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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 칼럼] 영혼을 바꿔야 살아남을 한국의 진보 정치

최훈 논설주간

최훈 논설주간

“아직 절반 밖에 안 지났느냐”는 국정 불만층의 토로. “벌써 절반이나 지났느냐”는 친여권의 조바심. 양극의 교차 속에 그제 문재인 정부 5년의 반환점을 지났다. “참담하다”는 단어가 사설란에 잦아진 가운데 하산길 정권은 ‘유구무언(有口無言)’의 자세로 중간 성적표를 곱씹어봐야 할 때다. 리턴 포인트(return point)는 체크 포인트(check point)의 동의어여야 한다. 이 즈음 문재인 정부, 더 넓게 민주당 정권, 나아가 진보 정치는 성찰과 쇄신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내년 총선의 승패보다 훨씬 중요한 역사적 과제. 바로 ‘시대착오적 무능(無能)’의 대명사로 치환되기 직전인 ‘한국 진보 정치’의 존망(存亡) 여부다.
 

문재인의 실패, 진보정치 몰락 넘어
진보의 소중한 가치마저 외면케 해
철지난 이념과 규제의 집착 벗어나
‘시대와 함께가는 진보’ 만이 살 길

“인간의 정신이 앞을 향한 진전을 시작한 이후 어떤 이방인의 침입도, 어떤 압제자들의 동맹도, 어떤 편견도 인간을 뒤로 돌아갈 게 만들 수는 없다.” 프랑스 혁명기의 작가 뱅자맹 콩스탕이 222년 전에 한 이 말은 자유·평등·인권 등의 진보적 가치에 대한 가장 확고한 믿음으로 인용돼 왔다. 길게 보면 역사란 특권에 맞선 인간의 자유·평등·인권의 쟁취라는 진보의 길을 걸어 왔다. 시계가 거꾸로 돌지 않듯이….
 
증기 방적기 곁에서 신음하던 여성과 아동의 참상. 제국주의 식민지. 2차 대전 직후 창궐한 군부 독재. 그리고 거대 독점자본의 횡포에 맞서 인간을 인간으로 진전시켜 온 진보의 가치는 그 자체로 소중했다. 평등과 공정, 그리고 정의…. 묘하게도 좌측에 놓인 심장을 쿵쾅거리게 한 구호를 죄다 독점해 온 쪽 역시 진보였다.
 
그런데 이 무적의 진보도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적(敵)이 나타난다. 그건 그들도 전혀 예측못한 ‘시대의 변화’다. 콩스탕도, 카를 마르크스도, ‘정부의 강력한 간섭’이 신앙이던 케인스도, 아마도 창조주도…. 인간의 지능을 AI가 대체하고, 인간없는 자동차가 돌아다닐 세상. 총수요만 규제하면 만사 무탈이라는 엘리트 관료를 비웃는 괴물인 시장 메커니즘의 지배. 노동·자본의 고전적 생산 요소 들간에 디지털 등 신기술을 결합해 창조적 파괴에 나선 혁신 사업가들. 진보의 ‘박애(博愛)’ 따위 대신 모든 권력을 개인에게 이양하라는 밀레니얼 세대. 실리와 부국강병 외엔 묻지도 말라는 극우 민족주의의 쓰나미….
 
그러니 진보의 ‘선의(善意)’로 출발했으리라 믿고픈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 근무, 탈원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우리의 진보 정치는 그냥 ‘믿음’과 ‘소망’에만 그치고 말았다. 백전백패! 실패가 아니라 실패하고도 바뀌지 않는 게 무능이다.
 
성공한 모든 진보 정치는 그 시대에 맞춰 자신의 영혼을 바꾸면서 출발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영국 노동당이 그랬다. 정확히 60년 전의 11월13일. SPD가 고데스베르크 강령(Godesberger Program)으로 거듭난 전당대회장엔 ‘시대와 함께 가자(geh mit der zeit)’는 구호가 내걸렸다. 창당 후 84년 간 집권하지 못했던 SPD는 이날 ‘가능한 만큼의 시장, 필요한 만큼의 계획’을 내걸고 마르크스주의와 절연했다. “전체주의적 강제 경제는 자유를 파괴한다”며 “우리는 언제나 경쟁이 유효하게 지배하는 자유시장을 긍정한다”고 선언했다.(『독일사회민주당 강령집』)
 
심지어 “그 어떤 궁극적 진리도 선언하지 않는다. 어떤 정당, 국가도 규정해서는 안 될 인간의 신념상의 결단을 존중하기 때문”이라며 철지난 이념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상호관용만이 공동생활의 풍요로운 기반을 제공한다”며 교회를 수용해 기독민주·기독사회 연합과 연정(聯政)의 물꼬를 텄다. 진보가 저주해 왔던 핵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용인은 60년 전 이 강령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그 10년 뒤 빌리 브란트라는 첫 사민당 출신 총리 탄생으로 그들은 진정한 진보 국민정당으로 도약했다. 쇄신의 DNA는 노동시장 유연화, 사회보장제도 축소 등 슈뢰더 총리의 ‘아젠다 2010’에까지 이어져 오늘의 독일에 기여한 진보정치의 전범(典範)이 됐다.
 
‘요람에서 천국으로’의 복지 천국을 외치다 보수당 대처 정권 이후 18년 야당으로 전락했던 영국 노동당. 역시 당의 영혼을 쇄신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영국병(英國病)’을 낳았던 ‘당헌4조(생산·분배·교환수단의 공동소유)’를 철폐하고 성장과 투자, 생산적 복지로의 전환 등 시대에 발을 맞췄다. 1997년 토니 블레어의 승리와 장기 집권은 그 보상이었다. 사회당 출신의 중도인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최근 법인세 인하, 노동유연성 정책, 규제 혁파의 뚝심 역시 프랑스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다.
 
싸움만 해왔지 성찰과 학습, 쇄신의 역사가 일천한 우리 진보 정치는 지금 기로를 맞고 있다. 반환점 이후 문 대통령의 실패는 한국의 진보 정치에도 돌이킬 수없는 주홍 낙인을 새길 수있다. “시대와 동떨어진 무능” “우물안 개구리의 40여년 전 꼰대 진보” “진보의 가치마저 조롱하게 만든 정권”이라고…. 반환점이 호기다. 이념과 규제의 집착을 벗어나 시장과, 개방과, 실용을 중시하는 새 시대의 진보를 선언하라. 마차는 이제 말 뒤로 가야 한다.
 
최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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