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임재준의 의학노트] 레이건 대통령이 보여준 VIP 환자의 품격

임재준 서울대 의대 교수, 의학교육실장

임재준 서울대 의대 교수, 의학교육실장

큰 부자나 많이 출세한 사람들을 진료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디서든 VIP로 특별대우만 받아온 터라 보통 환자들이 받는 방식의 진료를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의사들의 권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려고 하는데, 태도 역시 오만해 의료진의 인심을 잃기 일쑤다.
 

환자 위세에 눌려 맞춰주려다
‘VIP 신드롬’ 발생할 수도 있어
특별대접 바라다 되레 해 입으니
부디 레이건처럼만 행동하시라

그런데 진정한 VIP 환자의 행동은 수준이 달랐다. 1981년 3월 30일 오후 2시 35분, 가슴에 총상을 입은 70세의 남자 환자가 숨을 헐떡거리며 조지 워싱턴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한다. 총기 사고가 드물지 않은 미국에는 이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특별했던 점은 그 환자가 당시 미국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이었다는 점이다. 인근에서 존 힝클리에게 피격된 레이건 대통령과, 부상을 입은 공보비서관 제임스 브래디, 경호원 티머시 매카시, 경찰관 토마스 델라헌티가 사건 발생 10분 만에 이 병원으로 이송된 것이다. 조지 워싱턴 대학병원은 지구 최고의 VIP 환자를 맞은 셈인데, 응급실 도착 직후 잠시 의식을 잃기도 했던 레이건 대통령의 상태는 총상 부위 출혈 때문에 수축기 혈압이 80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위중했다.
 
극도로 긴장한 의료진과는 달리 레이건 대통령은 생사를 오가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다.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의 손을 잡아주던 간호사에게 “혹시 낸시가 우리 사이를 눈치챘을까요?”라고 농을 건넸고, 황급히 도착한 낸시 레이건 여사에게 “여보, 내가 수그리는 걸 깜빡했어” 라고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 표현은 잭 댐프시라는 전설적인 권투 선수가 상대방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패한 날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자신이 깜빡하고 상체를 숙이지 않는 바람에 그리되었다고 했던 유명한 농담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총알이 박힌 왼쪽 가슴에서 2ℓ 이상의 출혈이 계속되자 의료진은 가슴을 열고 박혀있는 총알을 빼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레이건 대통령을 수술실로 옮긴다. 현직 대통령의 몸에 박힌 총알을 꺼내고 출혈 부위를 찾아 지혈해야 하는,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고난도의 수술을 시작하기 위해 마취과 의사가 레이건 대통령의 오른쪽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모든 것이 잘 될 겁니다”라고 대통령을 안심시킨다. 그러자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의 코와 입을 덮고 있던 산소마스크를 힘겹게 끌어내려 의료진들을 긴장시키는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는 의외로 농담을 던진다.
 
“당신들이 공화당원이라고 얘기해주시구려.”
 
공화당 출신 현직 대통령의 수술을 맡아 집도하기로 한 조셉 조르다노 박사는 하필 정식 민주당원이어서 일순 분위기가 얼어붙었는데, 그는 이렇게 응수하여 레이건 대통령과 초긴장 상태의 의료진들을 파안대소하게 한다.
 
“대통령님, 오늘만은 저희 모두가 공화당원입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회복과정에서 가래가 기관지를 막아 폐의 일부분이 짜부라지는 합병증이 생기고 만다. 폐를 다시 부풀리기 위해 수술 부위가 아프더라도 열심히 가래를 뱉어내라는 의료진의 지시를 너무나 충실히 따르던 그가 의사로부터 모범 환자라고 칭찬받자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당연히 시키시는 대로 해야지요. 제 장인어른도 의사 선생님이셨거든요.”
 
레이건 대통령은 생사가 걸린 긴박한 순간에도 자신 때문에 바짝 긴장한 의료진과 걱정하는 낸시 여사에게 태연히 농담을 건네며 긴장을 풀어주었고, 의료진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는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구 최고의 VIP 환자가 보여줄 수 있는 품격을 제대로 보여준 셈이다.
 
환자의 위세에 눌린 의사가 기분을 맞춰주려다가 꼭 필요한 절차를 생략한다든지, 썩 필요하지 않지만 환자가 요구하는 검사나 처치를 하다가 결국 환자가 피해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미련한 상황을 ‘VIP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병원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으려는 시도는 부디 하지 마시길 부탁한다. 식당과는 달리 병원에서 받게 되는 특별대우는 도리어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저 레이건 대통령처럼만 행동하면 된다.
 
임재준 서울대 의대 교수, 의학교육실장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