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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 허락 받고 머리 기른 채 세상 공부했다"

백성호 기자 사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차장
 
 “‘화엄(華嚴)’은 산스크리트어로 ‘아바탐사카’다. 잡화(雜花)라는 뜻이다. 화엄의 세계에서는 잘난 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다. 모두가 소중한 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평등의 성품이 있다.”
 
25일 서울 강남구 일원동 대한불교조계종 전국비구니회관에서 본각(67) 스님을 만났다. 제12대 전국비구니회 회장에 취임한 지가 엊그제였다. 지금까지는 불교계에서 명망 있는 노스님이 비구니회장에 추대됐다. 이번에는 좀 달랐다. 본각 스님은 일본 유학파에 중앙승가대 교수를 역임했고, 투표를 통해 비구니회장(임기 4년)에 당선됐다.  
 
본각 스님은 "'화엄 사상'의 매력은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평등한 성품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본각 스님은 "'화엄 사상'의 매력은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평등한 성품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26년간 강단에서 교수 생활을 한 그는 “교수하려고 출가하지 않았다. 수행하기 위해서 출가했다. 비구니회장직도 마찬가지다. 정치하려고 출마한 게 아니다. 수행자로서 회장 일을 해나가겠다”고 피력했다. 그에게 ‘출가와 비구니회, 그리고 한국불교’를 물었다.  
 
어렸을 때 출가했다고 들었다. 사연이 있나.
 
“제 형제는 2남4녀, 모두 6남매다. 그런데 6남매가 모두 출가해 스님이 됐다. 큰오빠는 성철 스님의 맏상좌인 천제 스님이다. 제가 어렸을 때 큰오빠는 마산의 명문학교인 마산동중에 합격했다. 1학년 여름방학 때 오빠가 합천으로 오는데 장마가 져서 강물이 많이 불었다. 뱃사공은 배를 띄울 수 없다고 했다. 큰오빠가 억지로 설득해 강을 건너왔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께서 ‘여기서 교육을 시킬 수는 없겠구나’라며 마산으로 갔다. 값이 싼 폐가를 사서 이사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해 병을 얻었고, 이듬해 돌아가셨다. 큰오빠는 오랫동안 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돌아가셨다며 가슴 아파했다.”
 
 1968년 성철스님(왼쪽)이 절친한 벗인 청담(가운데), 향곡 스님과 함께 북한산 비봉에 올랐다. [중앙포토]

1968년 성철스님(왼쪽)이 절친한 벗인 청담(가운데), 향곡 스님과 함께 북한산 비봉에 올랐다. [중앙포토]

 
어떻게 6남매가 모두 출가하게 됐나.
 
“통영 안정사에서 아버지 49재를 지냈다. 가족이 모두 그곳에 갔다. 그때 성철 스님께서 안정사에 계셨다. 큰오빠는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또 한 분의 아버지를 만난 것 같다’며 성철 스님의 제자가 됐다. 큰 언니(혜근 스님)도 그때 출가를 결심했다. 성철 스님은 큰누나를 석남사 인홍 스님에게 보내셨다. 인홍 스님은 성철 스님의 비구니 제자 중에 제일이었다.”
 
이후 나머지 4남매는 어떻게 됐나.
 
“어머니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절로 가셨다. 모두 출가하면 모두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출가한 뒤 각자 은사 스님을 따라 뿔뿔이 헤어졌다. 그걸 보고 어머니는 가슴 아파하시다가 이듬해 돌아가셨다. 절에 갔을 때 저는 세 살이었다.”
 
세 살이면 아무것도 모를 때 아닌가.
 
“꼭 그렇지도 않았다. 저는 인천 제물포의 부용암에 있었다. 당시는 한국전쟁 직후였다. 전쟁고아가 무척 많았다. 부용암의 육년 스님은 전쟁고아 30~40명을 거두어서 키웠다. 사회에 진출할 때까지 돌보셨다. 사연은 달랐지만, 나도 그들과 함께 자랐다. 나이 차이는 57살이지만, 은사 스님은 제게 어머니 이상이셨다. 1960년대에 육년 스님은 ‘자랑스러운 인천 시민상’을 받았다.”
 
1990년대 초 성철 스님(왼쪽)이 해인사 부속 홍제암으로 자운 스님을 찾아가 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중앙포토]

1990년대 초 성철 스님(왼쪽)이 해인사 부속 홍제암으로 자운 스님을 찾아가 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중앙포토]

 
어렸을 적부터 그는 생각이 많았고, 일찍 철이 들었다. 아홉 살 때는 당대의 선지식인 전강 스님이 그에게 ‘본각(本覺)’이라는 법명을 직접 지어주었다. “열일곱 살 때였다. 운문사에서 방 도배를 하고 있었다. 신문지를 벽에 발라 초벌 도배를 해야 했다. 그런데 신문지에 있던 기사를 읽다가 충격을 받았다. ‘한글 전용’에 대한 기사였다. ‘세상 사람들은 쓰지도 않는 한문을, 절집에서는 허구한 날 잡고 있구나. 이건 세상을 역행하는 거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절집에 고등학교 졸업한 사람도 없었다.”  
 
그 길로 그는 성철 스님의 허락을 얻어 현대식 교육을 받았다. “세상 공부를 하고 싶다”며 머리도 기르고, 동국대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했다. 이후에는 일본 도쿄의 릿쇼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 고마자와 대학원에서 ‘화엄사상’으로 불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2017년까지 26년간 중앙승가대 불교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본각 스님은 "전국의 비구니가 환경운동에 돌입하자"며 취임식날 선물로 나누어 준 1회용 안쓰기 물품을 보여주었다. 손에 든 것은 도시락과 나무 수저, 그리고 비닐봉투 대신 쓸 수 있는 천 주머니다.

본각 스님은 "전국의 비구니가 환경운동에 돌입하자"며 취임식날 선물로 나누어 준 1회용 안쓰기 물품을 보여주었다. 손에 든 것은 도시락과 나무 수저, 그리고 비닐봉투 대신 쓸 수 있는 천 주머니다.

 
다시 머리를 길렀다. 어려운 결정 아닌가.
 
“평생 불교 공부를 하게 될 테니까, 지금은 세상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양철학을 전공했다. 그렇게 머리를 기른 채 재가자처럼 살다가 스물여섯 살 때 다시 머리를 깎았다. 그때는 나의 의지와 결정에 따른 출가였다. 삭발하고 언양의 석남사에 가서 새벽에 발우공양을 했다. 발우에 내 모습이 비치는데, 머리 길렀던 9년 세월이 한순간에 싹 사라지더라.”  
 
역대 비구니회장은 비구니회관에 상주하지는 않았다. 각자의 사찰에 머물며 일이 생기면 비구니회관에 모여서 회의를 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니 일의 지속성이 떨어지고, 회관 내 법당 운영도 어려웠다. 지속성을 위해서는 회장이 상주할 필요가 있다.” 본각 스님은 일산에 금륜사라는 사찰이 있다. 그렇지만 회장 임기 동안 비구니회관에 상주할 작정이다.    
 
비구니 출가자 수가 갈수록 줄어든다. 왜 그런가.
 
“인구가 줄고 있다. 국가도 인구절벽 시대를 맞고 있다. 게다가 여성의 사회진출 비율도 높아졌고, 사회활동 폭도 상당히 넓어졌다. 그러다 보니 여성이 출가하면 아무래도 자유를 구속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게 근본 원인이다. 더 중요한 건 종단으로부터 비구니가 지금보다 더 대접받고, 더 평등해져야 한다. 바깥에서 보기에도 ‘비구니가 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돼야 한다.”
 
전국비구니회관의 법당. 1만불이 모셔져 있는 법당은 불상의 형태와 색조가 무척 아름답다.

전국비구니회관의 법당. 1만불이 모셔져 있는 법당은 불상의 형태와 색조가 무척 아름답다.

 
여성 출가자 수 감소에 대한 방안은.
 
“로마 교황청에 갔더니 흑인 수녀님도 계시더라. 동남아 불교에는 여성 출가자가 거의 없다. 스리랑카에서 온 한 비구니 스님은 한국 불교에서 출가했다. 비구니회관에 국제 사미니 교육과정을 열면 좋겠다. 4년은 너무 기니까 2년 과정으로 해서 말이다. 외국인 여성 출가자 이야기를 종단 호계원에 했더니 검토를 해보자고 하더라. 동남아 여성 출가자들은 한국과 대만 불교에 많이 의지한다.”  
 
조계종의 출가자 수는 약 1만3000명이다. 그중 6000여 명이 여성 출가자다. 반면 종회의원(국회의원에 해당) 81명 중에 비구니 스님은 10명에 불과하다. 총무원장이나 교구본사 주지도 배출된 적이 없다. 종단에서도 비구니 스님을 정책적으로 배려한다지만, 사회적 변화 속도에 비하면 더디기 그지없다.  
 
종단 내에는 아직도 남녀 불평등이 존재한다. 어떻게 극복할 건가.
 
“불교의 역사적 과정을 짚어보면 비구니와 비구 간 불평등이 존재한다. 그런데 현재의 교육이나 활동 측면에서는 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 주위에 있는 불교 복지시설을 가보라. 거의 비구니 스님이 활동하고 있다. 교육이나 수행의 수준도 높다. 그리고 비구니회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려고 한다.”
 
예를 든다면 어떤 건가.
 
“취임식 날 찾아온 대중에게 ‘일회용 안 쓰기’ 운동을 제안했다. 전국의 비구니가 환경 운동에 돌입하자는 거다. 아울러 그동안 의료서비스와 노후 주거 등에서 소외되었던 비구니 스님들의 고충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제가 비구니회장에 출마하니까 주위에서 몇몇 분이 ‘본각 스님, 왜 정치판에 뛰어드십니까?’라고 하더라. 비구니 회장직을 정치로 하고 싶지는 않다. 수행으로 해 보이겠다.”  
 
본각 스님이 대만 불광산사의 성운대사가 보내온 글귀를 설명하고 있다. 비구니회장 취임 축하차 보내온 선물이다.

본각 스님이 대만 불광산사의 성운대사가 보내온 글귀를 설명하고 있다. 비구니회장 취임 축하차 보내온 선물이다.

 
비구니회관 복도에는 족자가 둘 걸려 있었다. 대만 불광산사의 성운대사가 직접 쓴 글씨였다. “92세이시라 손이 떨리세요. 그래서 일단 붓을 한번 찍으면 일필휘지로 써 내려 가야만 합니다.” 평소 친분이 두터운 본각 스님에게 최근에 보내온 취임 축하 글이다. 본각 스님은 “자비는 천고에 전해지고, 희사는 만방을 비춘다. 자비와 희사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라는 의미를 깊이 새기겠다”고 말했다.   
 
글·사진=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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