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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청년 괴롭히는 ‘불가능은 없다’ 신화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불가능은 없다.” 우리 시대 성공한 사람들이 퍼뜨리는 ‘신화’다. 그런 스토리는 실제이며 감동적이고 희망적이다. 하나 나는 이 명제를 믿지 않는다. 이쯤 살아보니 알겠다. 그런 행운의 확률은 아주 낮고, 누구나 노력하지만 원하는 결말에 도달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걸 말이다.
 

청년 다섯 중 한 명꼴로 니트족
기계노동 시대적 요인도 한몫해
근대적 ‘노력신화’론 해결 안 돼
새 시대 인간 가치 다시 찾아야

철학자 한병철은 이 시대 대표적 병원(病原)을 ‘긍정성의 과잉’에서 찾았다. ‘성과사회’로 표현되는 후기 근대사회의 인간들은 개성과 자아,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성으로 자신을 무장한다. 한나 아렌트는 근대사회의 인간형을 개성과 자아를 버리고 규율에 순응하는 ‘노동하는 동물’로 표현했지만, 실제 인간은 결코 그런 익명의 삶에 용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기근대인들도 착취의 굴레를 벗어나진 못한다. 근로감독관이 아닌 자발적 착취. 성취를 위해 스스로 들볶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초조와 신경과민, 번아웃으로 탈진하며 ‘피로사회’를 건설한다. 한병철은 긍정성의 과잉이 21세기를 우울증과 신경증적인 병리사회로 만들었다고 했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한국 청년보고서 (Investing in Youth: Korea)를 내놨다. 언론도 크게 주목하진 않았다. ‘청년고용률 43%’처럼 지난해 통계로 작성돼 별로 신선하지 않아서였을 거다. 어쩌면 이미 청년 고용불안 같은 문제는 만성화돼 대수롭지 않은 뉴스가 됐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국내 청년 니트(NEET, 18.4%) 비율이 OECD 회원국 평균(13.4%)보다 높고, 대졸 이상 고학력자가 이 중 45%로 OECD 평균(18%)보다 2.5배나 높다는 대목엔 또 눈길이 갔다.
 
니트(NEET). 학교든 일터든 어디에도 소속돼 있지 않고, 구직활동도 하지 않는 청년들. 시쳇말로 ‘청년백수’다. 일본의 장기불황기에 나왔던 이 용어는 어느새 우리나라에 정착했다. 일본에선 그 여파로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젊은이들,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양산됐다. 요즘엔 50대 장년이 된 이들이 80대 부모의 고령연금에 의존해 사는 ‘8050’이 사회문제가 됐단다. 일본 사회에선 이제야 ‘그 당시 어려웠지만 히키코모리를 방치해선 안 됐었다’는 반성론이 나온다. 지금 한국이 바로 일본의 ‘그 당시’ 반성의 시점에 서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시점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는가.
 
선데이칼럼 11/30

선데이칼럼 11/30

정부는 올해 예산 20조원을 들여 30개 부처에서 158개 청년정책을 진행한다. 청년수당, 새출발지원, 청년센터 설치…. 궁극적으로는 청년의 자신감을 북돋우고, 일터로 보내는 게 골자다. 지방자치단체들도 니트 청년 끌어안기, 자격증 취득 지원 등 이벤트를 벌인다. 성공한 어른들은 노력의 미담을 전파하며, 눈높이를 낮추라고 ‘격려’한다. 자신의 청년기엔 선택하지 않았을 일들을 들이밀며, 도전을 통해 ‘성공의 기적’을 이루라고 한다. 사회적 조언과 정부 정책은 결국 ‘긍정성의 확대’ 또는 ‘노동하는 동물’이라는 근대적 인간으로 돌아가라는 요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안다. 지금 니트는 불평등 문제라는 것. 청년정책의 개별적 성공사례는 나오겠지만 대세를 바꾸진 못할 거다. 부모의 재력과 신분의 대물림은 계속될 것이고, 불운하고 빈곤한 청년들이 노력만으로 중산층에 진입하는 일은 기적의 확률만큼 일어날 것이며, 열악한 고용률 통계도 굳건할 것이다.
 
또 지금 니트는 시대적 문제다. 기계가 노동하는 시대. 사람 일자리가 확 주는 건 상상이 아닌 보이는 미래다. 이미 우리는 대부분 잠재적 실업자다. 임금노동으로 생활했던 근대인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그런데 청년들에게 좁디좁은 임금노동시장 참여를 부추기는 건 온당한 일일까.
 
잘 알려진 미래 시나리오가 있다. 사람은 생산이 아닌 소비의 주체로 국가가 제공하는 ‘기본소득’으로 소비하며 삶을 영위하는 사회. 국가 경제정책은 기계노동의 부가가치를 세금으로 환수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해 소비를 증진하는 것이다. ‘정부의 일’도, ‘사람의 일’도 바뀔 거다.
 
사람의 일. 고대 그리스의 시민사회를 생각한다. 노예가 노동하고,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철학을 논하던 시대. 그 시대 인간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로 환산되지 않았고, 시민들의 여가가 철학의 기반을 닦았다. 인간의 가치는 노동생산성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가치가 충만한 이 시대 사람들은 ‘피로’를 창조했고, 더 행복하지도 않다.
 
인간은 기본적 욕구가 충족돼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존재다. 존 버튼은 『기본욕구이론』에서 사람은 안전과 정체성, 자기결정권과 대외적 인정이라는 욕구가 반드시 충족돼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미래를 살 현재 청년들에게 근대인의 가치를 강요하고, 노동시장에서 탈락하면 패배자인 양 바라보는 건 그들의 기본욕구 자체를 흔들어버려 ‘패배자의식’을 심어주고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할 수 있다. 미래엔 우리가 살아온 근대인의 방식이 틀릴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여가가 넘치는 새 시대에 변화할 인간과 삶의 가치를 연구하고, 이를 준비시키는 쪽으로 청년정책을 이동해야 한다. 우리 니트 청년들의 미래 모습이 현재 일본의 장년층 히키코모리 같아져서는 안 된다.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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