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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만난 마오쩌둥 “지금은 동풍이 서풍을 압도할 적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05>

정전협정 4개월 후 베이징에 도착한 김일성(왼쪽 둘째) 일행. 류샤오치(오른쪽 첫째),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주더, 천윈, 가오강, 덩샤오핑 등 중국 지도부가 총출동했다. 왼쪽 첫째는 북한 부수상 홍명희, 셋째가 노동당 부위원장 박정애. 1953년 11월 11일, 베이징역 귀빈실. [사진 김명호]

정전협정 4개월 후 베이징에 도착한 김일성(왼쪽 둘째) 일행. 류샤오치(오른쪽 첫째),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주더, 천윈, 가오강, 덩샤오핑 등 중국 지도부가 총출동했다. 왼쪽 첫째는 북한 부수상 홍명희, 셋째가 노동당 부위원장 박정애. 1953년 11월 11일, 베이징역 귀빈실. [사진 김명호]

1949년 말, 마오쩌둥의 첫 번째 모스크바 방문은 단출했다. 수행원도 비서와 통역, 소수의 경호원이 다였다. 음식은 거칠고 숙소도 신통치 않았다. 마오는 스탈린이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게 집착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1958년 모스크바서 두 차례 회동
중국지원군 북한 철수에 합의

중국·소련과 관계 개선한 김일성
연안파 간부와 친소 세력 철퇴

중국지원군 북한 철수 시작되자
마오 “진먼다오 포격 재개하라”

둘 사이 떼어놓기 위해 억지를 부렸다. 뜻을 이룬 것도 미국의 정책 변화 때문이었다. 6·25전쟁 참전 덕에 스탈린의 인정을 받기는 했지만, 소련은 군수물자 지원에 인색했다. 철석같이 믿었던 공군 지원도 말뿐이었다. 얄타협정 핑계 대며 하는 시늉만 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지원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속이 끓어도 상대가 스탈린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마오, 스탈린과 장제스 틈 벌려
 
한국전선 시찰 나온 푸젠군구 사령관 예페이(葉飛·오른쪽 첫째). 훗날 진먼다오 포격전을 지휘했다. 1951년 10월, 평안북도 회창군. [사진 김명호]

한국전선 시찰 나온 푸젠군구 사령관 예페이(葉飛·오른쪽 첫째). 훗날 진먼다오 포격전을 지휘했다. 1951년 10월, 평안북도 회창군. [사진 김명호]

1957년 11월, 두 번째 방문은 소련 혁명 40주년 경축연과 세계 각국 64개 사회주의 정당 대표 220명이 참석하는 회의 참가였다. 그중 12명은 당과 정부의 최고지도자들이었다. 국제주의자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개성은 제각각이었다.
 
흐루쇼프에게 마오쩌둥은 최고의 귀빈이었다. 격에 맞는 예우를 했다. 마오의 숙소만 크렘린으로 안배했다. 침실도 러시아 여황(女皇) 예카테리나가 자던 방이었다. 다른 나라 지도자들은 크렘린 주변 호텔에서 묵었다. 발언할 때도 인쇄한 원고를 회의 주석단에 제출하고 연단에 서서 했다. 마오는 예외였다. 원고 없이 자리에 앉아서 즉석 발언했다.
 
회의장은 소련 칭송 일색이었다. 뒤로는 달랐다. 모였다 하면 헝가리 사태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소련의 출병에 입을 모았다. 남의 나라 일에 간섭이 심하고 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마오쩌둥은 공감했다. 2년 전 북한에서 발생한 8월 종파사건 이후 소련에 기대있던 김일성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지원군 철수 6주일 후, 남일(오른쪽 첫째)과 박정애를 대동하고 중국을 방문, 지방에 체류 중인 마오쩌둥과 회합한 김일성. 1958년 12월 6일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 [사진 김명호]

지원군 철수 6주일 후, 남일(오른쪽 첫째)과 박정애를 대동하고 중국을 방문, 지방에 체류 중인 마오쩌둥과 회합한 김일성. 1958년 12월 6일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 [사진 김명호]

모스크바회의 기간 마오쩌둥은 김일성과 두 번 만났다. 북한에 주둔 중인 중국지원군을 전원 귀국시키겠다며 이유를 설명했다. “레닌은 무슨 일이건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지금은 동풍(東風)이 서풍을 압도할 적기(適期)다. 미국도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 사이는 좋은 일이 더 많았다.” 한동안 어색했던 일들은 시시콜콜 따지지 말자는 의미였다. 김일성은 마오의 생각이 변했다고 직감했다. 10개월 전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소련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지원군 주둔에 관한 중국과 소련의 입장은 차이가 없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에 계속 주둔해야 한다. 조선 인민과 모든 사회주의 진영의 이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의아했지만 잠시였다. 즉석에서 동의하고 감사를 표했다. 귀국과 동시에 회의를 열었다. 마오쩌둥에게 전문도 보냈다. “노동당 중앙도 지원군 철수에 찬성했다” 며 실시 방안을 제시했다. “조선 정부가 한반도에 주둔하는 지원군과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면 중국은 조선의 의견을 지지하고 1958년 말까지 철수를 완료하면 된다. 소련에는 중국 측에서 통보해라.”
 
1958년 1월 8일 저우언라이가 베이징 주재 소련대사에게 지원군 철수를 통보했다. 1주일 후 소련 외교부로부터 “영명(英明)한 결정”이라는 답신을 받았다. 2월 5일 북한이 성명을 발표했다. “모든 외국 군대가 동시에 북조선과 남조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한다. 전 조선이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 평화통일이 실현되기를 갈망한다.” 이튿날 중공 중앙은 전국의 성, 시, 자치구, 각 부처, 국가기관, 인민단체, 각 군구, 지원군 당 위원회에 지시했다.  
 
“지난해 소련을 방문했던 마오 주석이 김일성에게 미 제국주의를 타격하고 국제정세를 완화하기 위해 지원군 철수를 준비하겠다고 천명(闡明)했다. 국내외의 거대한 반응이 예상된다. 각 지역 당 위원회는 이미 발표했고 앞으로 발표될 문건들의 정신을 숙지해서 선전에 힘써라.” 중국 정부의 성명은 당보다 하루 늦었다. 우리가 보기엔 좀 민망한 내용이라 소개는 생략한다.
  
김일성, 김두봉·김원봉·조소앙 숙청
 
정전 직후의 개성 모습. [사진 김명호]

정전 직후의 개성 모습. [사진 김명호]

중국과의 관계개선으로 김일성은 자신이 넘쳤다. 2년 전 가볍게 손봤던 연안파 간부와 친소 세력에 맘 놓고 철퇴를 가했다. 구금 중인 김두봉을 순안 농장으로 쫓아버렸다.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등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내친김에 김일성에 불만이 많던 김원봉과 조소앙도 제거해버렸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행동을 칭찬했다. “1956년 중국과 소련은 조선의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까지 파견한 적이 있었다. 뜻은 좋았으나 결과가 안 좋았다. 방법이 틀렸기 때문이다.” 1958년 2월, 지원군 철수를 구체적으로 협의하기 위해 북한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저우언라이는 마오보다 더 김일성을 감쌌다. 이름까지 거론하며 최창익과 박창옥을 비판했다.
 
지원군 철수가 시작되자 마오쩌둥은 대만해협에 눈길을 줬다. 푸젠(福建)군구에 지시했다. “유보 중인 진먼다오(金門島) 포격을 재개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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