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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전두환의 군가

강주안 사회 에디터

강주안 사회 에디터

홍콩 민주화 시위에서 데자뷔를 느낀다. 제복 입은 사람이 시민에게 총을 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광주민주화운동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현장에 ‘임을 위한 행진곡’의 멜로디가 흘러서 더 그렇다. 5·18 희생자들의 피와 눈물을 모아 빚어낸 노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세상에 나온 1981년 진압군 진영에서 기획한 노래들이 있다. 군 장병 선호도 조사에서 늘 상위에 오르는 ‘전선을 간다’가 대표적이다.
 

홍콩서 ‘임을 위한 행진곡’ 열창
우린 ‘전선을 간다’‘멋진 사나이’
‘대통령 각하의 분부’에 따른 군가

얼마 전 이 노래가 ‘12대 군가’에 포함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기사를 본 박광주 JTBC 제작위원은 “이 노래는 5·18을 겪은 군부 정권이 군사 문화 확산 차원에서 제작한 군가인데 아직도 군의 애창곡이라니 씁쓸하다”고 말했다. 박 위원은 자신이 이 노래와 ‘멋진 사나이’ 등을 새 군가로 제작하는 실무과정에 깊이 관여했다고 밝혔다. MBC 대학가요제 출신으로 심수봉의 ‘젊은 태양’을 작사·작곡한 그는 81년 국방부 정훈국 대외홍보 담당 장교로 근무하던 중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새 군가를 만들었다고 증언한다. 군가 공모를 실시했고 내로라하는 대중음악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새 군가 제작 관련 사항은 청와대에 보고되고, 대통령 결재까지 받았다. ‘전선을 간다’는 유명 작곡가의 공모전 당선작이다.
 
서소문 포럼 12/3

서소문 포럼 12/3

대통령이 정말 군가 제작까지 간여했을까. 관련 자료를 검색했으나 ‘북한의 계속되는 도발에 장병과 국민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라는 설명뿐 청와대 얘기는 없다. 공문이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찾아간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경기도 성남 소재)에서 ‘군가 영화 제작 경위철’이란 81년 문건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 서류는 컴퓨터로 열람이 안 됐다. 직원에게 기록물 열람을 신청했다. 몇 분 뒤 종이철에 묶인 문건이 내 앞에 놓였다. 직원은 파란 고무장갑을 주며 “맨손으로 문서를 만지면 안 된다”고 당부했다. 
전두환 정부 시절 새 군가 보급을 위한 영화 제작 관련 공문.

전두환 정부 시절 새 군가 보급을 위한 영화 제작 관련 공문.

 
공문철을 몇 장 넘기니 이런 문구가 나온다. ‘81. 7. 20 새 군가 제정 결과보고 시 “새 군가”를 주제로 한 극영화를 제작, 널리 보급하라는 대통령 각하의 분부에 따라…’. 박 위원 증언은 사실이었다. 전폭적인 군 지원 현황도 담겨있다. 영화 촬영에 동원된 장병이 연인원 4000명이 넘었고 공군 전투기, 육군 탱크 등 실전 병기가 실탄과 함께 영화 제작에 투입됐다. 작전 계획 짜듯 추진한 영화가 ‘아벤고 공수 군단’이다.
 
새 군가 보급을 위해 영화를 제작하라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가 담긴 공문. 경기도 성남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에 보관돼 있다.

새 군가 보급을 위해 영화를 제작하라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지시가 담긴 공문. 경기도 성남 국가기록원 나라기록관에 보관돼 있다.

전두환 정부 시절 새 군가 제작을 위한 공문의 일부. 군가 홍보를 위해 제작한 영화 '아벤고 공수 군단'에 지원한 군 장비 내역에 전투기, 탱크 등이 보인다.

전두환 정부 시절 새 군가 제작을 위한 공문의 일부. 군가 홍보를 위해 제작한 영화 '아벤고 공수 군단'에 지원한 군 장비 내역에 전투기, 탱크 등이 보인다.

“영화는 한 나라의 견해와 습관을 표준화할 수 있다”는 선전의 귀재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말이 떠올랐다. 음악과 영화를 결합해 강한 메시지를 전파한 사례는 많다.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은 ‘지옥의 묵시록’에서 전쟁의 광기를 뿜기 위해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을 틀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숨져간 미국 청년들의 영혼을 에디트 피아프의 ‘당신은 어디에나 있어요(Tu Es Partout)’의 선율로 위로했다.
 
신군부가 새 군가를 ‘아벤고 공수 군단’에 실어 살포하려 한 메시지는 뭘까. ‘군·민 일체감 조성’이라고 공문은 말한다. ‘자연발생적으로 전 국민이 가창할 수 있도록 유도’하라는 지침이다. 당대 최고의 영화인들이 참여한 건 당연한 수순이다. ‘제작 정진우, 감독 임권택’에 이대근·남궁원·이영하 등이 출연했다. 빨래판 복근의 신일룡과 톱스타 정윤희의 파격 노출 베드신에선 ‘멋진 사나이’가, 주인공들이 전사하는 클라이맥스에선 ‘전선을 간다’가 흐른다. 2억4500만원을 들여 앤서니 퀸을 출연시키려 했던 기록도 남아있다.
 
새 군가 보급을 위해 영화를 제작하라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 지시에 따라 만든 '아벤고 공수 군단'의 한 장면. 전투기, 탱크 등 군 부대의 전폭적인 지원과 신일룡, 정윤희 등 톱스타들의 출연으로 볼 거리를 제공했다.

새 군가 보급을 위해 영화를 제작하라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 지시에 따라 만든 '아벤고 공수 군단'의 한 장면. 전투기, 탱크 등 군 부대의 전폭적인 지원과 신일룡, 정윤희 등 톱스타들의 출연으로 볼 거리를 제공했다.

“거짓도 1000번 말하면 진실이 된다”고 한 나치 선동가 괴벨스의 얘기처럼 새 군가들은 신군부 뜻대로 각종 영화와 방송 프로그램을 타고 애창곡으로 뿌리를 내렸다. 그렇다고 새 군가 제작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탓할 일은 아니다. 이들은 신군부의 숨은 의도를 몰랐다고 증언한다. 한 유명 예술인은 “좋은 노랫말을 만든다기에 군부대도 직접 가봤다”며 “정권이 특별한 의도를 갖고 있다는 내용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신군부의 만행은 김영삼 정부 이후 거듭 처벌받았다. 전 전 대통령은 다시 법정에 섰다.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형사처벌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당시 집행했던 정책이 남긴 과오를 수정하는 행정적 조치를 병행해야 한다. 홍콩 시민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시대에 우리 장병들은 ‘새 군가’를 열창하는 게 타당한지 따져보자. 이런 작업이 모아져야 5·18 진상 규명을 마무리할 수 있다.
 
강주안 사회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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