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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의 시선] ‘논두렁 시계’를 ‘재갈’로 이용하지 말라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회갑 선물로 억대 시계 두 개 선물했다고 진술했다는데, 맞습니까?” 내가 물었다. “뭘 그런 것까지 쓰려고 합니까?” 검찰 간부가 답했다.
 

노 전 대통령 측근 ‘수수’는 인정
폐기 방법 보도는 부차적인 부분
권력층 뇌물 감시는 언론의 역할

100% 컨펌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맞는다는 얘기였다. 그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피의사실을 유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회갑’ ‘억대’ 등의 팩트를 들이대며 묻는데, “사실무근”이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2009년 4월 중순의 이야기다. 전날 후배 L이 당시 법조팀장인 내게 “박연차가 노통에게 회갑 선물로 각기 1억원 정도의, 남녀용 한 쌍으로 된 피아제 시계 세트를 선물했다고 진술했다고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취재 소스에 대해서는 “취재원”이라고만 말했다. 누구냐고 캐묻지 않았다. ‘취재원 보호’는 한 언론사 기자끼리도 존중해야 할 원칙이다.
 
나와 후배 K는 검찰 간부를 상대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뭘 그런 것까지’가 얻은 최대한의 답이었다. 전직 대통령 뇌물 의혹인데, 그 정도로 기사를 쓸 수는 없었다. “줬다”는 진술이 있다고 해서 “받았다”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었다. 후배 P에게 부산의 고급 시계방 취재를 맡겼는데 용케도 박연차씨 단골 상점을 찾아냈다. 주인이 “박 회장이 명품 시계를 여러 차례 사 갔고, 피아제 세트를 판 적도 있다”고 말했다. 박씨 진술의 신빙성은 커졌으나 그 시계가 노 전 대통령에게 전달됐다는 보장은 없었다.
 
후배 K가 노 전 대통령 변호인에게 전화로 사실 여부를 물었다. 그 변호인이 문재인 대통령이다. K는 “문 변호사가 ‘나를 상대로 유도신문하는 겁니까?’라며 매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고 보고했다. 노 전 대통령 측근들의 훗날 증언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그때까지 시계 선물에 대해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수수 여부’를 확인할 방법에 대해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며칠을 보냈다. 그러던 차에 KBS(4월 22일)에 ‘박연차 노(盧) 부부에 명품 시계 2개 선물’이라는 제목의 리포트가 나왔다. 첫 문장이 “2006년 9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은 노무현 당시 대통령 측에 고가의 명품 시계 2개를 건넸습니다”였다. 그 뒤에 “박 회장은 검찰에서 노 전 대통령의 회갑을 맞아 선물용으로 2억원을 들여 시계를 선물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KBS가 무엇을 근거로 “건넸다”고 확신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별도로 취재한 무엇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보도는 “진술이 나왔다”에 그쳤다. 후배 L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박씨 진술 전달 수준으로 기사를 써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8일 뒤 노 전 대통령은 검찰에 출석했고, 5월 13일에 SBS가 “노 전 대통령은 권 여사가 자기 몰래 시계를 받아 보관하다가 박 전 회장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시계 두 개를 모두 봉하마을 논두렁에 버렸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10년째 논란인 이른바 ‘논두렁 시계’ 리포트다.
 
노 전 대통령 진술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수사기록이 봉인됐기 때문이다. 2년 전 유시민씨는 “박(연차)씨가 노건평씨를 통해 권양숙 여사에게 시계를 전달했는데, 뒤늦게 그 사실을 안 노 전 대통령이 화를 내며 시계를 망치로 깨서 버렸다고 들었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김경수 경남도지사는 “(노 전 대통령이) 검찰 조사에서 ‘없애버렸다’고만 진술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인규 당시 대검 중수부장은 “노 전 대통령이 ‘바깥에 버렸다’고 진술했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이 수수를 인정했다는 것에는 말이 일치한다. 남은 것은 ‘망치로’ ‘바깥에’ ‘논두렁’ 중 무엇이 맞느냐는 것이다. 설사 ‘논두렁’이 틀린 정보라고 해도 SBS 보도를 가짜뉴스라고 볼 수는 없다. 노 전 대통령을 조롱하는 리포트라고 보기도 어렵다. “망치로 깨서 버렸다” 또는 “바깥에 버렸다”고 보도했다면 전직 대통령의 품위가 지켜졌을까?
 
당시 검찰 담당 기자들이 시계 문제를 취재했던 것은 노 전 대통령의 혐의와 관련된 예민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박연차씨 돈 500만 달러는 노 전 대통령 부부에게 직접 건네진 것은 아니었다. 반면 시계는 포괄적 뇌물 혐의로 검찰이 기소할 경우 재판에서 유·무죄를 가를 사안이었다. KBS·SBS 보도에 흠결이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논두렁 시계’를 거론하며 검사와 기자의 만남을 차단하고,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여권의 의도는 불온하다. 대통령과 그의 가족은 기업인으로부터 고가의 선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언론엔 그런 문제를 취재하고 보도할 의무가 있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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