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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산 고지 사수 못 하면 남북 군사분계선이 달라진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01>

상감령 전투(1952년 10월 14일-11월 25일)는 포격전이 치열했다. 1952년 10월 말, 상감령 전선에서 포탄 23발로 탱크 5대를 격파하고 화약고를 폭파한 15군 포병 5연대 6반 반원들. 8명 모두 2등 공로상을 받았다. [사진 김명호]

상감령 전투(1952년 10월 14일-11월 25일)는 포격전이 치열했다. 1952년 10월 말, 상감령 전선에서 포탄 23발로 탱크 5대를 격파하고 화약고를 폭파한 15군 포병 5연대 6반 반원들. 8명 모두 2등 공로상을 받았다. [사진 김명호]

싸움은 서로 이겼다는 주장이 대부분이다. 1952년 가을, 인적 드문 오성산(五聖山) 일대를 43일간 인간지옥으로 만든 상감령 전투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과 미국은 패배를 부인하고, 중국과 북한은 때만 되면 영화와 문학작품, 노래 등으로 승리를 자축한 지 오래다. 6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전쟁에 진정한 승리자가 있는지 반문해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전회담 중단되자 서로 “네 탓”
중국지원군 15군 오성산에 집결

갱도전에 한미연합군 포격 포기
40여 일 전투, 양측 엄청난 피해
중국이 자랑하는 황지광도 사망

1951년 7월 10일에 시작된 정전회담은 43일 만에 중단됐다. 다시 회담장에 마주하기까지 64일이 걸렸다. 협상이 속개됐지만 순조롭지 못했다. 총성도 그치지 않았다. 재개 349일 만인 1952년 10월 8일, 또 회담장의 불빛이 꺼졌다. 양측은 파열 원인을 서로 떠넘겼다. 대치 중인 38선 지역에 전운이 감돌았다. 미군이 선수를 쳤다. 중국지원군의 대비도 만만치 않았다. 3병단 예하 15군을 투입했다. 군단장은 훗날 총참모장과 국방부장을 역임하는 친지웨이(秦基偉·진기위)였다.
  
훗날 국방부장 지낸 친지웨이, 15군 지휘
 
상감령 전투가 끝난 후 지원군 부사령관 양더즈(楊得志ㆍ왼쪽)와 함께 오성산 지역을 둘러보는 북한군 부사령관 최용건(왼쪽 둘째). 왼쪽 셋째는 북한 정치보위상 박일우. [사진 김명호]

상감령 전투가 끝난 후 지원군 부사령관 양더즈(楊得志ㆍ왼쪽)와 함께 오성산 지역을 둘러보는 북한군 부사령관 최용건(왼쪽 둘째). 왼쪽 셋째는 북한 정치보위상 박일우. [사진 김명호]

장정 시절, 친지웨이는 개국원수 쉬샹첸(徐向前·서향전)의 경호대장이었다. 어린 나이에 죽을 고생하며 별꼴을 다 겪었다. 적이 두려우면 적도 나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진작 깨달았다. 포로가 됐다가 탈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녔다. 항일전쟁 때도 어려운 일은 도맡아 했다.
 
일본패망 후 국·공내전이 발발했다. 류보청(劉伯承·유백승)과 함께 중원야전군(中原野戰軍)을 지휘하던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은 친지웨이를 신임했다. 전통을 자랑하는 9종대(縱隊)사령관에 발탁했다. 아직 어리다며 난처한 표정 짓자 이유도 곁들였다. “인간은 자신의 장점을 잘 모른다. 그간 너를 눈여겨봤다. 너는 공격과 퇴각이 민첩하고, 지구전에 강하다. 손상이 커도 결국은 승리했다. 회복도 빨랐다. 9종대는 태항산(太行山)에서 깃발을 날린 야전부대다. 지휘관으로 네가 적격이다.” 정치위원도 배려했다.  
 
훗날 프랑스 대사 역임하는 황쩐(黃鎭·황진)을 딸려 보냈다. 친지웨이는 덩샤오핑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국·공내전 말기, 갱도전(坑道戰) 펴며 국민당군을 괴롭혔다. 1949년, 중원야전군이제2야전군으로 바뀌면서 9종대도 15군으로 개편됐다.
 
상감령에 보낼 보급차량에 위장막 설치하는 여 공병대원. [사진 김명호]

상감령에 보낼 보급차량에 위장막 설치하는 여 공병대원. [사진 김명호]

15군은 항미원조지원군 예비대였다. 주둔지도 쓰촨(四川)성 충칭(重慶) 인근이었다. 1951년 1월, 중국지원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마오쩌둥은 우리 국군과 연합군이 37선으로 후퇴하자 15군을 화베이(華北)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15군 45사단 정치위원 네치펑(聶濟峰·섭제봉)이 구술을 남겼다. “1개월 만에 화베이에 도착했다. 베이징과 텐진에서 군사회의가 열렸다. 15군과 12군, 60군으로 항미원조지원군 3병단을 창설했다. 2개월간 간부들에게 정치교육을 시켰다. 다들 미군이 종이호랑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을 매도하고 우리의 승리를 확신시키는 교육이었다. 전쟁은 첫 번째 전투가 중요하다. 패하면 사기가 떨어진다. 되살아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친지웨이는 이 점을 우려했다. 돼지 수백 마리 삶아놓고 잔치 겸 출정 선서식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첫 번째 전투에서 이겨야 한다며 수전필승(首戰必勝)을 부하들에게 각인시켰다.”
 
15군은 1951년 3월 24일 압록강을 도하했다. 지원군의 5차 공세에 투입됐다. 필리핀군과 한 차례 전투를 치른 후, 미 3사단 2개 연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대수동(大水洞)과 사오랑(沙五郞) 고개 전투도 성과가 있었다. 미군 300여 명이 두 손 들고 항복했다. 미군 기계화 부대의 분할 공격으로 전군이 곤경에 빠진 적도 있었다.  
  
중공군 3만5000여 명 중 3분의 1 전사
 
친지웨이와 황지광의 모친 덩팡즈. 1974년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사진 김명호]

친지웨이와 황지광의 모친 덩팡즈. 1974년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사진 김명호]

친지웨이는 악전이 몸에 밴 지휘관이었다. 식량이 바닥난 상태에서 험지를 빠져나왔다. 캐나다 여단까지 가세한 미 3사단과 10일간 피를 튀긴, 포천 박달봉 전투도 지휘했다. 12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에게 “고맙다”는 전문을 받았다. “미 공군기 4대를 격추하고, 1급 영웅 차이윈쩐(柴云振·시운진)을 배출하는 등 전략 임무를 완수했다.” 5차 공세를 마친 15군은 중부전선 평강(平康) 골짜기에 주둔했다. 9개월간 수비에 전념하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국방부장 시절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에게 실탄 훈련을 설명하는 친지웨이. 1981년 9월 19일 화베이(華北)성 바오딩(保定). [사진 김명호]

국방부장 시절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에게 실탄 훈련을 설명하는 친지웨이. 1981년 9월 19일 화베이(華北)성 바오딩(保定). [사진 김명호]

베이징의 중앙군사위원회가 지원군 사령부를 통해 친지웨이에게 전문을 보냈다. 오성산을 몇 차례 강조했다. “미군의 2차 상륙작전에 대비해라. 예상 지점은 원산이 유력하다. 오성산은 평강의 병풍이다. 오성산을 점령당하면 평강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 평강에서 원산까지는 왕래가 원활하다. 미군의 원산상륙 계획을 포기시키고, 회담장으로 끌어낼 방법은 오성산 고지 사수가 유일하다. 실패하면 군사분계선이 달라진다.”
 
15군은 중국과 북한이 상감령전역(上甘嶺戰役)이라 부르는 오성산 방어전에 성공했다. 피해가 엄청났다. 창설 이래 전사한 3만5000여 명 중 3분의 1이 상감령에서 40여 일 만에 사망했다. 중국지원군이 자랑하는 특급전투영웅 황지광(黃繼光·황계광)도 579.9고지에서 목숨을 잃었다.
 
한미연합군의 희생도 엄청났다. 고지가 2m 날아갈 정도로 맹폭을 가했지만, 갱도전인지 뭔지 때문에 공격을 포기했다. 537.7고지 북쪽에 있는 작은 진지 점령이 고작이었다. 6·25전쟁이 그랬던 것처럼, 상감령 전투도 인간이 벌인 쓸데없는 짓거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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