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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송금 받아 아이 컴퓨터 샀어요…힘 내십시오, 남편 동지”

아내의 편지로 본 해외 북한 노동자의 삶과 희망

지난 23일 러시아 극동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평양행 항공편을 기다리고 있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2397호에 따라 전 세계 모든 해외 파견 북한 노동자들의 송환 시한인 22일에 맞춰 러시아에서도 북한 노동자들의 철수가 이뤄지고 있다. [사진 강동완 교수]

지난 23일 러시아 극동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평양행 항공편을 기다리고 있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2397호에 따라 전 세계 모든 해외 파견 북한 노동자들의 송환 시한인 22일에 맞춰 러시아에서도 북한 노동자들의 철수가 이뤄지고 있다. [사진 강동완 교수]

지난 22일은 해외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에게 만감이 교차하는 날이었다. 오랜 기간 헤어져 있던 북한 가족과의 만남을 위해 평양행 고려항공편에 오르는 기쁨이 얼굴에 번졌고, 더 이상 외화벌이를 할 수 없게 된 안타까움도 함께 했다. 이날은 북한 정권의 돈줄을 죄는 유엔의 대북제재 조치에 따라 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는 해외 북한 노동자의 강제귀환 조치가 마무리되는 시한이다. 일각에서는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 파견된 노동자들의 경우 편법을 동원해 계속 체류하며 일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지만 상당수 인원은 평양 귀환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북한 체제가 해외노동으로 챙긴 달러를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이나 확산에 사용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취해진 귀환 조치로 노동자들의 삶은 물론 북한 민생에도 불똥이 튀게 됐다.
  

2년 전 미사일 도발로 자초한 제재
“29개국 10만명 5억 달러 외화벌이”
선발과 충성자금에 뇌물·상납 만연
중단되면 주민·간부 모두 팍팍한 삶

“편지도 찾고 돈도 받았어요. (아이가) 얼마나 기뻐하던지, 그 날로 컴퓨터도 사고 매일과 같이 해요. 난 보면서도 때려죽어도 못할 것 같은데, (아이는) 동무네 집에 가서 좀 하더니 이제는 조작할 줄 알더군요. 앓지 말고 건강하신지요. 여기서 매일 들려오는 소리가 로씨야에서 철수한다는 소리뿐이에요. 거기는 어떤지. 작년 8월부터 돌아오신다고 하니 한동안은 마음이 막 설레었어요. 의지의 화신, 불굴의 화신 000동지, 힘내십시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보낸 북한 아내의 편지다. 이역 땅에서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세대주’(남편의 북한식 표현)를 향한 그리움과 함께 건강을 염려하는 애틋함이 드러난다. 해외 노동을 통해 번 돈이 북한 가족에게 전달돼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는 밑천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도 있다. 남편을 ‘불굴의 화신’으로 치켜세우며 격려해주는 표현에서는 든든한 가장에 대한 아내의 존경심마저 느껴진다.
 
해외 노동으로 번 돈이 북한의 가족에게 절대적인 경제력이 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아내는 편지에서 “어쨌든 살기 힘든데 송금받고 한숨 좀 돌렸어요”라고 말한다. 또 “아직 남에게 빚은 없어요. 어떤 사람처럼 남에게 빚지고 먹고 살지는 않아요. 힘들어도 내 손으로 바득바득 살아가요. 그래도 정말 힘들 땐 당신이 보내주세요”라며 해외송금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어 아내는 “당신이 보내 준 돈을 정말 아껴가면서 맞춰나가요. 한쪽으로 내가 버는 게 겨우 밥술이나 뜰 정도예요”라며 근근이 살아가는 가정에 남편이 보내주는 돈이 큰 보탬이 되고 있음을 알린다.
 
이 편지를 받은 남편은 6년 동안 해외에 파견돼 고된 노동을 했다. 아이의 얼굴을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했다고 한다. 어쩌다 편지와 함께 사진이라도 들어있으면 몇 날 며칠을 들여다보며 그리움을 달랬다. 이 편지를 입수한 동아대 강동완 교수는 “한 통의 편지를 쓰는 동안 여유가 없었던 듯 뒷장으로 갈수록 글씨를 날려서 썼더라. 타국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연필심을 꼭꼭 눌러가며 쓴 편지를 보며 가슴이 울컥했다”고 전했다.
  
평양 귀환 줄이어
 
해외 파견 북한 노동자들의 송환일이 다가오며 북한 고려항공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는 평양행 항공편을 일시적으로 늘린 것으로 파악됐다. 23일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에서 ‘12시 20분 평양행 고려항공 JS-272편’ 탑승 수속을 안내하는 모습. [사진 강동완 교수]

해외 파견 북한 노동자들의 송환일이 다가오며 북한 고려항공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하는 평양행 항공편을 일시적으로 늘린 것으로 파악됐다. 23일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에서 ‘12시 20분 평양행 고려항공 JS-272편’ 탑승 수속을 안내하는 모습. [사진 강동완 교수]

북한 해외 노동자의 평양 귀환 시한을 막 넘긴 이번 주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은 평양행 비행기에 오르려는 사람들도 넘쳐난다. 북한으로 가져갈 짐과 선물 보따리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탑승 수속을 밟고 있는 장면이 이어진다. 주로 건설현장에서 일해온 남성 노동자와 함께 식당이나 봉제공장 등에서 근무한 여성들도 많이 눈에 띈다.
 
23일에는 낮 12시 20분 출발하는 고려항공 JS-272편을 포함해 하루 두 편의 고려항공이 운항됐다. 공항 측에 따르면 고려항공은 지난 9일부터 20일까지 2주간 평양~블라디보스토크 항공편 운항을 주 2회(월·금요일)에서 주 5회(평일 매일 운항)로 늘렸다. 현지 북한 노동자들의 철수를 위해서다. 북한은 이번 주 들어서도 임시 편성 고려항공기를 이용해 귀환을 도왔다.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현재는 북한 노동자 때문에 운항되고 있지만 노동자가 사라지면 노선도 없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 해외노동에 대한 대북제재 조치는 2017년 12월 결정됐다. 그해 김정은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으로 평가되는 ‘화성-15형’ 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등 잇단 도발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자초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해외 북한 노동자와 이들을 감독하는 북한 관리들을 2019년 말까지 전원 송환시키도록 한 대북제재 결의 제2397호를 채택했다. 실제 시행에 들어가는 시점은 결의안 채택 후 24개월이며 유엔 회원국은 내년 3월 22일까지 그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
 
우리 정부 당국은 해외 체류 북한 노동자가 약 10만 명인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동남아시아와 중동 등 29개 국가에서 연간 약 5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것으로 추산된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가 지난 16일까지 파악한 데 따르면 48개 국가가 북한 노동자 2만3000여 명을 돌려보냈다. 러시아가 1만8533명으로 가장 많았고, 카타르(2471명)와 쿠웨이트(904명)가 그 뒤를 이었다. 약 5만 명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중국의 경우 절반 이상을 돌려보낸 것으로 밝혔지만 구체적 숫자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 근로자 송환조치에 얼마나 협력할 것인지를 두고는 의견이 엇갈린다.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쪽에서는 전통적 우방인 중·러가 미국 주도의 대북제재 조치에 형식적으로 응하면서 실제로는 변칙적으로 북한 노동자를 계속 고용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는다. 중·러가 지난 16일 안보리에 제출한 문건은 북한 노동자의 송환 조항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중국의 경우 값싼 북한 인력을 활용해온 자국 내 기업의 입장을 고려해 단기 연수나 관광, 출퇴근 방식을 동원한 인력 활용을 용인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의 대북제재 조치에 어떤 식으로든 호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견해도 만만치 않다. 중국 외교부는 “결의가 유효한 한 중국은 국제적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규정에 따라 문제를 처리할 것”이란 입장을 밝혔고, 러시아 외무부는 “모든 유엔안보리 결의를 기한 내에 이행할 것”이라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과 무역전쟁을 치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나 트럼프 대통령과 이런저런 이유로 엮여있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 모두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 제재에서 이탈하는 건 부담이란 얘기다.
  
해외 파견 위해 3000달러 뇌물
 
북한 노동자 송환조치는 당장 일자리를 잃게 된 당사자뿐 아니라 그물처럼 얽힌 북한의 외화벌이 시스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은 해외 파견을 위해 약 3000달러의 뇌물을 간부에게 바친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파견의 경우 비행기 값 200달러에 뇌물을 더해 500달러 정도는 더 건네야 한다. 단체합숙을 하며 북·러 당국 간 합의에 따른 건설공사 등을 맡아 하는 ‘집체노동’의 경우 월급이 50달러 수준에 불과하다. 첫 파견 후 2년 정도는 이런 생활을 면키 어렵다.
 
하지만 러시아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되고 탈북 우려가 없는 것으로 검증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개인별로 러시아 업체 공사나 개인 주택 수리·보수에 나서 돈을 벌어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청부노동’으로 불리는 일을 하는 경우 1000달러 정도의 계획분(북한 당국에 바쳐야 하는 충성자금)을 바치면 나머지는 개인이 차지할 수 있다. 청부일을 하는 북한 노동자의 경우 러시아어로 ‘전기·난방·레몬트(리모델링)·집수리’라는 글귀와 핸드폰 번호가 적힌 명함을 뿌리기도 한다. 보다 많은 일감을 따내는 게 핵심인 만큼 오랜 기간 현지에서 청부노동을 하며 신뢰를 쌓은 귀국 노동자의 핸드폰은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한 북한 노동자는 “내가 속한 회사 300명 가운데 약 30여 명이 청부일을 했다”고 말했다. 이 경우 북한 회사의 대표나 고위 간부에게 일정한 뇌물을 줘야 한다. 해외 파견이 중단되면 노동자가 목돈을 쥘 기회가 사라진다. 인력 선발이나 현지 청부노동, 충성자금 갹출 과정에서 이권이나 뇌물을 챙기던 회사 대표와 지배인, 이들로부터 상납받아온 노동당 고위 간부들의 삶도 팍팍해질 수밖에 없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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