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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 잘 그린 마광수, 밤새 홍대앞 돌다 88짜장면집으로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젊은 시절의 마광수 연세대 교수. [중앙포토]

젊은 시절의 마광수 연세대 교수. [중앙포토]

2년 전 마광수(1951~2017)의 갑작스러운 부고가 전해졌다. 파격적인 행보의 마광수는 사람과 사건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가 재직했던 홍익대와 연세대에는 그를 따르는 학생들이 많았다. 학교 바깥에도 팬들이 많았다. 돌발적인 발언과 문필활동으로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다. 소설  『즐거운 사라』는 급기야 외설 시비를 불렀고 이로 인해 그는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림엔 거침없는 발색, 진솔한 감정
이대앞·신촌 술집 비주류 문화 탐닉

파리 골목 쏘다니듯 여기저기 출몰
볼 앤 체인, 비 풀, 발전소 등 찾아
심야식당은 예술인들로 왁자지껄

마광수는 그림을 잘 그렸다. 필선의 속도감과 거침없는 발색에 감정을 솔직하게 담았다. 속건성의 아크릴릭 물감은 현대판 문인화를 추구하던 그의 속필에 제격이었다. 1994년 압구정동의 갤러리 다도에서 그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개인전을 준비한 시간은 한두 달여에 불과했다. “‘그리움’의 경우는 먼저 무작정 나무 두 그루를 그려놓고 보니 강변의 나무가 더 멋있을 것 같아 강을 그려 넣었고, 이왕이면 노을 진 강변이 좋을 것 같아 하늘을 붉은빛으로 칠했다. 최종에 가서는 풍경만으론 아무래도 싱거운 것 같아 여자 한  명을 그려 넣었다. 다 그리고 보니 여자가 떠난 님을 그리며 노을 진 강변에 서 있는 듯하여 ‘그리움’이라고 제목을 붙였다(당시의 개인전 서문 중에서).” 작품 ‘그리움’은 주변의 칭찬도 많았고 본인이 보기에도 흡족하였는지 판화로 재제작됐다.
  
춤추지는 않았지만 자유로운 공기 즐겨
 
마광수는 밤늦게까지 학교 근처의 이대앞, 신촌, 홍대앞 일대를 배회했다. 혼자일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팬과 학생들이 그를 따랐다. 이대앞 그린하우스 골목 2층의 LP카페 ‘볼 앤 체인’은 혼자 갈 때가 많았다. 이 가게의 손님은 중년의 교양인들이 대부분이다. 마광수는 비슷한 나이의 여주인과 친했다. 그는 "볼 앤 체인, 이름이 얼마나 에로틱한가! 죄수가 차는 족쇄와 사슬을 가리키는 말인데, 사도마조히즘을 연상시켜 주어 무척이나 도착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수필, 나는 탐미주의자)고 했다. 점잖은 분위기를 깨고 순진과 도전이 반반인 표정의 젊은 여대생들이 가끔 틈입했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인 도발적인 매력의 사라가 갑작스레 등장한 듯, 기분 좋은 긴장감을 주는 카페였다.
 
젊은 학생들이나 팬들과 대동할 때면 신촌기차역 앞의 ‘비 풀’을 찾았다. 이곳은 손님과 연주자가 함께 격정적인 리듬에 어깨를 들썩이기도 하는 라이브카페다. 손님으로는 뮤지션들과 이들을 스카우트하려는 음반시장 관계자들이 많았다. 실력과 끼를 겸비한 손님들은 흥을 이기지 못하고 무대에 올라 즉흥연주를 하곤 했다.
 
마광수는 홍대앞을 좋아했다. 교수생활을 홍대에서 시작했기에 이 일대가 익숙하고 편안했다. 미술대학이 중심인 홍대 특유의 도전적이고 비주류적인 문화를 좋아했다. 초기의 홍대앞 분위기는 미국에서 돌아온 유학생들과 과소비문화가 결탁한 강남의 오렌지족 문화에 대항하는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주도했다. 거대자본이 침투하기 이전이라서 경제가 빠듯한 젊은이들도 저렴하게 나름의 문화를 즐길 수가 있었다.
 
마광수(오른쪽)와 대광고 동문인 화가 김용철(가운데)과 송윤희(왼쪽). [사진 김용철]

마광수(오른쪽)와 대광고 동문인 화가 김용철(가운데)과 송윤희(왼쪽). [사진 김용철]

그 시발점은 극동방송국 앞의 4층 빌딩 지하의 록카페 ‘발전소’였다. 맥주를 마시며 춤을 추는 곳이었다. 홍대 출신의 20대 조각가 송긍화가 자신의 작업실을 카페로 개조했다. 신촌 일대의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강남의 유명 연예인들까지 대거 발전소라는 새로운 감각, 획기적인 공간을 찾아왔다. 마광수는 춤을 추지는 않았지만 이런 감각 속에 몸을 오롯이 던져놓는 걸 좋아했다.
 
발전소를 필두로 여러 개성적인 록카페들이 생겨났다. 시인 하재봉이 주도하는 황금투구에는 아직 무명인 배우 최민식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연극배우 심철종과 황신혜 밴드의 김형태가 주도한 곰팡이에는 산울림의 김창완이 즉석공연을 했다. 도회적 감성의 마광수가 이런 곳을 놓칠 리 없었다.
 
산울림극장 쪽은 분위기가 좀 차분했다. 극장 왼쪽 길모퉁이 지하에는 ‘광화문연가’ 등을 작곡한 작곡가 이영훈이 운영하는 카페가 있어 작곡가, 연주가 등 대중음악가들이 진을 쳤다. 가수 김수철과 김광석이 드나들었다. 둘 다 홍대앞 주민들이었다.  
  
윤시내 ‘몬테카를로의 추억’이 애창곡
 
산울림극장에서 와우교를 건너기 전 오른쪽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에 까페 ‘··라고 한다’가 있었다. 층고가 상당히 높았다. 김경식·홍록기·이동우·표인봉·이웅호 등 방송 데뷔 전의 틴틴파이브가 거의 매일 밤 이곳에 모여 맹연습을 했다.
 
1990년대의 홍대앞은 골목마다 화양연화였다. 파리의 골목들을 쏘다니며 플라뇌르(산책자) 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보들레르처럼 마광수는 홍대앞의 여기저기를 탐하듯 쏘다녔다. 밤이 깊어지면 미술·음악·무용·연극·문학 등 각 장르를 망라하는 홍대의 수많은 예술공동체 시민들이 모이는 데가 따로 있었다. 산울림극장에서 신촌으로 빠지는 사잇길에는 하루에 몇 번씩 경의선 화물열차가 지나갔다. 그때마다 건널목 차단봉이 내려오면서 땡땡땡 종을 울렸다고 땡땡거리라 했다. 이 길 중간의 88짜장면집에 예술공동체 시민들이 다 모였다. 마광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예술공동체 시민들의 사랑방 격인 88짜장면집은 새벽까지 문을 여는 심야식당이었다. 주인은 마산상고 야구부 유격수 출신으로 중키에 몸이 날렵했다. 낮에는 자전거를 타고 신촌 일대를 돌면서 음식재료를 사서 나르고 저녁에 가게 문을 열었다. 다변의 마산 사투리로 손님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기를 즐겼다. 간혹 매너가 나쁜 손님이 나타나면 단호하게 쫓아내기도 했다. 당시는 정부에서 심야식당을 금지할 때였는데 어찌 된 셈인지 이 집만은 밤새 영업을 했다. 홍대앞의 심야족들은 다들 이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짜장면, 우동뿐 아니라 도토리묵, 부침개 등 소박한 안주를 갖추었다. 손님들은 밤참에 소주, 맥주를 찾았다.
 
홍대앞은 많은 예술가들의 연습실이자 주거지였다. 야행성 체질의 가수 김수철, 권인하, 연극인 심철종, 이호성, 시인 하재봉, 현대무용가 이지언, 화가 겸 가수 김형태, 국악연주자 원일, 행위예술가 김백기, 조각가 김일용, 이일호, 철학자 조광제 등이 늦은 밤 이 식당에 출몰했다.
 
발전소, 명월관, 황금투구, 곰팡이 등의 록카페에서 춤을 추다 허기를 느껴 찾아오는 젊은이들은 물론 영업을 마친 록카페의 주인과 종업원도 이 식당으로 다 모였다. 물론 마광수도 자주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다. 그는 특별히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장르가 전혀 다른 예술인들끼리 인사를 나누며 금방 친해졌다. 늘 어수선한 열기로 가득찬 심야식당이었다. 여명이 찾아오면 그들은 외상장부만을 남겨놓은 채 어디론가로 다 사라졌다.
 
마광수는 바싹 마른 몸매에 비해 목소리가 크고 기름졌다. 윤시내가 불렀던 ‘몬테카를로의 추억’은 그의 애창곡이었다. 후렴부 ‘못 잊을 블루스 붐바 붐바 붐바’에 오면 왠지 허전하고 슬픈 목소리가 되었다. 그는 누구나 읽기 쉬운 글을 쓰려고 노력했지만 세상은 그를 불편하고 어렵게 대하였다. 세상은 윤리라는 이름의 볼 앤 체인을 그의 발목에 묶었다. 스스로 택한 죽음이 오랫동안 그를 묶었던 볼 앤 체인을 풀어 주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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