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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의 아버지 김승호 “스타는 여자를 조심해야”

한국영화 처음으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마부’. 신영균은 마차를 끄는 아버지(김승호) 밑에서 고시공부를 하는 큰아들로 나온다. [영화 캡처]

한국영화 처음으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마부’. 신영균은 마차를 끄는 아버지(김승호) 밑에서 고시공부를 하는 큰아들로 나온다. [영화 캡처]

배우 김승호(1918~68)는 ‘충무로의 아버지’로 불린다. 20세기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얼굴 중 한 명이다. 1960년대 우리네 아버지들의 초상을 정감있게 그려냈다. 초년병 시절 그를 만난 건 내게 큰 행운이었다. 우리는 영화 ‘마부’(1961) '나그네'(1961) ‘서울의 지붕 밑’(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 숱한 작품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출연했다.
 

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 제132화(7634)
<5> 나의 연기 우상 김승호

첫 국제영화상 ‘마부’서 부자 연기
열 살 차이지만 친형제처럼 지내
깡패 임화수가 자유당 연설에 동원
장례식 땐 동대문~광화문 운구행렬

김씨는 열 살 아래인 나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배우는 늘 스캔들을 조심해야 한다” “영화 제작은 절대 하지 마라”는 애정 어린 훈계를 잊지 않았다. 나도 그를 친형님처럼 따랐다. 말도 많고 부침도 심한 충무로에서 내가 흔들리지 않고 연기에 집중한 것도 어쩌면 그의 따듯한 충고 덕분이다.
 
나는 영화계 입문 전부터 그의 영향을 받았다. 일종의 우상과 같았다. 배우 지망생 시절 그의 연극을 처음 보고 “연기란 이런 거구나”를 깨달았다. 그의 몸짓은 꾸밈이나 과장이 없으면서도 생동감이 넘쳤다. 어떤 배역을 맡든 몸에 맞는 옷을 입은 사람 같았다.
 
함께한 영화가 쌓여가며 그도 나를 동료 배우로 인정해줬다. 김수용 감독에게 “영균이는 나를 누를 것 같아”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주연급 배우들끼리는 경쟁의식이 있었지만 우리는 격의 없이 지냈다. 서로 집에도 드나드는 사이가 됐다. 내가 처음으로 서울 중구 초동에 17평 남짓 집을 장만했을 때다.
 
“야, 스타집이 왜 이 모양이냐. 앉을 자리 좀 있는 집으로 이사 가라.”
 
“치과의사 때는 병원 건물에 셋방살이도 했는데, 이 집 정도면 대궐이지 뭘 그래요.”
 
나는 스스로 노력파라 생각한다. 차로 이동할 때나, 쉬는 시간에도 대본을 끼고 살았다. 김씨는 그런 내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미스터 신, 대사는 왜 달달 외워? 그냥 자연스럽게 연기하면 되지.”
 
“대사를 외워서 자기 걸로 만들어야 연기도 제대로 할 수 있잖아요.”
 
당시 주연급 배우는 1년에 수십 편씩 겹치기 출연하다 보니 스태프들이 읽어주는 대로 연기를 하곤 했다. 1960년대 초에는 동시녹음이 안돼 촬영 후 성우들이 더빙을 했다. 대사와 입 모양이 안 맞기 일쑤라 나는 어지간하면 직접 녹음을 고집했다. 그건 김씨도 마찬가지였다.
제1회 대종상 시상식. 왼쪽부터 영화배우 신영균, 김승호씨.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제1회 대종상 시상식. 왼쪽부터 영화배우 신영균, 김승호씨. [사진 신영균예술문화재단]

 
김씨는 순발력이 대단했다. 그의 애드리브 때문에 촬영장에 웃음이 터지곤 했다. 나는 지금도 그를 따라갈 만한 배우가 없다고 생각한다. 김씨 하면 1961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마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한국영화 최초의 국제영화제 수상이다.
 
김씨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4·19 혁명이 터지면서 하루아침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김씨가 예전 자유당 집회에서 연설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군중이 그의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임화수라는 ‘정치깡패’가 영화 제작에도 관여하면서 이승만 정부를 선전하기 위한 정치 행사에 연예인들을 동원하던 때였다. 김씨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의 영화제작자 호현찬씨에게 도움을 청해 짤막한 은퇴 기사를 내보내고 한동안 공백기를 가진 뒤 복귀해야 했다.
 
김씨의 말년은 순탄하지 않았다. 내게는 하지 말라던 영화제작에 손댔다가 내리막길을 걸었다. 첫 영화 ‘돌무지’(1967)를 제외하고는 잇따라 흥행에 실패하면서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68년 10월 부도수표 단속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가 이틀 만에 풀려났다. 그해 12월에 지병인 고혈압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아내에게 “억울하다. 기어이 살아나서 숙원이던 반공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당시 영화배우협회장이던 나는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큰 실의에 빠졌다. “일흔이 되기 전에는 꼭 아카데미 주연상을 타겠다”며 열정을 불태우던 사람이었다. 김씨의 장례식은 영화배우협회장으로 닷새간 치러졌다. 영결식 때 추모객 수천여 명이 몰렸고, 서울시는 광화문에서 동대문까지 운구 행렬을 할 수 있도록 교통정리를 지원했다. 한 시대를 불태운 대배우는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렇게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김씨의 연기 인생은 아들 김희라에게 이어졌지만 말이다.
 
정리=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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