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껌으로 시작해 고국에 123층 타워까지···거인 신격호가 지다

신격호 1921~2020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1965년, 당시 44세인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은 가방을 직접 들고 수행원 2명과 함께 김포공항에 내렸다. 현재 국내 재계 5위로 성장한 롯데 여정의 출발점이었다. 일본에서 제과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신 명예회장은 일본의 귀화 제안을 뿌리치고, 이때부터 고국에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하게 된다. 신 명예회장은 이후 인터뷰에서 ’한국 국교 정상화를 계속 지켜보며 조국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1965년, 당시 44세인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은 가방을 직접 들고 수행원 2명과 함께 김포공항에 내렸다. 현재 국내 재계 5위로 성장한 롯데 여정의 출발점이었다. 일본에서 제과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신 명예회장은 일본의 귀화 제안을 뿌리치고, 이때부터 고국에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하게 된다. 신 명예회장은 이후 인터뷰에서 ’한국 국교 정상화를 계속 지켜보며 조국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신격호,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 롯데그룹 창업주.
 

일본서 신문배달 고학, 27세 창업
소설 주인공 이름 따 사명 ‘롯데’로
종업원 10명 풍선껌 사업으로 시작
한때 포브스 선정 세계 4위 부자

19일 별세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선구적 경계인이었다.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롯데라는 제국을 일궜다. 심한 경상도 사투리와 모국어만큼 편한 일본어를 섞어 썼다. 양쪽에서 환호와 의심을 동시에 받았다. 한국 사람이 일본에서 돈만 벌어 간다는 조롱과 비방을 듣기도 했다. 신격호의 99년 삶엔 빛과 그림자, 그리고 모호한 회색지대가 공존한다.
 
1세대 창업가인 신 명예회장은 맨손으로 국내 그룹 재계 5위 롯데그룹을 일궈냈다. ‘대한해협의 경영자’ ‘신(神)격호’ 등의 별칭을 얻었다. 한창때는 “홀수달에는 한국에서, 짝수달에는 일본에서”로 요약되는 스케줄을 소화하며 그룹을 지휘했다. 일본에서 사업가로 성공하자 귀화하라는 권유도 빈번했지만 한국 국적을 바꾸지 않았다. 1942년 단돈 83엔을 들고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48년 일본 롯데, 67년 한국 롯데를 세운 후 90여 개 계열사, 자산 규모 115조원으로 키웠다. 불호령과 꼼꼼함으로 직원을 떨게 했지만, 댐 건설로 수몰돼 사라진 고향(울산 둔기리) 주민들을 위해 43년간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위로잔치를 열기도 한 인간미 넘치는 재계의 거인이었다.
 
가족 : 신격호 명예회장이 일본 도쿄 자택에서 어린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왼쪽)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안고 있는 모습.

가족 : 신격호 명예회장이 일본 도쿄 자택에서 어린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왼쪽)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을 안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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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호 명예회장은 1921년 10월 4일 영산 신씨 집성촌인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신진수(1973년 작고)씨의 5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 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73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에서 세 번째 부자였지만 논 열다섯 마지기(1마지기는 약 200평, 661㎡)에서 나온 것을 식구들이 먹고 나면 조금 남는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10~20㎞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 통학하는 열정을 보였지만,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일본으로 가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자랐다.
 
숙부의 도움으로 2년제 농업 보습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간 뒤 신문·우유 배달을 하며 와세다 고등공업학교 화학과를 마쳤다.
 
먹거리 : 고국에서의 첫 사업은 제과업이었다. 아이들에게 풍족한 먹거리를 주겠다는 의지에서다. 1967년 세운 롯데제과를 둘러보는 신 명예회장.

먹거리 : 고국에서의 첫 사업은 제과업이었다. 아이들에게 풍족한 먹거리를 주겠다는 의지에서다. 1967년 세운 롯데제과를 둘러보는 신 명예회장.

고객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신의성실과 특유의 꼼꼼함은 이때부터 빛을 발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유 배달시간이 정확했다. 입소문이 나 몰려드는 주문에 배달시간을 맞추기 어렵자 직접 아르바이트를 고용했다. 아르바이트가 아르바이트를 고용한 것이다. 이런 모습에 반한 일본인이 사업자금 6만 엔을 대줘 선반용 기름 제조사업을 시작했다.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며 결국 문학의 꿈은 펼치지 못했다. 대신 문학에 대한 동경은 롯데그룹 명칭으로 남았다. 괴테의『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좋아해 여주인공 샤롯데(롯데는 애칭)에서 기업명을 따왔다. 이 작명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내 일생일대 최고의 수확이자 선택”이라는 말을 남겼다.
 
신격호 신화의 시작은 풍선껌이다. 48년 6월 종업원 10명과 함께 설립한 기업 롯데의 첫 제품은 하필 일본인이 서구 문물이라며 반감을 보인 껌이었다. 배고픈 시절 밥도 안 되는 간식으로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각을 넘고 롯데 풍선껌은 줄 서서 사는 제품 대열에 올랐다. 소공동 롯데호텔 34층, 신 회장의 집무실엔 당시 판매된 ‘롯데 그린껌’ 사진이 붙어 있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이후 롯데는 초콜릿과 캔디류, 빙과류로 사업 영역을 넓혀 나가면서 일본을 대표하는 식품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롯데는 이어 상사(1959), 부동산(1961), 물산(1968) 등으로 확대하며 급성장했다. 88년 일본 경기 호황으로 신격호 명예회장은 포브스 선정 세계 부자 4위에 오르기도 했다.
 
풍선껌부터 123층 타워까지…‘대한해협의 거인’ 
 
살거리 : 1979년 12월 개장한 롯데쇼핑센터(현롯데백화점 본점)는 개점 당일 30만 명이 모여들었다. 당시 세계적 수준의 인테리어가 화제였다.

살거리 : 1979년 12월 개장한 롯데쇼핑센터(현롯데백화점 본점)는 개점 당일 30만 명이 모여들었다. 당시 세계적 수준의 인테리어가 화제였다.

65년 한·일 수교로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신격호 명예회장은 한국에 역진출했다. 67년 자본금 3000만원으로 국내에 창립한 롯데제과는 70~80년대를 거치면서 롯데그룹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제과 창립 직후 주요 일간지에 낸 광고엔 “ ‘품질본위, 박리다매, 노사협조’를 바탕으로 기업을 통해 사회 및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기업 이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신 명예회장은 한 인터뷰에서 “51년부터 시작된 한일회담의 진행 과정을 관심을 갖고 지켜보면서 조국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롯데 관계자는 “모국에 대한 투자 계획은 50년대에 이미 싹을 틔우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한국으로 건너와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볼거리 : 그는 ‘롯데 자이언츠’ 구단 이름을 직접 지을 정도로 야구 사랑이 남달랐다. 1989년 선수단을 격려하는 모습. 오른쪽은 최동원 선수.

볼거리 : 그는 ‘롯데 자이언츠’ 구단 이름을 직접 지을 정도로 야구 사랑이 남달랐다. 1989년 선수단을 격려하는 모습. 오른쪽은 최동원 선수.

소공동 호텔롯데 건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다. 70년 롯데껌에서 쇳가루가 검출돼 제조정지 명령이 내려지자 박 전 대통령은 신 회장를 청와대로 소환했다. 박 대통령은 파동을 무마해 주는 대신 “호텔롯데를 지어 경영하라”고 조건을 걸었다.
 
지하 3층, 지상 38층의 1000여 객실을 갖춘 소공동 롯데호텔 건설에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보다 많은 1억5000만 달러가 투자됐다. 70년대 서울에 ‘동양 최대의 마천루’를 짓겠다는 발상은 무모해 보였지만 6년 건설 끝에 현실이 됐다. 신격호는 호텔롯데를 ‘혈육’으로 여길 만큼 애착을 쏟았다.
 
놀거리 : 1989년 롯데월드 개관식에 참석한 신 명예회장 부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프로젝트에 반대가 컸지만, 그는 밀어붙여 성공을 이뤘다.

놀거리 : 1989년 롯데월드 개관식에 참석한 신 명예회장 부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프로젝트에 반대가 컸지만, 그는 밀어붙여 성공을 이뤘다.

신격호 명예회장이 유통업과 관광업에 관심을 둔 이유는 “특별한 자원을 들이지 않고도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사업(롯데 50년사 2017년)”이었기 때문이다. 75년 이미 10층 규모의 백화점을 세우고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면세점을 포함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만들었다. 79년 12월 17일 롯데쇼핑센터(현 백화점) 개관일엔 서울시민 30만 명이 몰렸다. 당시 수도권 인구가 800만 명이었다. 롯데쇼핑센터는 개점 100일 만에 입장객 수 1000만 명 기록을 세웠다. 이후 롯데의 관광·유통업은 2000년대 한류 붐을 타고 급성장했다.
 
79년 공기업이었던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을 인수했던 신 명예회장은 90년대 중반 지금의 롯데를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을 마련했다. 외환위기 여파로 구조조정에 들어간 국내 석유화학산업 부문에서 적극적인 인수를 성사시키면서다.
 
2017년 5월 신 명예회장이 임직원들과 함께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롯데지주·21세기북스]

2017년 5월 신 명예회장이 임직원들과 함께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롯데지주·21세기북스]

초고층 건물에 대한 신 명예회장의 집념은 ‘서울의 랜드마크’로 짓고자 했던 123층 롯데월드타워 건설로 이어졌다. 88년부터 ‘제2 롯데월드 사업’이라는 명칭으로 시작된 초고층 프로젝트는 수차례 백지화됐지만 신 명예회장은 미련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2011년 최종 승인돼 2017년 완공됐다. 롯데월드타워는 지난해 기준 1억 명이 찾은 서울의 명소가 됐다.
 
신 명예회장은 현장과 숫자에 철저했다. 기억력이 비상했다. 셔틀경영으로 한국에 있을 땐 롯데호텔 34층 집무실에서 매일 여러 계열사 대표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관련 숫자들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자료를 뒤적거리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77년 롯데에 입사한 소진세(교촌 회장) 롯데그룹 고문은 신 명예회장에 대해 “참으로 엄격하고 꼼꼼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소 고문은 “롯데호텔을 세울 때는 일본에서 들여오는 각종 기자재와 의자 숫자까지 일일이 파악했다”고 전했다.
 
신 명예회장의 현역 시절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후계 구도는 불화의 씨앗이 됐다. 2013년께부터 신 명예회장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신동빈 현 롯데그룹 회장과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형제의 경영권 분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롯데그룹의 거미줄 지배구조 등이 드러나면서 창업 이래 최대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그후엔 차남 신동빈 현 회장이 경영권을 공고히 했다. 신 명예회장은 법원으로부터 한정 후견인을 지정받아 지내다 영면했다.
 
“신 명예회장, 일본 첫 3000안타 롯데 이적해 달성하라 했다”
재일동포 프로야구 선수 장훈



장훈

장훈

한·일 양국의 거성(巨星) 한 분이 또 졌다. 인간의 숙명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신 명예회장만큼 한·일 양국에서 경제적으로, 또 민족에 공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분이다. 개인적으로는 한·일 양국에서 오랫동안 신 명예회장에게 신세를 졌다. 내가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에서 일본 최초의 3000안타 기록을 (39개)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신 명예회장은 "롯데 구단으로 와서 (3000안타를) 달성하라”고 말씀하셨다(당시 신 명예회장은 요미우리의 와타나베 쓰네오 구단주를 만나 ‘장훈이를 달라’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난 1980년 요미우리에서 롯데 구단으로 이적, 그해 5월 3000안타 기록을 이뤘다. 기록 달성 후 신 명예회장에게 인사하러 갔더니 "축하한다”며 악수를 청하셨다. 그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현역에서 은퇴(81년)한 뒤 신 명예회장은 내게 롯데 구단의 감독을 맡아 달라고 하셨다. 난 "다음 기회에 잘 부탁드린다”고 답했다. 언제나 나를 각별히 챙겨주셨다. 편히 잠드시길 기원한다. 감사드립니다.
 
전영선·추인영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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