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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의 시선] ‘경계의 담장’을 기억하라

김승현 논설위원

김승현 논설위원

‘경계의 담장’은 대한민국 국민에겐 쉽게 잊히지 않는 표현이다. 2016년 11월 4일, 최순실이 구속된 다음 날,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어렵사리 내놓은 대국민 담화의 클라이맥스였다. 절절한 반성문에도 국민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다만, 불과 3년여 전 역사는 ‘농단의 서막’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되새기는 경구(警句)로 남았다.
 

국정농단 서막은 대통령의 인연
춘풍추상은 내로남불로 변질돼
대통령이 서릿발같은 해법 내야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가족 간의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내왔습니다.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들을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서 오랜 인연을 갖고 있었던 최순실씨로부터 도움받게 됐고 왕래하게 됐습니다.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췄던 것이 사실입니다. 돌이켜보니 개인적 인연을 믿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에게 엄격하지 못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렵고 서글픈 마음까지 들어 밤잠을 이루기도 힘이 듭니다…”
 
한때 ‘원칙과 신뢰’의 지도자라 불렸던 박 전 대통령은 무너진 경계의 담장을 원망하며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라고 울먹였다.
 
제왕적인 한국 대통령제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 초부터 ‘경계의 담장’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춘풍추상(春風秋霜)’을 청와대 직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지난해 2월 청와대 비서관실에 춘풍추상이 적힌 액자를 돌렸다. 올 1월 임명된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도 일성으로 “비서실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이 되새겨야 할 사자성어라고 생각하며 실장이 됐든 수석이 됐든 비서라는 것을 잊지 않겠다”고 했다.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대하되, 자신에겐 가을 서리처럼 차갑고 엄격해야 한다’는 문재인 식(式) 경계의 담장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 안타깝게도 지금의 청와대는 그 정반대 의미를 가진 말로 수식되고 있다. 바로 ‘내로남불’이다. 경계의 담장을 지키는 파수꾼인 민정수석실이 담장 붕괴의 선봉에 선 것도 아이러니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공정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조로남불’ 행태로 경계의 담장에 큰 구멍을 냈다면, 청와대 하명수사 의혹과 감찰 무마 의혹은 점점 등급이 높아지는 태풍처럼 담장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청와대 내부에서 ‘서릿발’이 날렸다는 얘기가 들려온 적은 없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문제의 사건마다 문 대통령의 ‘개인적 인연’이 엮여있다는 점이다. 청와대 하명 수사 의혹의 ‘수혜자’격인 송철호 울산시장은 문 대통령이 스스럼없이 ‘형’으로 부르는 사이다. 자신의 권유로 정치에 뛰어들고 울산에서 6번 낙선한 송 시장을 “바보 노무현보다 더한 바보 송철호”라고 부를 정도로 애틋한 관계라고 한다.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은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 시절의 비리 의혹에 대한 감찰을 누군가 무마시켰다는 의혹에 휩싸인 상태다. 그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발탁돼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친노·친문 핵심과 인연을 맺었고 문 대통령을 ‘재인이 형’이라 부를 수 있는 ‘실세’로 거론됐다. 그 덕분인지 금융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다 조용히 자리를 옮겼고 결국 구속됐다.
 
지켜보는 국민은 불안하기만 하다. ‘혹시 문 대통령도 개인적 인연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에게 엄격하지 못한 결과에 이른 게 아닌지’라는 ‘경험적 의심’이 들어서다. 국가기관의 판단까지 엇갈리고 있다. 하명 수사 의혹을 받는 황운하 대전지방경찰청장(전 울산지방경찰청장)은 최근 SNS에 “경찰의 정상적인 부패 비리 수사에 대해 존재하지도 않는 하명수사니 선거개입 수사니 하면서 틀을 짜놓고 억지로 몰고 가보려는 검찰과 정치권, 일부 언론의 무분별한 행태에 분노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당시 경찰에 여러 차례 보완 수사를 지휘한 울산지검은 이미 지난 3월에 작성한 99쪽짜리 불기소 결정서에서 “수사의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시비, 그리고 수사권 남용 논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수사”라고 지적했다. 당시 민정수석실 실무자들은 지금 감찰 무마 의혹과 관련, 윗선의 비위를 계속 폭로하고 있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국민을 붙잡아 줄 사람은 단 한명, 대통령뿐이다. 최고 권력 주변에서 벌어진 의혹에 추상같은 진상 규명을 명해야 한다. ‘경계의 담장’을 견고하게 복구했다고 국민을 안심시키고 국정 동력을 살려야 한다. 방치와 방관으로 무너진 담장 앞에서 절망하는 대통령을 국민은 다시 보고 싶지 않다.
 
김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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