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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지에 물 묻혀 차 번호판 가렸다" 어수룩한 성금 도둑들

30일 오후 7시쯤 전북 전주시 완산경찰서 1층으로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달아난 혐의(특수절도)로 긴급체포된 30대 용의자가 들어오고 있다. [뉴스1]

30일 오후 7시쯤 전북 전주시 완산경찰서 1층으로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달아난 혐의(특수절도)로 긴급체포된 30대 용의자가 들어오고 있다. [뉴스1]

전주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친 30대 남성 2명은 경찰 수사 결과 지난 28일부터 사흘간 주거지인 충남 논산과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를 오가며 잠복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범행 당일에는 차량 번호판을 물 묻은 휴지로 가렸지만, 이전에 답사할 때는 차량판을 가리지 않아 주민들의 의심을 산 것으로 확인됐다. "이틀 전부터 주민센터 근처에서 못 보던 차가 있어서 차량 번호를 적어놨다"는 한 주민 제보가 이들을 검거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경찰, 30대 2명 '특수절도' 영장 신청
'얼굴 없는 천사' 성금 6000만원 훔쳐
2000년부터 20년째 6억여원 몰래 기부
사흘간 잠복…당일 차량서 8시간 대기
'못보던 차' 번호 적은 주민 제보 결정적

전주 완산경찰서는 31일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을 훔친 혐의(특수절도)로 긴급체포된 A씨(35)와 B씨(34)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지난 30일 오전 10시 7분쯤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주민센터 주변에서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상자를 통째로 차량(흰색 SUV)에 싣고 도주한 혐의다. 이들은 이날 오후 2시 25분과 2시 40분쯤 충남 계룡과 대전 유성에서 각각 검거됐다. 경찰은 주민센터 주변 폐쇄회로TV(CCTV)에 찍힌 용의 차량(흰색 SUV)을 추적해 주거지 인근에서 붙잡았다.  
 
이들은 범행 당일 자정 무렵 논산에서 출발해 오전 2시쯤 주민센터에 도착했다. 이후 '얼굴 없는 천사'가 나타난 오전 10시까지 8시간 동안 차량 안에서 기다린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전주에 오기 전 휴게소 화장실에 들러 화장지에 물을 묻혀 번호판을 가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전주에 올 때는 번호판을 가리지 않았다.  
 
30일 오후 7시쯤 전북 전주시 완산경찰서 1층으로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달아난 혐의(특수절도)로 긴급체포된 30대 용의자가 들어오고 있다. [뉴스1]

30일 오후 7시쯤 전북 전주시 완산경찰서 1층으로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달아난 혐의(특수절도)로 긴급체포된 30대 용의자가 들어오고 있다. [뉴스1]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논산 지역 선후배 사이다. A씨는 논산, B씨는 공주에 산다. B씨는 A씨 고교 1년 후배 동창으로 알려졌다.  
 
범행을 주도한 A씨는 논산에서 컴퓨터 수리업체를 운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경찰에서 "유튜브를 통해 '얼굴 없는 천사'의 사연을 알게 됐다"며 "컴퓨터 수리업체를 하나 더 차리려고 범행을 계획했다"고 말했다. A씨가 무직인 B씨에게 먼저 범행을 제안했다. 경찰은 A씨 휴대전화에서 '노송동주민센터'를 검색한 인터넷 기록을 확인했다.  
 
이름도, 직업도 알 수 없는 '얼굴 없는 천사'는 매년 12월 성탄절 전후에 비슷한 모양의 A4용지 상자에 수천만원에서 1억원 안팎의 성금과 편지를 담아 주민센터에 두고 사라졌다. 지난해는 12월 27일 오전 9시 7분쯤 주민센터 지하 주차장에 5000여만원이 든 A4용지 상자를 두고 갔다. 상자 안에는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힘내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힌 편지가 들어 있었다.
 
'얼굴 없는 천사'가 30일 오전 성금 6000만원이 든 상자를 두고 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뒤편 '희망을 주는 나무'. [연합뉴스]

'얼굴 없는 천사'가 30일 오전 성금 6000만원이 든 상자를 두고 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뒤편 '희망을 주는 나무'. [연합뉴스]

그는 지난 2000년 4월 초등학생을 시켜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중노2동주민센터에 보낸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남몰래 선행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까지 19년째 모두 20차례에 걸쳐 그가 두고 간 성금 총액은 6억834만660원이다. 그동안 그가 건넨 성금은 생활이 어려운 4900여 세대에게 현금과 연탄·쌀 등으로 전달됐다.  
 
도난 사건이 일어난 30일에도 오전 10시 3분쯤 노송동주민센터에 한 통의 익명의 전화가 걸려왔다. 40~50대로 추정되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얼굴 없는 천사'가 분명했다.  
 
'얼굴 없는 천사'는 "(성금이 든 상자를) 천사공원 내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놨으니 살펴 보세요"라고 짤막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직원들이 주민센터 뒤편에 있는 천사공원에 달려갔지만, 성금이 든 상자는 없었다. 이후 '얼굴 없는 천사'가 두세 차례 전화를 걸어 "성금을 찾았느냐"며 상자 위치를 재차 알려줬다. 직원들이 30분 넘게 주민센터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성금 상자를 발견하지 못하자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A씨 등이 여러모로 어수룩하고 범행 수법도 허점이 많다고 봤다. 두 사람은 동종 전과가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용의자 중 1명은 항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범행 당일 오전 10시 40분쯤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누군가 가져간 것 같다"는 주민센터 측의 신고를 받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다. 주민이 제보한 용의 차량의 차주는 A씨였다.    
 

'얼굴 없는 천사'가 30일 오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주변에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도주한 30대 용의자 2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은 이들에게 되찾은 성금. A4용지 박스에 5만원권 지폐 다발과 돼지저금통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사진 충남 논산경찰서]

'얼굴 없는 천사'가 30일 오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주변에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도주한 30대 용의자 2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은 이들에게 되찾은 성금. A4용지 박스에 5만원권 지폐 다발과 돼지저금통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사진 충남 논산경찰서]
경찰에 따르면 평소 A씨를 알고 있던 충남경찰청 소속 한 형사가 A씨에게 '너 어디냐. 지금 만나자'고 전화를 했다. 훔친 돈을 가지고 논산 쪽으로 도주하던 A씨는 화들짝 놀랐다고 한다.  
 
그는 훔친 성금을 B씨에게 맡기고 대전 유성에 있는 커피숍에 내려줬다. 그리고 계룡시 모처에서 해당 형사를 만났다고 한다. A씨는 처음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다가 형사가 집요하게 추궁하자 "내가 성금을 훔쳤다"고 자백 후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B씨는 체포 당시 커피숍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고 한다. 현금 6000만원이 든 성금 상자도 훼손되지 않은 채 발견됐다.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세요'라고 적힌 편지도 들어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용의자들이 도주 과정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훔친 돈을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10원 한 장도 안 썼다"고 했다. 
 
경찰이 확보한 A4용지 상자 안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100장씩 각 500만원) 12묶음과 동전이 담긴 돼지저금통이 들어 있었다. 세어 보니 6016만3210원이었다. 이것까지 포함하면 '얼굴 없는 천사'가 지난 2000년 4월부터 20년간 모두 21차례 기부한 성금 총액은 6억6850만3870원에 달한다.
 
경찰은 이번 도난 사건의 피해자를 '얼굴 없는 천사'가 아닌 노송동주민센터로 보고 회수한 성금을 전주시에 돌려줬다. "절도는 타인이 소유하거나 점유한 물건을 가져가는 것을 말하는데 '얼굴 없는 천사'가 성금 소유권을 주민센터에 이전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경찰 측은 설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2명 이상이 범행에 가담했기 때문에 특수절도 혐의를 적용했다"며 "일반 절도는 6년 이하의 징역과 벌금형이 있는데, 특수절도는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고 벌금형이 없어 처벌이 훨씬 무겁다"고 말했다. 경찰은 A씨 등이 범행에 사용한 차량 번호를 제보한 주민에게 포상금과 감사장을 줄 계획이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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