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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처해 벌금형 줄까 겁난다…"집유 달라" 센 처벌 찾는 그들

폭행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은 김재혁(가명ㆍ57)씨는 다음 달 1심 선고를 앞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통장을 들여다보며 한숨을 쉬고 있다. 김씨는 지난 7월 일용직 노동일을 끝내고 동료와 함께 노래방에 갔다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서비스를 더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인과 시비가 붙었고, 결국 주인의 멱살잡이를 하고 노래방 마이크를 내던져 망가트리는 등 폭행과 재물을 손괴했다. 

 
결국 기소된 김씨는 변호사를 찾았는데 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게 됐다. 변호사는 “전과도 없고, 상대가 그리 큰 피해를 본 것도 아니니 벌금형 정도를 받고 끝날 수도 있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김씨는 “앞으로 정말 착하게 살 테니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벌금형보다 집행유예가 더 센 처벌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피해자와 합의하느라 모아놓은 돈을 써 버린 김씨는 더는 벌금으로 돈을 낼 형편이 안 됐기 때문이다.
 
김씨의 변호사는 공판 때마다 판사에게 “피고인의 어려운 경제적 사정을 감안하여 선처해 달라”고 말했는데, 김씨는 혹여나 판사가 정말 ‘선처’해서 징역형인 집행유예가 아닌 벌금형을 내릴까 봐 조마조마하다.  
 

"벌금 못 내면 노역장…돈 없는 사람에겐 '징역형'과 같아" 

연도별 1심 집행유예 및 벌금형 선고 건수.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연도별 1심 집행유예 및 벌금형 선고 건수.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벌금형 대신 더 센 처벌인 집행유예를 요구하는 피고인들 이야기는 하루 이틀이 아니다. 벌금형은 말 그대로 재산형에 속하고, 집행유예는 징역형에 속하는 더 큰 형벌이다. 취업제한, 자격정지, 해외 비자 발급 문제, 기업 내 징계 등 집행유예 처분을 받으면 그동안 할 수 없는 게 많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고려할 가치가 별로 없는 것들이 많다. 이들에게는 당장 내야 하는 몇백만원 이상의 벌금이 훨씬 더 센 형벌이다. 게다가 벌금형 처분을 받았는데 돈을 내지 못하면 노역장에 유치돼 보통 일당 10만원으로 환산한 노동을 벌금 갚을 때까지 해야 한다. 
 
최근에는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벌금형보다 집행유예’라는 공식이 통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20~30대의 경우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면 취업 제한이나 사내 불이익 등의 문제가 있지만 “어차피 취업 못 하는데 돈 드는 것보다 집행유예가 낫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임지영 변호사는 “당장 벌금을 내지 못하면 노역장으로 유치되고 일당 10만원 정도로 환산한 노동을 벌금 다 낼 때까지 해야 한다”며 “사실상 벌금이 없으면 바로 교도소로 끌려가는 것이니 돈 없는 사람들에게는 집행유예보다 센 형벌로 인식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벌금형 받고도 "집행유예 받도록 항소해달라"  

이 때문에 변호사들도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피고인의 이익’과는 반대되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려 애쓰는 경우가 많다. 일부 의뢰인은 벌금형을 선고받고도 ‘집행유예로 해 달라’며 항소 요구를 하기도 한다. 주영글 변호사(법무법인 숭인)는 “피고인이 스스로 1심에서 받은 처벌보다 더 센 처벌을 요구하며 항소할 수 없는데도 일부 의뢰인들은 벌금형 받고도 항소해서 집행유예 받게 해달라고 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300만원 못 내 노역장 유치 한 해 3만명 

벌금 미납 금액별 노역장 유치 현황.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벌금 미납 금액별 노역장 유치 현황.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300만원 미만의 벌금이 없어 노역장에 유치되는 사람들은 매년 꾸준히 2만5000명~3만명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올해 7월까지만도 1만2000명이 벌금 300만원을 내지 못해 노역장에 유치됐다. 벌금형을 받은 미성년자나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등에게 벌금을 빌려주는 장발장은행의 오창익 사무처장은 “‘황제노역’이라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대다수의 사람에게 노역은 생업과 시간을 맞바꾸는 것”이라며 “혼자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나 수급자들의 경우 그동안 경제 활동을 못 해 더 삶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범죄 저질렀으면 처벌받아야 하지만…

물론 벌금형이든 집행유예든 범죄를 저질렀으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게 맞다는 의견이 다수다. 경제적 형편이 어렵다고 죄의 무게가 덜해진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금을 받는 사건 중에는 단순히 행정 절차를 따르지 않았거나, 정말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100만원 이하의 소액을 빌리고 안 갚아서 몇백만 원의 벌금을 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예비군인 이 모씨는 이사한 뒤 14일 안에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난 7월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다. 병역의무자의 경우 거주지 이동 시 14일 이내에 전입신고를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아서 병력동원 소집 통지서를 전달하지 못하게끔 했다는 것이다. 이씨는 “생계를 유지해야 하느라 전입신고 문제를 잊고 있었다”고 하소연했지만 소용없었다.
 
연도별 벌금 집행 현황.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연도별 벌금 집행 현황.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벌금형의 집행유예, 재산비례형 벌금제도 등장

정부에서도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해 지난 2018년 1월부터 ‘벌금형의 집행유예’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겠다는 취지다. 징역형에 대해 집행유예를 해 주는 것처럼, 500만원 미만의 벌금형에 대해서도 집행을 유예해준다. 지난해 한 해 동안 벌금형의 집행유예를 받은 건수는 900건 정도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소득에 따라 같은 범죄라도 벌금을 차등해서 매기는 ‘재산비례형 벌금제’ 도입도 준비 중이지만, 아직 사회적으로 찬반 논란이 거세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일부 피고인의 경우 벌금을 납부 못 하면 사실상 징역형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의 노역 신세를 져야 하기에 형벌의 부조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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