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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 논설위원이 간다] BTS와 송가인…틈나면 노래하는 한국인 DNA 있다

서울 복판에 들어선 우리소리박물관

어린아이들이 김홍도 풍속도 애니메이션을 보며 옛사람들의 땀이 담긴 향토민요를 듣고 있다.[사진 서울우리소리박물괃]

어린아이들이 김홍도 풍속도 애니메이션을 보며 옛사람들의 땀이 담긴 향토민요를 듣고 있다.[사진 서울우리소리박물괃]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가 관객을 반갑게 맞는다. 모를 심고, 밭을 갈고, 쇠를 두드리고, 지붕을 얹고, 베를 짜고, 빨래하고 등등, 옛사람들의 살림살이를 담은 단원의 그림이 짤막한 애니메이션으로 빚어졌다. 장면이 하나하나 바뀔 때마다 구성진 노래가 나직하게 흐른다. 옛사람들의 일상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듯하다.

농사짓고 고기 잡는 조상들 일상
지난 30년간 전국서 2만곡 채록
맥 끊겼지만 다양한 콘텐트 활용
록·발라드 등 현대적 요소 풍부해

 
예컨대 바닷가 어부들이 고기를 잡는 장면에서 제주 민요 ‘선유가’(船遊歌)가 나온다. ‘엥헤에엥헤에에 어기여 뒤기여 어기여차 소리로 우겨나줍서.’ 제주에서 ‘테우(노를 젓는 배) 띄우는 소리’로 불리는 노동요다. 고된 생활 속에서도 흥과 여유를 잃지 않은 우리 선인들이다. 늘어질 듯 꺾이는 느린 가락을 듣노라면 숨가쁜 일과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는 듯하다.

 
모두가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 보리는 서민들의 주요 식량이었다. 논에 모를 심기 전에 보리를 거둬들여 주린 배를 채웠다. 마당에 멍석을 펴놓고 일꾼 대여섯이 도리깨로 보릿단을 내리쳐 알곡을 털어냈다. 이때 노래가 빠질 수 없었다. 그 삶의 현장을 포착한 단원의 그림에 경남 고성군의 보리타작 소리가 어울렸다. ‘에~화~에~화~물러서고 에~화 때려요 허~어~ 보리가~에~화~많~이~에~화~붙는다~.’ 도리깨질이 힘겨운 탓인지 노랫말은 짧고 경쾌하다.

 
서울 창덕궁 맞은편에 있는 서울우리소리박물관 풍경이다. 대도시 한복판에 옛사람의 노랫가락이 흘러넘친다. 지난해 11월 21일 문을 연 새내기 박물관이지만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이들이 몸으로 토해낸 소리를 옮겨놓았다. 지상 1층~지하 2층 연면적 1385㎡(약 420평)의 아담한 한옥 건물이나 그 안에 담긴 노래는 한반도 방방곡곡을 감싼다.

  
향토민요과 그림·영상·가상현실의 만남

 
최상일 서울우리소리박물관장. [사진 굿스테이지]

최상일 서울우리소리박물관장. [사진 굿스테이지]

우리소리박물관에 흐르는 소리는 판소리·경기민요 등 우리가 흔히 아는 국악과 빛깔이 조금 다르다. 궁중 행사에 연주된 정악(正樂)과도 거리가 멀다. 말 그대로 우리 조상들이 먹고, 일하고, 놀면서 부른 노래, 이른바 향토(토속) 민요를 한데 모았다. 도시화·산업화 격랑 속에서 점차 사라진, 하지만 우리 핏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문화 유전자(DNA)를 만날 수 있다. 빼어난 명창이 아닌 평범한 아낙네·남정네가 신명 나게 부른 노래들이다. 최상일 박물관장은 “민간인이 일하며 부른 노래, 특정 지역을 넘어 한 나라에서 불린 향토 민요만으로 박물관을 차린 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일반적으로 듣기보다 보는 곳이다. 우리소리박물관은 소리의 시각화에 적잖은 공을 들였다. 그림·사진·영상·3D모형·가상현실 등 다양한 전시기법을 활용해 눈으로 보는 소리를 시도했다. 자칫 낡은 유물로 방치될 수 있는 농경시대 가락을 디지털 시대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덕분에 관객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우리 조상이 살던 산과 강, 논과 밭, 그리고 집안으로 순간 이동하게 된다

 
최상일 관장이 전국을 돌며 민요를 채집했을 때 사용한 녹음 장비와 노트. 박정호 기자

최상일 관장이 전국을 돌며 민요를 채집했을 때 사용한 녹음 장비와 노트. 박정호 기자

일례로 전시장 들머리 오른편 벽면엔 초가집 마을 모형이 있다. 불이 환히 켜진 집집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려온다. 박물관에 비치된 작은 스피커를 귀에 대면 ‘그 시절 그 노래’를 감상할 수 있다. ‘쪼막 쪼막 쪼막 쪼막 쥔 쥔 쥔 짝짜꿍 짝짜꿍’ 같은 아이 어르는 소리, ‘그 베 짜서 멋 할랑가. 우리 오빠 장가가면 청포 도포 지을라네’ 같은 베틀노래를 들을 수 있다. 나무 장식장 서랍을 열면 ‘쌍무지게 끈을 달고 외무지개 선을 둘려’(색동 주머니를 만들며 부른 노래)가, 한반도 지도에서 어로(漁撈) 사진을 누르면 ‘돈 실러 가세 돈 실러 가세. 연평 바다로 돈 실러 가잔다’(서해 조기잡이 노래)가 나온다. 세상에 태어나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와 함께해온 전국 8도 대표곡들이다.

  
우리만큼 노동요 풍부한 나라도 없어

 
우리소리박물관의 밑바탕에는 최상일 관장(63·전 MBC 라디오 PD)의 오랜 노력이 깔려 있다. 라디오 팬들의 귀에 익은 ‘이 소리는 ○○○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현장을 누빈 주인공이다. 지난 30여 년 전국을 돌며 향토민요 채집·연구에 전념해왔다. 5년 전 방송사를 나온 이후에도 향토민요 알리기 외길을 걷고 있다.

 
우리 소리 알리기 2막을 연 셈이다.
“박물관 건립에 6년 정도 걸렸다. 서울시에서 부지·건설비를 댔다. 방송사에 있을 때 전국 900여 마을을 돌며 3만여 명을 만났다. PD들이 팀을 이뤄 1만8000여 곡을 녹음했다. 북한 자료까지 합하면 2만곡쯤 된다. 새로 박물관을 연 만큼 체계적인 향토민요 연구·보급에 나설 생각이다.”
 
디지털 시대다. DB 구축이 출발점이다.
“그렇다. MBC에서 소장 음원을 기증했다. 민요 채집은 보물찾기와 같다. 여기저기 흩어진 개인·단체 자료를 앞으로 한데 모아야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구비문학 대계 프로젝트와 자료를 공유하기로 했다. 우리 소리는 음악이자 문학이기 때문이다.”
 
우리 향토민요의 특징을 꼽는다면.
“사람 사는 곳 어디나 음악이 있다. 하지만 우리만큼 노동요가 풍부한 나라를 본 적이 없다. 논농사·밭농사·어로·토목 등등, 모든 게 노래로 승화됐다. 외국 민요 현장도 다녀봤지만 주로 잔치·축제 관련 노래가 많다.”
 
요즘 사람들은 우리 소리를 잘 모른다.
“제가 만난 어르신들은 대부분 돌아가셨다. 향토민요의 맥이 끊긴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가치마저 잊어버려선 안 된다. 향토민요는 공동체 정신의 표출이다. 개인화·파편화 사회의 숱한 병리 현상을 치유할 요소를 갖고 있다.”
 
문화 콘텐트 활용이 중요하지 않나.
“맞다. 한국인만큼 노래를 즐기는 민족도 없다. 지금도 TV를 켜면 노래 세상이다. 송가인의 애절한 목소리가, BTS의 강력한 몸짓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향토민요는 우리 음악의 토종 DNA다. 사람 사는 희로애락이 농축돼 있다. 발라드·록·힙합 등 여러 음악적 요소가 들어 있다. 그 가능성·잠재력을 주목해보자.”
 
구체적 실천 방안을 찾아야 한다.
“가까운 것부터 시작하겠다. 요즘 박물관은 체험이 대세다. 학생·일반인 대상의 프로그램을 짜고 있다. 우리 장단을 쳐보고, 노래도 부를 것이다. 은퇴자 중심의 민요동호회도 꾸려갈 계획이다. 저변이 넓어져야 뛰어난 창작곡도 나올 테니까.”
 
해방과 전쟁…소리로 듣는 한국 100년
예전 전파사를 재현한 모습. 박정호 기자

예전 전파사를 재현한 모습. 박정호 기자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서 북한 공산군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전시장 벽면 스피커에서 6·25 발발을 전하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당시 첫 속보를 전한 서울중앙방송국 위진록 아나운서가 70년 전 그 날의 소리를 재연했다. 짤막한 뉴스는 이렇게 끝난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안다. 전쟁 초반, 우리 군이 건재하지 않았음을…. 서울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소리, 역사를 담다’ 특별전이다.

 
박물관 한구석에선 어린아이가 누군가에게 옛날 전화 다이얼을 돌리고 있다. 검정색 수화기에서 독립운동가 서재필·백범·조소앙의 육성이 들려온다. 1945년 해방의 기쁨을 나누는 목소리다. 이번 특별전은 소리로 듣는 한국 현대사다. 지난 100여 년 우리와 함께해온 선언·함성·노래·공연·뉴스 등이 흘러나온다. 일제강점기·한국전쟁부터 4·19, 5·16을 거쳐 6월항쟁·IMF 외환위기까지 두루 훑는다. 소리 또한 그림·영상 못지않은 사료임을 보여준다.

 
전시는 아기자기하다. 69년 팝가수 클리프 리처드 공연장을 메운 앙코르 환호, 70년대 전국 학교 운동장에 울려 퍼진 국민체조 구호, 82년 역사 속으로 사라진 통금 사이렌 소리 등이 추억을 자극한다. 스마트폰 시대, 현대인의 필수품 같은 카톡 메신저 소리도 있다. 그 방정맞은 신호음 또한 언젠가 역사 유물로 남게 될 것이다. 전시는 3월 1일까지.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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