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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36년만에 첫 퀴어물 출연 김희애 "들꽃처럼 귀한 영화"

영화 '윤희에게'는 주인공 윤희(김희애)가 비밀로 간직해온 첫사랑을 만나러 딸과 함께 일본에 가게 되는 이야기다. [사진 리틀빅픽처스]

영화 '윤희에게'는 주인공 윤희(김희애)가 비밀로 간직해온 첫사랑을 만나러 딸과 함께 일본에 가게 되는 이야기다. [사진 리틀빅픽처스]

“제가 많은 선택을 받진 않지만 들어오는 책(시나리오)들을 보면 ‘이래도 안 볼래?’ 하는 센 것, 거부감 드는 게 많았거든요. ‘윤희에게’는 아무런 부담 없이 소설처럼 읽혔어요. 길 가다 무심히 지나친 풀들, 조그만 들꽃을 새삼 발견한 것처럼 귀한 느낌이었죠.”

 
14일 개봉하는 ‘윤희에게’(감독 임대형)로 첫 퀴어 영화에 나선 배우 김희애(52)의 말이다. 그가 맡은 주인공 윤희는 이혼하고 딸 새봄(김소혜)과 단둘이 살고 있다. 그런 그에게 20년 전 가슴에 묻고 산 첫사랑의 편지가 온다. 엄마 몰래 먼저 편지를 뜯어본 새봄은 편지 내용을 감춘 채 발신지인 일본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지난달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처음 공개돼 주목받았다.  

14일 개봉 영화 '윤희에게' 주연 맡아
딸과 함께 20년 전 첫사랑 찾아 나선 엄마
"센 작품만 오던 내게, 들꽃처럼 귀했죠"
감독, 전형적인 어머니상 넘어서려 캐스팅

 

엄마 이전에 한 인간이자, 여자 

 영화 '윤희에게'로 돌아온 배우 김희애를 11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리틀빅픽처스]

영화 '윤희에게'로 돌아온 배우 김희애를 11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리틀빅픽처스]

11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김희애는 부산영화제 당시를 떠올리며 “좀 뭉클했다. 우리 주위의 엄마, 언니 같은 사람이 그런 힘든 시간을 보냈고, 그걸 유별나지 않게 바라본 시선을 좋게 생각해주신 것 같다”고 했다.
세상의 금기 탓에 못다 핀 엄마의 사랑을 찾아, 차디찬 겨울 풍광 속을 나아가는 모녀의 여정은 때론 쓸쓸하게, 때론 유쾌하게 마음을 빼앗는다. 한 인간이자, 여자. 김희애는 한국영화에서 그저 헌신적인 캐릭터로 납작해지곤 하는 ‘엄마’란 존재에 탁월하게 이런 숨결을 불어 넣는다.  
 
20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 ‘우아한 거짓말’(2013), 지난해 ‘허스토리’ 등 최근 영화에서 그는 유독 일하는 엄마 역을 도맡았다. 마음만 동한다면 연애(우아한 거짓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돕는 사회운동(허스토리)에도 거침없는 캐릭터란 게 공통점. 각본을 겸한 임대형 감독도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상이 아니라 한명의 인격과 개성이 있는, 자기 취향이 있는 한 사람을 만들고 싶었다”고 그의 캐스팅 이유를 밝혔다.  
 

비슷한 색깔 영화·다큐 챙겨봤죠

윤희는 첫사랑을 잃고 삶도 함께 잃어버린 여자다. “남을 외롭게 만드는 데가 있어.” 극 중 전남편(유재명)의 표현. 김희애는 “윤희는 그 사람, 인생 자체를 부정하는 삶이 몇십 년째이기 때문에 굉장히 피폐해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돌이켰다.  
윤희의 여행에 함께한 딸 새봄(김소혜, 오른쪽)과 남자친구 경수(성유빈). [사진 리틀빅픽처스]

윤희의 여행에 함께한 딸 새봄(김소혜, 오른쪽)과 남자친구 경수(성유빈). [사진 리틀빅픽처스]

그런 윤희의 세계는 다시 들썩인다. 김희애는 “너무 보고 싶은 마음,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 그런 복합적인 것들을 한 번에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도 걱정도 많았다”며 “최대한 마음을 촉촉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비슷한 색깔의 영화나 연기, ‘인간극장’ 같은 다큐멘터리를 많이 봤어요. 대리 체험한 감정들을 연기하는 내내 품고 있으려 노력했죠.”
 

日 배우, 고교시절 김희애 사진 매일 보며...

촬영은 한국과, 이와이 슌지 감독의 멜로영화 ‘러브레터’ 무대로 알려진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를 오가며 했다. 일본에서 윤희와 만나게 되는 쥰 역할은 일본 배우 나카무라 유코가 연기했다. 그는 재일동포 이상일 감독의 영화 ‘피와 뼈’(2004),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프로젝트 ‘어떤 방문’(2009) 등으로 한국에도 소개됐다. 학창시절 가까웠단 설정에 맞춰 그는 실제 김희애의 고등학생 시절 사진을 휴대폰에 담아 매일 촬영 전 보며 윤희에 대한 마음을 쌓았단다.  
윤희는 오랫동안 억눌러온 감정을 일본에서의 어떤 찰나 둑 터지듯 쏟아낸다. 구구절절 사연을 설명하는 대사, 회상장면 하나 없다. 오직 배우의 절제한 연기에 기대서다.  
이혼하고 딸과 단둘이 사는 윤희는 매일 아침 급식소 통근 봉고차에 몸을 싣는 일상을 벗어나 20년 만에 옛 사랑을 떠올린다. [사진 리틀빅픽처스]

이혼하고 딸과 단둘이 사는 윤희는 매일 아침 급식소 통근 봉고차에 몸을 싣는 일상을 벗어나 20년 만에 옛 사랑을 떠올린다. [사진 리틀빅픽처스]

현장에선 임 감독과 긴 설명 없이 서로 통했다. “어떤 배우들은 많이 의논하고 그런다는데 저는 그게 없어요. 사실 정답이 없잖아요. 이 사람이 생각 못한 걸 제가 찾아가거나 서로 ‘찌찌뽕’(같은 말을 동시에 했을 때 말하는 속어)하기도 하고. 그런 게 또 다른 창작물로 이어지고요.”

 

"'말 들으라' 말리면 자식 인생 곪는다"

꼭 1년 전 ‘허스토리’ 인터뷰 때 “자식들은 하고 싶은 것 해야 한다. ‘말 들으라’ 말려도 또 곪는다, 인생이. 그런 경험을 많이 봤다”던 그다. 이번 영화의 윤희는 그런 실제 모습과도 조금은 닮았다. 엄마의 몰랐던 속내를 알아가는 새봄, 그런 딸을 빤히 들여다보면서도 굳이 간섭하지 않는 윤희의 ‘밀당’이 재밌다. “모녀관계가 아기자기하고 거부감 없이 쿨해요. 이런 걸 보여준 작가가 (임 감독 전에) 있었나요? 조금은 불량스럽지만 건강한 모녀처럼 느껴지잖아요.” 딸 역할은 아이돌 그룹 ‘아이오아이’ 출신 김소혜가 맡아 이번에 스크린 데뷔했다.  
 촬영지인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는 일본 멜로 영화 '러브레터' 무대로 이름난 곳. 겨우내 새하얀 설경으로 유명하다. [사진 리틀빅픽처스]

촬영지인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는 일본 멜로 영화 '러브레터' 무대로 이름난 곳. 겨우내 새하얀 설경으로 유명하다. [사진 리틀빅픽처스]

윤희에게선 ‘우아한 거짓말’의 딸 둘 엄마, ‘허스토리’의 대찬 일본어, ‘쎄시봉’(2015)의 오래 묵힌 사랑 등 김희애의 전작 속 모습도 떠오른다. “자기안의 것을 끄집어내 연기한다는 배우도 있지만 저는 그 어떤 역할도 저 자신인 적은 없었다”고 김희애는 말했다. “하지만, 지나온 수많은 배역, 수많은 날을 겪으면서 제가 뭔가 숙성되고 세포 하나하나 만들어져온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관통하는 저만의 색깔도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그럼에도 그 어떤 것도 과거의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게 배우로서 제 역할”이라 했다.  
 

배우 거듭난 계기는 '김수현 드라마' 

“데뷔 초엔 엉망진창이었죠. 요즘 후배들처럼 프로페셔널한 갈망이 제겐 원동력이 되지 못했어요.” 열여섯 살에 영화 ‘스무해 첫째 날’(1983)로 데뷔한 뒤 하이틴 배우로 활동했던 그다. 연기자로 거듭난 계기로 “살아있는 전설” 드라마 작가 김수현을 들었다.  
김 작가를 드라마 ‘완전한 사랑’(2003) ‘부모님 전상서’(2004) ‘내 남자의 여자’(2007) 세 편을 함께한 것이 “그 어떤 연기학교 나온 것보다 큰 경험이었다“고 했다. “왜 저를 결혼 후에야(IT 기업가 이찬진씨와 96년 결혼했다) 쓰셨을까, (고민했던 마음에) 직접 여쭸더니 ‘넌 내 작품 전에 이미 김희애였다’고 얘기해주신 게 기억에 남아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2007)에서 주연 김희애(왼쪽)와 김상중. 1983년 열여섯 살에 데뷔해 36년간 연기해온 김희애다. 그는 시대 변화에 따라 여성 캐릭터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더 살아난 느낌"이라고 말했다. [사진 리틀빅픽처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2007)에서 주연 김희애(왼쪽)와 김상중. 1983년 열여섯 살에 데뷔해 36년간 연기해온 김희애다. 그는 시대 변화에 따라 여성 캐릭터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더 살아난 느낌"이라고 말했다. [사진 리틀빅픽처스]

 

드라마 '아들과 딸' 속 여성들 이젠... 

“영원한 건 없잖아요. 조금 다양해졌으면 좋겠어요.”
또래 남성 배우들보다 여성 배우들의 활동반경이 좁은 현실을 묻자 그의 답변이다. 영화 속 윤희가 오빠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던 데서 드라마 ‘아들과 딸’(1992~93)이 생각났다고 하자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요즘 이슈화된 그런 것들(성평등 화두)이 오히려 좋아진 것 같다. 그전부터 있어온 것들이 곪아 터져 폭발한 것 아니냐”고 했다.  
영화‧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도 시대와 함께 달라졌다며 말을 이었다. “그전엔 어,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수동적이고 어딘가 소속된 존재였다면 지금은 밖으로 표출하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바로 서는, 캐릭터들이 살아난 느낌”이라면서 “뭔가 더 진화하고 복잡하고 복합적인 생명체로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 배우로서도 더 자극된다. 축복이다”라고 했다. 내년 선보일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한 예다.  
그는 어떻게 기억되길 바랄까. 

“쓸모 있는 배우요. 어디 갖다 놔도 도움 되고 작품을 빛나게 만드는 그런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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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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