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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김정은만 바라보는 대북정책 멈춰야”

북한은 왜 대남 비난으로 돌아섰나 

지난해 2월 평창 겨울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북한 응원단이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응원을 펼치고 있다.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한은 지난해 3차례의 정상회담을 하고 예술단 교환 등 교류·협력에 나섰지만 올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경색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2월 평창 겨울 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북한 응원단이 한반도 지도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응원을 펼치고 있다.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한은 지난해 3차례의 정상회담을 하고 예술단 교환 등 교류·협력에 나섰지만 올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경색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남북관계가 깊은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지난 4월 북한 김정은이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난데없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운운하며 폄훼한 것을 시작으로 악화일로다. 대통령과 청와대, 정부 대북 부처의 핵심 고위 관료들은 제대로 된 대꾸조차 못 한 채 쩔쩔매는 모습이다. 북한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대남 비방의 수위를 올리고 제멋대로 합의 위반과 도발의 길을 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도대체 무슨 속사정이 있는 건지 국민은 궁금해하지만 당국은 어물쩍 넘긴다. 이제 2019년을 한 달 남긴 시점이다.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올해 남북관계는 되는 일 하나 없던 시기로 기록될 공산이 크다. 6월 판문점 북·미 회동에 문 대통령이 함께할 수 있었던 건 심리적 위안을 얻을 오브제(object)지만, 북·미 관계마저 소강상태를 맞으며 빛이 바랬다. 국민의 기억 속에는 지난해 평창 겨울올림픽과 판문점·평양을 잇는 3차례 남북 정상회담 파노라마가 일장춘몽처럼 아련하다. 다시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솔직히 자신감이 서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작년 말 ‘김정은 방남’ 띄운 청와대
한·아세안 초청 친서에 북한은 조롱
잇단 북 도발에 정부 물러터진 대응
얕잡히면 남북관계 복원 어려워져

빨간불은 사실 지난해 이맘때 켜졌다. 청와대가 연말 김정은(35) 국무위원장의 서울 방문 가능성을 점치며 분위기를 띄우면서다. 일각에선 구체적인 날짜까지 거론하며 부산을 떨었지만 공수표에 그쳤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시발점은 9·19 평양 공동선언이다. 선언 마지막 구절인 제6항은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에 따라 가까운 시일 내로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고 명시했다.  
  
평양선언에 ‘김정은 답방’ 명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명한 919 평양 공동선언문.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명한 919 평양 공동선언문. [평양사진공동취재단]

합의 당시 문재인(66) 대통령은 김정은 앞에서 "가까운 시일이란 건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올해 안이란 의미”라고 설명했다. 면전에서 서울 방문을 채근하는 듯한 인상을 주긴 했지만 아버지이자 직전 최고통치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긴 약속을 아들이 지키도록 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청와대의 ‘연내 방남(訪南)’ 설레발에 북한이 언짢아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한참 후에야 재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통해 북한은 불쾌감을 드러냈다.
 
후속편은 훨씬 더 꼬여버린 남북관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어 무척 안타깝다. 북한의 조롱질과 우리 정부의 무기력한 대응, 국민을 향한 궤변에 가까운 해명과 북한 감싸기는 참담하기까지 하다. 지난 21일 북한이 관영 선전매체인 조선중앙통신으로 까발린 부산 한·아세안 정상회의(11월 25~27일) 김정은 초청 친서 얘기다. "남조선의 문재인 대통령은 국무위원장께서 특별수뇌자회의에 참석해 주실 것을 간절히 초청하는 친서를 정중히 보내왔다”는 말로 시작한 중앙통신 보도는 "못 오신다면 특사라도 방문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청을 보내왔다”는 등의 내막을 속속들이 공개했다. 시종일관 문 대통령과 남측을 비꼬는 투의 말을 이어가던 북한은 "일이 잘되려면 때와 장소를 현명하게 선택해야 한다”며 훈계조로 마무리하고 있다. 국격을 내팽개친 듯한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대통령 친서에 상응하는 채널 대신 관영매체의 보도문으로 갈음한 북측의 결례에 청와대와 관계부처는 일언반구 없다.
  
북 ‘반성 요구’ 내막 미스터리
 
눈길을 끄는 건 북한이 문 대통령의 초청에 대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과 죄스러운 마음으로 삼고초려를 해도 모자랄 판국”이라며 힐난한 대목이다. 현 남북관계의 경색이 북한의 단순한 불만 표출 차원을 넘어서는 단계란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정부 당국과 일부 관변 성향 학자 그룹은 한·미 합동 군사연습이나 F-35A 전투기 도입, 대북제재와 금강산관광 등에 대한 대남압박 차원이라고 톤을 낮추려 한다. 하지만 베테랑 대북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와 북한 사이에 물밑에서 뭔가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고, 김정은이 이에 대한 불만으로 문 대통령과 우리 측에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비방과 조롱을 퍼붓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북한이 ‘반성’까지 요구한 내막이 뭔지를 알아내는 게 남북관계의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라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3차례의 정상회담과 문 대통령의 평양 공개연설 허용 등을 둘러싼 남북 사이 모종의 거래에 파열음이 생겼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한 한국 측의 조언이 제대로 먹히지 않자 남측에 책임을 떠넘기며 몽니를 부리는 것이란 관측도 있다.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노딜 직후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을 비롯한 협상라인은 책벌과 숙청으로 몰락했다. 대남 불만을 표출하면서도 문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 비난만큼은 자제하던 북한이 하노이 결렬 사태 이후 화살을 서울로 돌린 것도 이런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 8월 광복절 경축사를 내놓은 문 대통령에게 북한이 ‘삶은 소대가리’란 거친 표현까지 동원해 비방세례를 펼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익명을 요구한 정보당국 출신 고위 인사는 "하노이 회담 결렬을 전후해 남북관계에 탈이 났고, 4월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장금철 북한 통일전선부장을 비밀리에 만나 북한 내 분위기 탐색과 해결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남북관계는 최고 지도자 수준의 소통과 교감뿐 아니라 경제 협력과 교류, 인도주의 문제 등 다방면에 걸쳐 불협화음을 표출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슈가 돌출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의 안이하고 물러터진 대응이나 북한 눈치보기 때문에 논란이 확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정은이 금강산 내 남측 시설을 철거하란 지시를 내린 지 한 달이 넘었는데도, 우리 정부 안팎에선 정확한 사태파악이나 냉철한 대응보다는 기대 섞인 ‘관광 재개’ 타령만 흘러나온다. "너절한 남측 시설”이라고 비꼰 김정은을 향해 "11년 전 관광객에 총격을 가해 사망케 하고 늑장 수습책으로 관광을 중단케 한 게 북한 아니냐”고 따끔한 대응을 하는 당국자도 없다. 금강산 내 남측 재산을 일방적으로 동결·몰수해 녹슬고 허물어지게 한 북측에 따지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통일부는 "김정은 말대로 남측 시설이 낡았다”며 현지 시설 사진을 맥락 없이 공개했다. 일각에선 북한이 군 병력과 돌격대를 동원해 철거에 착수했다는 전언이 나오지만 정부는 말이 없다.
 
지금 청와대와 정부 부처 대북라인, 권력에 줄 대려 애쓰는 관변 전문가 그룹은 심한 난독증에 걸려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한껏 조롱하는 평양발 언술이 쏟아지는데도 제멋대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고, 김정은 심기를 건드릴까 전전긍긍한다.
 
북한군 최전방 포구에서 불이 뿜어지는데도 군 당국이 이를 은폐하고, 탄로가 나자 군색한 변명을 이어간다. 국회에 나온 국방장관은 "인내하고 또 인내하겠다”며 방점을 엉뚱한데 찍는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가 대북 유화정책에 올인하자 각종 지침이나 작전 원칙을 손바닥 뒤집듯 했던 그 시절 국방부가 떠오른다.  
  
군 당국은 원칙 손바닥 뒤집듯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 남북 공동어로에 대해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오히려 커지고 북한의 위장침투에 취약하다”며 반대했던 고위 간부들은 정상회담 합의가 나오자 일제히 찬성으로 돌아섰다.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핵심 관계자는 군인을 심하게 비하는 세 글자 표현까지 써가며 "사실 많이 걱정했는데, ○○○ 반발은 아무것도 아니더라. 진급과 보직으로 휘두르니 다들 납작 엎드려 따라오더라”고 말했다.
 
다른 대북 부처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해상 탈북민을 서둘러 북송해 논란을 자초하고, 굶주려 죽은 탈북 모자를 냉대하다 반발에 부닥치는 업(業)을 쌓아가고 있다. 일부 학자·전문가는 북한의 행태에 대해 "대화 재개를 염두에 둔 압박” 이니 뭐니 하며 김정은 심리를 서울에서 꿰뚫는 관심법(觀心法) 수준의 해석을 내놓는다. 잘못 배운 북한연구를 권력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써먹으려니 제대로 된 진단과 처방이 나올 수 없다. 권력 임기가 반환점을 돌고 나니 이들의 마음가짐이 더 초조해진 듯하다.
 
청와대와 정부는 다시 화려한 봄을 꿈꾸는 듯하다. 김정은의 서울 방문과 4차 정상회담, 금강산관광 재개와 개성공단 재가동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는 한반도 평화 청사진일 게다. 하지만 상대에게 얕잡힌 나약한 모습으로는 모든 게 ‘마른 나무에 물대기’에 그칠 수밖에 없다. 약한 상대에게 한없이 강하고 갑질을 일삼는 북한 정권의 속성에 비춰볼 때 더욱 그렇다.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린다면 어딘가 탈이 난 게 틀림없다. 평양의 김정은만 바라보는 대북정책은 이쯤 해서 멈추는 게 맞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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