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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신 삶 그대로…아버지가 부른 '봄날은 간다'

기자
푸르미 사진 푸르미

[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8)

“내가 요즘 좀 이상한 사람이 되었어요. 딸 앞에서 이런 말 해선 안 되는데…. 나는 바라고 기다리는 게 없어요. 준비한 것도 없어요. 그러나 너하고 나, 너희들과 내가 헤어질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특별한 마음의 준비는 하지 않고 있어요. 기다리지도 않고 있어요. 피할 수 없는 게 헤어짐인데, 이것이 나한테 언제 오느냐…. 이걸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아빠가 노래를 시작한다. 모노드라마처럼 중간중간 혼잣말 같은 내레이션까지 넣어가며. 한국전쟁 때 노래 백설희 ‘봄날은 간다’로 출발한 노래는 일제 강점기였던 1941년 영화 복지만리 주제곡 ‘대지의 항구’, 1928년 발표된 순회극단의 노래 ‘황성옛터’로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더니 1964년 최희준의 ‘하숙생’과 백년설의 ‘어머니 사랑’으로 회한에 젖는다. 마무리는 역시 아버지의 애창곡인 가곡 ‘기다리는 마음’.
 
2016년 여행을 함께 다녀온 인연으로 엮어진 친구들과의 자리였다. 허물없는 사이인지라 마음이 열리셨는지, “어르신, 노래 한 곡 하시지요” 하는 권고에 무려 일곱 곡을 연이어 부르셨다. 다른 이들에게도 기회가 가야 하는데, 혼자 너무 길게 많이 부르시는 것 아닌가 싶어 말리려던 나를 청중들이 만류했다. 나 역시 미리 준비한 듯 기승전결까지 갖춘 감정선에 흠뻑 빠져들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 '봄날은 간다' 1절
 
“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밑에 말을 매는 나그네야 해가 졌느냐
쉬지 말고 쉬지를 말고 달빛에 길을 물어
꿈에 어리는 꿈에 어리는 항구 찾아 가거라”
- '대지의 항구' 1절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 '황성옛터' 1,2절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 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강물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 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 '하숙생' 1,2절
 
“어머님 참사랑을 내가 압니다
분 단장 주름살에 눈물이 서려
세상이 다 비웃는 생애라 해도
나에겐 다시없을 어머니라오”
- '어머니 사랑' 3절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 주오
월출봉에 달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임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흘리네”
- '기다리는 마음' 1절
 
단풍이 한창인 하동에서 아버지와 손잡고 걷는 길, 뒷모습을 한 친구가 포착했다. [사진 푸르미]

단풍이 한창인 하동에서 아버지와 손잡고 걷는 길, 뒷모습을 한 친구가 포착했다. [사진 푸르미]

귀에 익숙한 노래들이지만(아버지와 함께 사는 동안 ‘불후의 명곡’, ‘열린 음악회’. ‘가요무대’를 함께 시청해 왔다) 애끓는 감정이 투영되니,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아버지 삶 그대로였다.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에선 스물여덟에 선주(船主)와 해녀로 만나 자식 여섯을 낳고 세상 떠날 때까지 호적에 오르지 못한 어머니(나에겐 친할머니)의 처연한 인생역정이 그려졌다. “버들잎 외로운 이정표 밑에 말을 매는 나그네야 해가 졌느냐” 하실 땐 배다른 형님 집에서 눈칫밥에 재래식 화장실 변을 퍼 가며 공부하던 고학생의 모습이, “기다려도 기다려도 임 오지 않고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리네”에선 먼저 떠난 아내를 잊지 못하는 남편의 순정이 그려졌다.  
 
속삭이듯, 애원하듯 온 맘 다해 내지르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노래하고 싶어 어떻게 참으셨나 싶었다. 노래 속에 그간 살아온 인생의 고백, 먼저 떠난 이에 대한 원망, 그리고 곁에 남아있는 우리들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쓰신 글을 보고 한 친구분이 “아버지 등단시켜 드려라” 하신 적이 있다. ‘검정고무신’ 이라는 제목의 어린 시절 기억을 되살린 글이었는데, 아버지에게 이런 감성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문장이 꾸밈없고 담백해 놀란 적 있다. 이날 아버지의 노래가 바로 그러했다.
 
100세 현역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행복한 노년을 위해 필요한 것 딱 세 가지로 ‘일, 여행, 연애’를 꼽은 바 있다. 즐거운 여행을 통해 오랜만에 감정이 폭발했으니, 이번엔 그 감성이 연분홍빛 ‘연애’로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우리 아빠라서가 아니라 키 크고 유머 감각도 있으시니, 여성에게 아낌없이 지갑을 여는 에티켓(?)만 구비하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싶다. 깊어가는 가을, 아버지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공무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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