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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챙기며 커피 들이붓고 버텼다···쓰러진 '워킹맘 판사'의 삶

19일 오전 서울고법에서 열린 이승윤 판사 추모 문집 발간회. 이수정기자

19일 오전 서울고법에서 열린 이승윤 판사 추모 문집 발간회. 이수정기자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곳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11월 19일 오전 11시, 서울고법 중회의실은 꼭 1년 전 이날 세상을 떠난 고(故) 이승윤(당시 42세ㆍ연수원 32기) 판사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이 판사가 유명을 달리한 건 지난해 11월 19일 새벽의 일이다. 시아버지상을 치른 뒤 휴일이던 일요일 저녁 출근해 야근한 그는 다음날 새벽 자택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 그는 퇴근 전인 18일 밤 11시 반쯤 동료 법관들에게 이메일로 감사의 인사를 보내놓기도 했다.  
 
그와 가까웠던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시부상을 치르면서 그 다음주로 예정된 3건의 선고 중 2건만 미뤘다는 말을 듣고 나머지 한 건도 마저 미루라고 하지 못한 게 마음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당시 이 판사는 왜 모든 선고를 미루지 않았냐는 동료의 질문에 “오래된 사건이어서 기다리는 소송 당사자들이 마음 쓰이기도 하고 괜한 오해를 하게 할까 봐”라고 답했다고 한다.

 

‘워킹맘’ 동료가 모은 워킹맘 이승윤 판사의 기억

이 판사를 떠나보낸 동료 여성 판사 6명은 올해 4월부터 그를 기리기 위한 문집 발간을 추진했다. 대학 시절부터 이 판사와 가까이 지낸 이의영 서울고법 판사(43ㆍ연수원 32기)가 조용히 주변 사람들의 글을 모았다. 두어 달 뒤 모인 글만 29편. 그와 각별했던 선후배ㆍ동료 판사들의 글에는 법관으로, 초등생 두 아이의 엄마로, 아내로, 맏딸로 살아온 이 판사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기본적으로 승윤이는 숨 쉬고 있는 순간순간을 너무나 즐기고 흥미진진해 하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고시 공부를 하고 연수원 생활을 거쳐 법원에 들어오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고 수많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을 겪으면서도 승윤이의 그런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이수민 판사)
 
“‘어려운 사건일수록 계속 반복해 기록을 보다 보면 결국 답이 나오고, 그때처럼 기쁠 때가 없어. 그치?’. 사망하기 한 달 전쯤인가 같이 저녁 식사 후에 각자의 사무실로 다시 들어가기 전에 그녀가 친구인 나에게 한 말이다. 판사로서 해야 할 일을 못 하고 있을 때처럼 불편할 때가 없고, 결국 해냈을 때 그 안도감이 행복하다는 그녀. 천생 판사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이의영 판사)
 
“‘수족구병 걸린 두 아이를 간호하느라 머리는 산발되고 잠은 제대로 못 자 다크서클이 땅까지 내려온 와중에 몰린 잠을 쫓느라 커피를 들이붓고 있었거든요…큰 애가 엄마는 커피를 정말 귀엽게 먹네? 라고 웃어주는데 장가 안 보내고 평생 끼고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이승윤 판사가 여성법관들의 인터넷 카페에 남긴 글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카페에서 우리 동료들은 여전히 일상을 살아내고 있습니다”(정용신 판사)

 

떠난 지 1년…워킹맘의 삶은 나아졌을까

판사로, 아내로, 엄마로 살아온 이 판사를 먼저 떠나보낸 동료 판사들은 더는 친구를 잃지 않도록 서로 ‘지켜봐 주는’ 역할에 나섰다고 한다. 신숙희 서울고법 판사(연수원 25기)는 이날 문집 발간회에서 “아이 둘을 키우며 여성인 판사로, 몇 년 먼저 같은 길을 걸어온 판사로서 같은 법원 후배 판사의 상태를 잘 살펴야 했다는 자책감이 몰려들었다”고 지난해 상황을 떠올렸다. 이어 “이 판사의 일이 우리 생각과 문화에 알게 모르게 변화를 줬고, 정책 제안으로 이어져 일부 법원에서는 받아들여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올해 초 수원지법에서는 재판부별로 적정 선고 건수를 제시하고 ‘야근 없는 날’을 정하기도 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업무개선방안을 고민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워낙 판사 1명이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많다 보니 환경 개선이 쉽지는 않다. 법원행정처는 지난 5월 '일ㆍ가정양립을 위한 TF'를 만들고 논의를 이어가고 있지만 뚜렷한 개선방안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너희와 잘 놀아주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서 서운하지 않으냐”는 외할아버지의 물음에 초등학교 2학년인 이 판사의 아이는 “엄마는 나라를 위해 일하고 틈만 나면 형과 나에게 발 마사지를 해줬어”라고 의젓하게 답했다고 한다. 이 판사의 삶을 담은 책은 1000부가 발간돼 전국 법원과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일부 공립 도서관 등에 비치된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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