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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모자라고 고마운 일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그저께 지인으로부터 싸락눈이 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곳곳에서 찬바람이 새매처럼 매섭게 불어온다.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더욱 여몄다. 올해도 한 달이 남지 않았다. 먼 산에 단풍이 든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한 해의 끝이라니. 계절이 인심을 재촉한다. 학명 스님은 “묵은해니 새해니 구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시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라고 읊었는데, 하루와 열흘 그리고 한 달과 절기를 따지고 사는 나 같은 이에게는 이 시간이 물처럼 신속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올해 마지막 달 맞은 소회 남달라
부족하고 넘치게 받은 일들 많아
이 순간순간들이 꽃을 주는 시간

한 해의 끝에서 올해의 경과를 돌이켜보니 펼쳐놓았던 대소사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 일들은 강가에서 주워온 각양각색의 돌 같고, 들길에서 꺾은 야생화 같고, 또 어떤 일은 주머니의 송곳처럼 날카롭고, 또 어떤 일은 아직 잉걸불 같아서 뜨거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음이 활짝 열리는 환호의 때가 있었고, 슬픔에 주저앉았던 때가 있었다.
 
어떤 사람과는 연락이 두절되었고, 잊고 살았던 사람으로부터는 연락이 새로이 닿았다. 병이 와서 지나갔고, 또 누군가의 부음을 받았다. 서로에게 오해가 일어났고, 아직까지도 엉킨 매듭이 풀리지 않은 일이 있었다. 지칠 때는 빈방에 혼자 있고만 싶었던 때가 있었다. 대부분은 하루 동안 오고가는 곳이 정해져 있었지만, 멀리 갔다 늦게 돌아오기도 했다. 홀로 생각을 깊게 하거나 시를 짓는 시간이 줄었다. 해서 시를 많이 얻지 못했다. 음성이 커졌다고 뉘우쳤다. 어쨌든 이 모든 일들이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다.
 
조병화 시인은 시 ‘남남·30’에서 “열어도 열어도 모자라는 마음/ 보여도 보여도 모자라는 마음/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는 마음”이라고 썼다. 모자라는 마음이, 미흡한 마음이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도 있다. 한편으론 고맙고 다행스럽고 나아진 일도 없지 않았다. 줄 줄을 알게 되었다. 받으려고만 하지 않고, 나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었다. 비록 크고 푸짐한 것이 아니더라고 속마음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국밥과 술을 대접했고, 한 끼를 먹고선 아주 잘 먹었다고 인사를 깍듯하게 했다. 평범하지만 정이 많고 마음이 선하고 베풀면서 사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난 일도 행복했다. 아프지 않고 욕심부리지 않고 걱정 없이 잠시 앉아 있는 때가 부자(富者)가 되는 순간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시골의 초등학교 동무들을 만난 일도 잊지 못하겠다. 이름을 바꾸고 나이가 들었어도 수줍어하고 짓궂게 장난을 하던 옛 얼굴이 남아 있었고, 그 때문에 옛 교실과 옛 운동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저 옛날에 겪었던 저녁의 분위기를 다시 되찾았고, 또 옛 맛에 감격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옛 시간의 어떤 일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이 시구는 김수영 시인의 시 ‘꽃잎 2’의 일부이다. 고뇌만 있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험난할 것이다. 꽃과 같은 시간, 뜻밖의 시간, 조금 전과는 다른 시간이 우리에게는 있다. 그리고 꽃을 가져다주는 시간은 매시간에 있다. 과거에도 지금의 삶에도 그리고 다가올 내일의 시간에도 그것은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때로는 기로에, 때로는 이별과 외로움 속에, 때로는 은은한 미소 속에.
 
어제는 한 잡지를 펼쳐보다가 임술랑 시인의 시 ‘있을 뿐이다’를 만났다. “나도 여기 있을 뿐이다/ 울릉 도동항 바라보며/ 있을 뿐이다/ 누가 이야기했는가/ 이 많은 세상의 삶에 대해서/ 단편소설도 쓰고/ 장편 소설도 쓰고/ 어떤 이는 수기도 썼는데/ 나는 그냥 여기 있을 뿐이다/ 맑은 날에는 멀리 독도까지 보인다는/ 망향 봉 꼭대기에서/ 그냥 있을 뿐이다/ 바다는 막막하고/ 인생은 어디에서 왔는지/ 답답한데/ 여기 있을 뿐이다/ 이 벼랑/ 이 절벽/ 그대와 그냥 있을 뿐이다”
 
이달에는 이 시를 거듭해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있는 바로 이 시간을 살아야겠다. 모자랐던 일과 고마웠던 일을 함께 떠올리는 이 시간을 살아야겠다. 우여곡절이 두꺼운 책에 한가득 기록되겠지만 이 시간을 실감 있게 살아야겠다. 벼랑의 둥지 같은 이 시간을. 절벽의 끝에 있어서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도 오목해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이 시간을. 새로운 날들이 태어날 새하얀 알들을 따뜻하게 품고 있는 이 시간을. 계절과 해가 오고 가더라도 한결같은 하늘 아래에 있는 이 시간을.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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