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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기자 62년…그가 대한민국 외교의 역사였다

김영희 대기자가 1997년 일본 요코스카 기지에서 미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에 탑승해 취재 중이다. [중앙포토]

김영희 대기자가 1997년 일본 요코스카 기지에서 미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호에 탑승해 취재 중이다. [중앙포토]

김영희 전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가 15일 타계했다. 83세. 그는 62년간 현역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 분야 칼럼니스트 겸 인터뷰어로 이름을 날렸다.
 

김영희 전 중앙일보 대기자
역대 정부 외교 고비 때마다 자문
중앙일보 창간호에 토인비 인터뷰
케네디 암살 국내 특종보도는 전설
‘아베와도 손잡자’ 칼럼 외교가 화제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펜을 놓지 않았다. 은퇴 후에도 매일 아침 집 근처 커피숍에 나가 검색용과 원고 작성용 등 노트북 두 대를 펼쳐 놓고 글을 썼다. 지난해 9월 12일자 중앙일보에 쓴 ‘트럼프는 한국을 버리고 북한과 동맹을 맺으려 하는가’가 마지막 글이 됐다.
 
고인은 1958년 고졸 학력으로 학력 제한이 없던 한국일보에 합격했다. 결핵성 관절염으로 입원한 부산의 스웨덴 구호병원에서 영어를 익혔다.
 
고인이 63년 11월 23일 밤 외신부 야근 중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소식을 특종보도한 것은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한다. 텔레타이프로 피격 소식이 들어온 것을 포착, 윤전기를 세웠다. 고인은 훗날 “혼자 1면 스트레이트와 스케치 기사를 다 썼다. 완벽한 특종이었다. 타지엔 케네디의 케자도 없었다”고 했다.
 
65년 중앙일보 창간호에 실린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와의 인터뷰. [중앙포토]

65년 중앙일보 창간호에 실린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와의 인터뷰. [중앙포토]

65년 7월 중앙일보 창간 요원으로 스카우트돼 창간호(65년 9월 22일자)에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으면서 국제기자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70년 33세의 나이로 외신부장이 되고, 이듬해 워싱턴특파원으로 부임해 7년간 활약했다. 이어 83년 11월 중앙일보 최초의 외신부 기자 출신 편집국장이 된다. 이후 논설위원, 문화사업담당 이사와 상무,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인 등으로 7년을 보냈다.
 
95년 3월 국제 담당 대기자로 중앙일보에 돌아온 그는 98년 6월부터 ‘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란 주 1회 고정칼럼 연재를 시작하면서 국제 분야 대표 칼럼니스트로 필명을 날리게 된다. “주장은 실증적으로, 비판은 대안을 갖고”를 입버릇처럼 말해온 그는 새로운 정보, 통찰력, 대안 제시, 유려한 문장을 잘 쓴 칼럼의 기준으로 보았다. 고인은 팩트, 실증의 근거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됐든 어디에 있든 찾아가 만났다.
 
2001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의 인터뷰. [중앙포토]

2001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의 인터뷰. [중앙포토]

그는 70세가 넘어 1년간 『앙티 외디푸스』 등 질 들뢰즈의 책에 집중했다. 그의 칼럼에서 등장하는 차이와 반복, 노마드, 횡단 등의 개념은 그 산물이었다.
 
수십 년 어린 후배 기자들이 그를 어려워하지 않고 기사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은 고인의 따뜻한 성정 때문이었다. ‘편집국 최고참 기자’라는 타이틀은 그의 자부심이었다.
 
2003년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와의 인터뷰. [중앙포토]

2003년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와의 인터뷰. [중앙포토]

대한민국 외교 현장엔 그가 꼭 있었다. 한반도 문제와 한국의 주요 외교 현안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은 정책 입안에도 시사점을 줬다. 역대 정부는 외교적 고비 때마다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 한·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2015년 5월 미·중 갈등이 격화하는 가운데 역사 수정주의를 꾀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손도 잡는 실용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 칼럼 ‘악마와 춤을’은 외교부 내 가장 많이 회자한 칼럼 중 하나였다. 고인은 작고 불과 몇 달 전에도 현장 기자에게 전화해 정부의 대일 정책 기조 변화 흐름을 확인하는 등 끝까지 한국 외교를 걱정했다. 체면과 형식을 넘어선 실리와 국익 추구야말로 고인이 한국 외교에 바라는 단 한 가지였다.
 
고인이 천착한 또 하나의 주제는 북한 비핵화와 통일이었다. 기존의 틀을 뛰어넘는 고인의 파격적 발상에 동의하지 않은 외교관들조차도 그를 보기 드문 큰 기자이자 사상가로 인정했다.
 
인터뷰어로서 고인의 열정은 갓 입사한 신입 기자의 그것을 몇 배 넘어섰다. 핵심을 찌르는 짧고 명료한 질문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항상 전문을 원문 스크립트로 만든 뒤 기사를 작성했다. 고인의 인터뷰 기사는 경어체였고, 꼭 “감사합니다”란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인터뷰이에 대한 예우였다.
 
미국 언론인 월터 리프먼을 ‘키케로 이후 서양이 낳은 최고의 논객’이라며 흠모한 김영희는 한국 후배 기자들의 롤모델이 되어 영면에 들었다. 타계하기 며칠 전에도 “다시 태어나도 기자를 하고 싶다”고 했다.
 
고인은 『워싱턴을 움직인 한국인들』『페레스트로이카 소련기행』『마키아벨리의 충고』 등 저서를 남겼다. 『소설 하멜』도 그의 작품이다. 장례는 중앙일보 사우회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은 부인 박영애씨와 1남(김준우 삼성전자무선사업부)1녀(김소연).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0호. 발인 18일 오전 7시30분.
 
“큰 무대, 큰 테마 바라보던 큰 기자”
후나바시 요이치

후나바시 요이치

후나바시 요이치 전 아사히신문 주필

 
김영희 대기자처럼 국제문제를 맡아왔던 사람으로서, 나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국제기자로 고인을 꼽는 데 한번도 주저한 적이 없다. 그는 큰 무대, 큰 테마를 바라보던 큰 기자였다. 늘 나에게 “미국에서 이런 재미난 책이 나왔다”고 알려주었고, 좌우의 진영논리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와 중용의 길을 걸었던 현장을 뛰는 바른 기자였다. 일본과 중국 관계가 안 좋던 10년 전 나와 옌쉐퉁 원장(중국 칭화대 현대국제관계연구원)을 불러 “두 나라가 잘 지내야 한·중·일이 윈-윈하는 것 아니냐”며 손잡아주던 훌륭한 기자였다. 그런 그를 높이 평가한 중앙일보가 부럽고, 또 그의 정신을 한국 기자들이 앞으로 이어가길 기원한다. 
“그의 칼럼에선 땀냄새가 났다”
김민환

김민환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

 
고인은 한국 언론계에서 최고의 대기자이자 가장 모범적인 대기자이셨다. 고인의 칼럼에선 땀 냄새가 났다. 고담준론이 아닌 발로 뛰는 현장이 담겼다. 또 책과 사람이 풍부하게 인용된 글은 다른 어느 글과도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여기에 명징한 논리는 기본으로 담겨 있었다. 그는 냉정한 객관주의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주관주의를 펴온 참 언론인이었다. 내가 전남대 교수 시절인 1989년 미국 미주리대를 방문 학자로 찾았는데 그 직전 이곳에서 저널리즘 분야로 1년 연수를 했던 고인은 이미 전설이었다. 자식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통계 자료를 직접 물으며 배우셨다. 고인은 나이를 넘어 소년의 열정을 가진 분이셨다.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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