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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이스트 런던 꿈꾸다, 성수동 부흥 이끈 한 사람

 허름한 공장지대, 아무도 찾지 않던 성수동은 지금 가장 화려한 현재를 살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카페와 빵집, 레스토랑과 복합 문화 공간이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다. 이름난 커피 체인 ‘블루보틀’ ‘아모레 성수’ 같은 대기업 자본도 이곳에 터를 잡았다. 물론 지금도 자동차 정비공장과 인쇄 공장, 수제화 거리의 활기는 여전하다. 요란하게 돌아가는 공장과 공장 사이 갑자기 적막한 카페가 나타나고, 허름한 공장 건물 위층에는 가구 갤러리가 들어선다. 성수동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서울 라이프스타일 기획자들⑤
‘오르에르’ 김재원 대표

소위 '뜨는 동네' 성수동을 만든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오르에르'의 김재원 대표를 지난 10월 21일에 만나 인터뷰했다. [사진 오르에르]

소위 '뜨는 동네' 성수동을 만든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오르에르'의 김재원 대표를 지난 10월 21일에 만나 인터뷰했다. [사진 오르에르]

 
이런 성수동의 매력을 일찌감치 알아본 사람이 있다. 아무도 성수동을 주목하지 않았던 2014년 성수역 근방에 ‘자그마치’라는 카페 겸 복합 문화 공간을 열었던 김재원(39) 디렉터다. 김 디렉터는 “생활권이 성수동, 건대 입구 등 서울의 동쪽이었는데 당시 맛있는 커피 마실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며 “매번 홍대나 강남으로 넘어갈 수는 없으니 내가 하나 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농 반 진 반으로 당시를 회상했다. 그의 말대로 변변찮은 카페 하나, 그 흔한 ‘스타벅스’조차 찾기 어려웠던 성수동의 불과 5년 전 과거다.  
 
'오르에르' 건물 2층에 자리한 문구점 '포인트 오브 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재원 대표. 장진영 기자

'오르에르' 건물 2층에 자리한 문구점 '포인트 오브 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재원 대표. 장진영 기자

 
자그마치는 성수동에 최초로 문화의 온기를 불어넣었던 카페 겸 복합 문화 공간이다. 김 디렉터의 말대로 맛있는 커피가 있었고, 디자인 업계 종사자들이 드나들며 화학작용처럼 피어난 색다른 문화 콘텐트가 있었다. 100평짜리 인쇄 공장을 개조한 투박한 카페에서는 독특한 주제의 강연과 팝업 스토어, 작가들의 전시와 건축가들의 포럼이 열렸다. '성수동에 가면 재미있는 것이 있다'는 입소문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성수동 '자그마치.' 인쇄 공장 1층을 개조해 만든 카페 겸 복합 문화 공간이다. [사진 자그마치]

성수동 '자그마치.' 인쇄 공장 1층을 개조해 만든 카페 겸 복합 문화 공간이다. [사진 자그마치]

 
자그마치가 문을 연 이듬해 2015년부터 성수동에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성수동 명소, 카페 ‘어니언’과 복합 문화 공간 ‘대림창고’가 이즈음 문을 열었다. 김 디렉터는 “400평짜리 카페가 들어선다는 소문에 잠도 못 잤다”고 했다. 자그마치 손님들이 다 그리로 갈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기우였다. 자그마치 손님들이 어니언을 가고, 대림창고 손님들이 자그마치에 왔다. 성수동의 전체 유동인구가 늘어났다.  
 
'자그마치'는 성수동에 문화의 온기를 불어 넣은 거의 최초의 공간으로 꼽힌다. [사진 자그마치]

'자그마치'는 성수동에 문화의 온기를 불어 넣은 거의 최초의 공간으로 꼽힌다. [사진 자그마치]

 
이후 김재원 디렉터는 2016년 성수동에 카페 ‘오르에르’를, 2017년에는 생활 소품 편집숍 ‘WXDXH’를 냈다. 2018년에는 카페 오르에르 건물 위층에 수집품을 모아 보여준다는 콘셉트의 아카이빙 숍 ‘오르에르 아카이브’와 문구점 ‘포인트 오브 뷰’를 차례로 오픈했다. 그리고 이달에 과자 가게 ‘오드 투 스위트’를 연다. 그가 내는 곳마다 '성수동에 가면 꼭 들러봐야 할 공간'으로 회자된다. 대체 비결이 뭘까. 김재원 디렉터를 만나 물었다.  
 
이번엔 과자가게다. 이름이 ‘오드 투 스위트(Ode To Sweet)’인데.  
“‘달콤함에 대한 찬가’라는 의미다. 디저트는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는 음식이 아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어색한 사람끼리 대화의 물꼬를 틀 때 디저트를 찾는다. 정서적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디저트를 생각했다.”
 
과자 가게 '오드 투 스위트.' 정서적 허기를 채우는 달콤한 것들을 제공한다. [사진 오드 투 스위트]

과자 가게 '오드 투 스위트.' 정서적 허기를 채우는 달콤한 것들을 제공한다. [사진 오드 투 스위트]

 
공간을 열 때 어떤 준비를 하나.
“일단 ‘왜 이 가게를 만들어야 할까’ 목적성이 중요하다. 그런 다음 텍스트로 설계도를 짠다. 일상의 정서적 채움을 위한 디저트 가게라고 한다면 이름은 무엇이고, 어떤 콘텐트를 보여줄 수 있을까 등을 기획서로 만든다. 이 과정에서 리서치를 집요하게 한다. 수도 없이 다양한 검색어로 검색하는데, 그 분야가 가장 발달한 나라의 언어를 비롯해 영어·일본어·독일어·프랑스어 단어를 검색창에 넣고 괜찮은 것을 찾는 일을 반복한다. 이번 과자 가게는 ‘정서적 배고픔을 채운다’라는 콘셉트를 중시했다. 디저트와 함께하는 일상 속 여러 장면을 떠올리다 보니 문학적인 느낌이 잘 어울리더라. 디저트와 달콤함에 대한 시나 문학 속 장면을 찾아 일상의 장면과 연결하는 방식으로 설계도를 만들었다.”
 
김재원 디렉터는 "남녀노소 부담없이 주고 받을 수 있는 선물로 구움 과자를 떠올렸다"고 한다. [사진 오드 투 스위트]

김재원 디렉터는 "남녀노소 부담없이 주고 받을 수 있는 선물로 구움 과자를 떠올렸다"고 한다. [사진 오드 투 스위트]

 
공간을 만들 때 음악이나 향까지 세심하게 설계한다.  
“사람들이 카페인을 채우기 위해 카페에 오는 게 아니다. 하나의 브랜드처럼 경험 가치가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 음악과 향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카페 오르에르와 오르에르 아카이브에서 재생되는 음악이 다르고, 심지어 시간대와 계절에 맞는 재생 목록을 갖고 있다. 이 공간엔 어떤 꽃과 식물을 들일지, 어떤 향기가 나는 게 좋을지도 정해 놓는다.”
 
김재원 디렉터가 그동안 수집해온 물건들과 작가들의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오르에르 아카이브.' 김 디렉터의 취향 변천사를 가늠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유지연 기자

김재원 디렉터가 그동안 수집해온 물건들과 작가들의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오르에르 아카이브.' 김 디렉터의 취향 변천사를 가늠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유지연 기자

 
김재원 디렉터는 ‘덕후(마니아)가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기획한 공간을 보면 이런 ‘덕후’ 기질이 잘 묻어있다. 어떤 한 가지에 정통한 깊이 있는 취향이 있다는 얘기다. 특히 빈티지 공예품 편집숍 오르에르 아카이브는 이런 김 디렉터의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난 공간이다. 어릴 때부터 뭔가를 모으는 데 열중했던 그의 소장품을 모아놓은 곳으로 유리 공예품부터 빈티지 커트러리, 심지어 돌멩이까지 세상에 하나뿐인 온갖 아름다운 물건들이 놓여있다.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사 모으는데 몰두했다는 김 디렉터의 소장품들은 돌멩이부터 유리 공예품까지 다양하다. 유지연 기자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사 모으는데 몰두했다는 김 디렉터의 소장품들은 돌멩이부터 유리 공예품까지 다양하다. 유지연 기자

 
좋은 취향은 어떻게 생길까.
“취향에 좋고 나쁨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얕거나 깊을 수는 있다. 깊이 있는 취향을 위해선 경험치도 중요하고 공부도 필요하다. 경험만으로는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하는 요즘 사람들이 의외로 취향이 없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예를 들어 좋은 디자인의 가구를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디자이너가 누군지, 어떤 특징이 있는지도 공부해야 디자인 가구에 취향이 생긴다.”
 
내는 공간마다 성공하는 비결은 뭔가. 
“운이 좋았다. 자그마치를 내고 2016년 오르에르를 낼 때가 인스타그램 부흥기였다. 개인 계정에 가게 오픈을 알렸는데, 오픈하자마자 사람들이 긴 줄을 섰다. 그즈음부터 나도 눈에 인스타그램의 정사각형 프레임을 탑재하기 시작한 것 같다. 공간 곳곳에 예쁜 포토 스폿을 만들게 되더라.”

 
공간만 예쁘다고 되는 건 아니다.  
“물론이다. 처음에는 예쁜 공간이 시선을 잡아둘 수 있지만, 이후부터는 콘텐트가 관건이다. 매번 인테리어 사진만 올릴 순 없으니까. 더구나 요즘엔 콘텐트 소비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아무리 뜨는 공간도 금세 지루해지고 쉽게 관심 밖으로 사라진다. 하드웨어(공간)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콘텐트)가 중요한 이유다. 오르에르의 이름으로 전시와 팝업, 자체 상품 기획 등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김 디렉터가 만드는 공간의 백미는 그 안에 담기는 콘텐트다. 문구점 '포인트 오브 뷰'를 위해 기획한 '문구 이야기 나누는 밤-타인의 사물함 들여다보기' 행사 이미지. [사진 포인트 오브 뷰]

김 디렉터가 만드는 공간의 백미는 그 안에 담기는 콘텐트다. 문구점 '포인트 오브 뷰'를 위해 기획한 '문구 이야기 나누는 밤-타인의 사물함 들여다보기' 행사 이미지. [사진 포인트 오브 뷰]

 
콘텐트 기획은 어떤 식으로 하나.
“내가 하는 공간에 사람들이 온다. 이 사람들을 연결하면 콘텐트가 된다. A와 만날 일이 없는 B를 만나게 하면 재미있는 것이 나오더라. 예를 들어 문구점 포인트 오브 뷰에서 다이어리를 알리는 행사를 기획할 때 평생 도장만 파온 일본 작가를 초대했다. 당장 다이어리 꾸미기 마니아들이 줄을 서서 도장을 맞추고 이름을 새겨 넣더라. 자그마치를 운영할 때는 ‘손님의 발견’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범죄 심리학자나 독립서점 주인 등 자그마치에 오는 손님들을 강연자로 모셨다.”
 
 ‘밤’이라는 시간을 선생삼아 학교 혹은 일반적인 공부로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함께 나눈다는 콘셉트로 '오르에르'에서 진행한 강연 프로그램. [사진 오르에르]

‘밤’이라는 시간을 선생삼아 학교 혹은 일반적인 공부로 배울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함께 나눈다는 콘셉트로 '오르에르'에서 진행한 강연 프로그램. [사진 오르에르]

 
성수동은 종종 영국 런던의 동쪽 지역 ‘이스트 런던(East London)’과 비유된다.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범죄율도 높았던 쇼디치·달스턴·해크니 등 런던 동쪽 지역은 2010년대 이후 카페·레스토랑·갤러리·독립 서점 등이 모여드는 새로운 문화 지역으로 탈바꿈한다. 성수동이 실제 서울의 동쪽이기도 하고, 낙후됐던 지역이 비교적 늦게 새로운 소비문화 지역으로 떴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재미있게도 김 디렉터는 이스트 런던과 성수동이 뜨는 것을 남달리 경험한 사람이기도 하다. 김 디렉터는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텍스타일디자인을 공부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건국대학교에서 텍스타일디자인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동대학 리빙 디자인학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유학 시절 경험했던 이스트 런던과 지금의 이스트 런던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체감한다. 성수동도 마찬가지다.  
 
공간 기획자가 본 성수동의 매력은 뭔가
“서울 어디서나 가까운 도심지면서 다른 지역에는 없는 벽돌 건물이나 너른 공장지대가 있다. 자동차 공업사가 많아서 비싼 희귀 수입차들이 지나가는데 그 옆으로는 공장 지게차가 서 있다. 공장 근로자와 젊은 디자이너가 한 거리에 있는 등 혼재된 풍경이 매력적이다. 지금도 오르에르 바로 옆에는 미용실 ‘팔방미인’이 있다. 오르에르를 처음 낼 때 건물 바로 옆에 붙어있는 미용실 간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간판과 오르에르 간판이 반반씩 나온 사진을 찍어 올리며 재미있다고 반응했다. 균일하지 않은 것이 성수동의 매력이다.”
 
성수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색 벽돌을 활용해 만든 '오르에르' 전경. [사진 오르에르]

성수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붉은색 벽돌을 활용해 만든 '오르에르' 전경. [사진 오르에르]

 
이스트 런던과 성수동은 '뜨는 동네'다. 하지만 이 타이틀이 지역에 늘 약이 되는 것은 아니다.  
“뜨는 동네가 무분별하게 개발돼 본래 지역이 가진 매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공간 기획자로서 늘 경계하는 부분이다. 지역의 특색을 반영하지 않고 그저 트렌디하게 조성되는 공간들은 뜨는 동네를 금세 져 버리게 한다. 동네만의 정체성을 잘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연남동은 연남동대로, 성수동은 성수동대로 동네만의 특색과 분위기가 살아있다면 ‘그 동네는 이제 끝났어’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요즘엔 서울 곳곳에 동네별 색깔이 생겼다.
“예전엔 청담동이나 클럽이 있는 홍대 정도가 특색 있는 소비문화 지역이었다. 지금은 연남동·을지로·서촌·성수동 각자 나름대로 색이 있다. 공간 기획자들도 과거엔 어딜 들어가든 새것같이 만들고 세련된 걸 했다. 지금은 그 동네에서 어떤 매력을 살릴 수 있을지를 고려한다. 성수동을 둘러보고 벽돌 건물들이 많아 오르에르를 벽돌 건물로 만든 것처럼 말이다. 그 동네가 가진 매력을 찾아 부각하는 방향으로 가야 서울이 더 멋진 곳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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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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