄적인 한국 현대 서단에 ‘충격’ 을 던진 자리였다. 글씨에 대한 자부심뿐만 아니라 선의의 경쟁에 대한 열린 마음이 있어야 가능했던 일이다.
 
이 의기투합은 2012년 ‘서예삼협파주대전(書藝三俠坡州大戰)’으로 확대됐다. 한길사에서 학정과 나, 그리고 소헌이 함께 작품집을 내고 기념 전시를 크게 연 것이다. 20세기 한국 서단의 거장인 강암과, 송곡, 일중(김충현) 문하에서 잔뼈가 굵은 우리 세 사람이 칼이 아닌 붓을 들고 벌인 ‘진필승부’의 자리였다.
 
국립 5·18 민주묘지는 물론, 화엄사, 해인사, 송광사, 대흥사, 불국사, 범어사 등 전국 유명 사찰에서도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학정은 더는 한국에서, 그리고 중국에서 글씨 얘기를 할 친구가 없어서 서둘러 이승을 떠났나 보다. 저세상에서 추사도 만나고, 명의 왕탁도 만나고, 송의 황산곡도 만나 글씨를 쓰고 있지 않을까. 천국에도 명필이 간절히 필요했나 보다.
 
하석(何石) 박원규 서예가·한국전각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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