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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칼럼] 진보라 쓰고 퇴보라 읽는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12년 2월 미국 뉴욕 타임스는 1면에 대형 마트인 ‘타깃’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한 남성 고객이 왜 자신의 딸에게 출산 준비물과 유아용품을 담은 마케팅 홍보물을 보냈느냐고 화를 냈다. “아직 고등학생인데, 임신을 부추기는 거냐”며 따졌다. 며칠 뒤 타깃의 매니저가 사과 전화를 걸자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그 단골손님은 “딸이 임신한 걸 뒤늦게 알게 됐다”며 오히려 미안해 했다. 어떻게 타깃은 부모도 모르는 비밀을 먼저 알았을까. 빅 데이터 분석을 통해 평소 사지 않던 칼슘·마그네슘 영양제를 구매하는 등 전형적인 임산부 쇼핑 행태를 파악한 때문이다. 보도가 나가자 당장 “기업들이 빅 브러더가 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들끓었다. 하지만 민주당의 오바마 정부는 거꾸로 보름 뒤 ‘빅 데이터 이니셔티브’를 밀어붙였다. 빅 데이터의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혁신에 저항하는 좌파 진보 진영
국제 흐름 외면한 위정척사 닮아
‘선 시행-후 보완’의 선진국 보며
아마추어 이념실험 내려 놓아야

요즘은 굴뚝 산업도 데이터 기술을 이용해 첨단기업으로 변신한다. 세계 1위 농기계 업체인 미국의 존 디어. 대장장이 출신의 존 디어가 182년 전에 세운 유서 깊은 기업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 인공지능 벤처인 블루리버를 3억 달러에 인수해 카메라를 장착한 새로운 트랙터를 선보였다. 이 트랙터는 영상 데이터로 토양의 상태와 잡초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본사 서버와 머신러닝을 통해 딱 필요한 만큼의 제초제와 비료를 뿌려 생산비용을 최대 70%까지 아꼈다. 이른바 정밀 농업이다. 환경을 보호하고 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빅 데이터의 힘이다.
 
한 방울의 피로 암을 조기 진단하는 액체 생검도 요즘 주목받는 첨단 기술이다. 암세포에서 떨어져 나와 혈액 속에 떠다니는 핵산 등 순환암세포(ctDNA)를 검출해 빅 데이터로 분석하는 것이다. 지난 5월 미국 유전자 분석업체인 일루미나의 자회사 그레일은 임상종양학회에 놀라운 보고를 했다. 액체생검을 통해 어떤 암인지 94%의 확률로 맞혔고, DNA에 붙은 메틸기의 패턴 차이를 이용해 최초 암 부위도 정확히 예측했다는 것이다. 현재 10만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이 성공하면 암 발생 이전이나 아주 초기 단계부터 암을 진단해 맞춤형 항암제를 투여할 수 있다. 말기 암 환자와 비교하면 생존율이 훨씬 높고 의료 비용도 10% 밑으로 낮출 수 있다. 빅 데이터의 힘이다.
 
전 세계의 데이터 혁명이 아찔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서울대 공대 차상균 교수는 “인공지능과 사물 인터넷, 클라우드 등 4차 산업혁명의 모든 핵심연료는 데이터”라며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 속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2~3년뿐”이라고 말한다. 지난달 21일 네이버의 라인과 일본 소프트뱅크 자회사 Z홀딩스의 통합식도 잔치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침울했다. “두 모기업을 합해도 시가총액이 130조원인데, 1000조원 몸집의 구글·애플·아마존과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걱정”이라는 위기의식이 지배했다.
 
하지만 데이터 혁명을 향한 국내 분위기는 여전히 어수선하다. 무엇보다 좌파 진영의 조직적인 반대가 문제다. 여야 원내대표가 데이터 3법을 통과시키기로 합의했지만 참여연대와 민주노총·민변·건강과대안 등은 끝까지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기업들이 돈벌이 수단으로 악용할 ‘개인정보 도둑법’”이라며 “빅 브러더처럼 우리를 조종하고 감시할 것”이라며 막연한 공포를 부추긴다. 돌아보면 진보 진영은 온갖 혁신 사업들의 뒷덜미를 잡아 주저앉혔다. 원격 의료도 반대하고, 인터넷 은행도 반대했다. 공유경제인 ‘타다’도 반대하고, 규제 샌드박스까지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는 “무분별한 규제 완화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 공익적 가치를 침해할 우려가 크다”는 말만 반복한다. 못 말리는 억지다.
 
진보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카를 마르크스다. 마르크스는 저급한 생산양식에서 고급 생산 양식으로 옮겨가는 것을 진보라고 말했다. 근대 이후 진보는 줄곧 발전적·개혁적·혁신적·미래 지향적이었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지금 이대로!”를 외치면서 혁신적인 기술에 저항하는 이 땅의 좌파는 더 이상 진보라 하기 어렵다. 국제 흐름과 담쌓고 자폐적 이념과 가치에 집착하는 게 어쩌면 편벽한 위정척사와 닮은꼴이다. 아예 민주노총·전교조 등은 지대 추구형 기득권층이 돼 버렸다. “한국의 좌파는 구한말 위정척사파에 맥이 닿아 있다”는 함재봉 전 아산정책연구원장의 분석이 빈말이 아닌듯싶다.
 
이제 진보 진영은 국정 주도 세력이다. 운동권 시절처럼 아마추어적 좌파 실험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지금은 안방에서 인터넷으로 뉴욕·홍콩 주식을 ‘직구’하는 시대다. 데이터도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든다. 4차 산업혁명은 누가 더 많은 양질의 데이터를 확보하느냐로 결판난다. 서둘러 미국 오바마 정부의 데이터 이니셔티브처럼 사소한 부작용은 각오하고 글로벌 경쟁에 올라타야 할 때다. 좌파 진영이 이런 흐름에 눈을 감으면 진보라 쓰고 퇴보라 읽을 수밖에 없다. 미국·중국·일본 등이 앞다투어 데이터 시대에 몸을 던지고 있다. 부작용이 나타나더라도 과감한 ‘선(先) 시행-후(後) 보완’의 승부수가 이들의 공통분모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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