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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사고로 분쟁나자 모두 내편이 된 동네사람들

기자
김명희 사진 김명희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24)

찬바람이 분다. 푸르렀던 들판도 갈수록 옷을 벗는다. 봄, 여름, 가을, 길고 긴 태양의 열기를 받으며 성장한 곡식들도 모두 곳간으로 들어가는 시기다. 농부들은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들판을 정리해야 한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트랙터 굉음과 함께 먼지를 들쓰고 뒹군다.
 
몇 년 전 가을, 기름진 쌀로 유명한 평택 들녘에서 생긴 일이다. 과일 배달을 마쳐야 해서 급히 농로 위를 달렸다. 해는 기울고 어둠이 내려 마음이 더 쫓겼다. 부랴부랴 산동네를 다 돌고 마지막 한 곳을 남기고 있었다. 앞서가는 차도 없고 해서 속도를 조금 더 냈다. 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밥 짓는 시간에는 누구도 과일을 사러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차에 시들기 쉬운 생물을 실은 내 마음이 오죽 급했으랴. 논 건너편에 있는 마을을 향해 농로 길을 달리던 그때였다. 어둠 속에 추수한 벼를 산더미처럼 실은 5톤 대형화물차가 내 차 앞으로 갑자기 들이밀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다행히 두 차는 부딪히지 않았다. 불과 손가락 한두 마디 틈을 남기고 기적처럼 두 차가 멈춘 상태였다. 어찌나 놀랐는지 정신이 아뜩했다. 적재함 위에 실렸던 사과, 배, 바나나는 대부분 깨지고 뭉개지고 터졌다. 붉은 방울토마토 몇 박스가 날아간 농로는 붉은 피바다처럼 보였다.
 
몇 년 전 차에 과일을 싣고 농로 길을 달리다가 순식간에 사고가 났다. 다행히 두 차는 부딪히지 않았지만 어찌나 놀랐던지 정신이 아뜩했다. 날아간 방울토마토가 붉은 피바다처럼 보였다. [사진 pxhere]

몇 년 전 차에 과일을 싣고 농로 길을 달리다가 순식간에 사고가 났다. 다행히 두 차는 부딪히지 않았지만 어찌나 놀랐던지 정신이 아뜩했다. 날아간 방울토마토가 붉은 피바다처럼 보였다. [사진 pxhere]

 
너무 놀란 나는 한동안 차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사방으로 뒹구는 과일들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것을 다 팔아야 오늘 내 일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놀란 사람은 바로 대형화물 운전기사였다. 논바닥에 너저분한 과일 잔해를 보며 할 말을 잃은 표정이었다. 화물 기사가 가까이 와 머리를 조아렸다.
 
“다친 데 없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달려오는 차를 못 보고 그만…. 이 과일들 어떡하죠? 제가 얼마를 물어드리면 될까요?”
 
순간, 피해보상을 요구하고 싶었다. 나도 두 애들과 먹고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 기사가 오늘 종일 벌판에서 일한 일당이 날아갈 것은 빤했다. 그가 빈손으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돌아가게 될 것을 생각하니 차마 매몰차게 그럴 수 없었다. 더구나 그의 놀란 낯빛을 보니 오히려 내가 더 미안했다. 나 역시 전방주시 태만이라는 과실이 있다면 있었다.
 
남자는 서른 중반쯤으로 보였고 아이 아빠 같았다. 그도 나도, 자식을 거느린 가장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초토화된 내 과일에 대한 보상을 생각하는지 몹시 난처하고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온종일 논에서 일한 그는 몸에 지푸라기가 덕지덕지 묻었다. 바짓단에는 흙덩이가 얼룩져 있었다. 그런 그가 내 과일을 줍느라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보자 나의 놀라고 화났던 마음은 짠한 마음으로 변해갔다.
 
“괜찮습니다. 과일 망가진 건 내가 조금 손해 보면 됩니다. 괜찮으니 줍지 마세요. 그것들은 어차피 주워도 팔지 못해요. 우리 둘 다 몸 안 다쳤으니 그것으로 됐어요. 걱정하지 말고 어서 가요.”
 
기사를 보내고 나도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날 배달은 망쳤다. 나는 다음날 새벽장에서 싱싱한 과일을 사서 다시 배달했다. 물론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젊은 가장도 나도 나쁜 짓 않고 열심히 살다 일어난 일이니 누구를 원망하랴. 그날 아무 일 없이 둘 다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갔으니 그것으로 됐지 싶었다. 그런데, 며칠 후 용인으로 장사 갔다가 아찔한 사건을 겪고 말았다.
 
“자! 과일이요. 과일! 과수원에서 방금 가져온 싱싱한 과일이 왔어요!”
 
방송을 틀고 동네로 들어섰다. 손님이 급히 불러 백미러를 보며 후진하다 남의 승용차를 긁고 말았다. 순간 느껴지는 그 불쾌한 으적거림……. 백미러로 보니 그 차 주인이 이미 나와서 싸늘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아! 오늘 일당 다 날렸구나….’
 
며칠 후 장사를 나갔다가 남의 승용차를 긁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두 차의 상태를 살피더니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사진 pixabay]

며칠 후 장사를 나갔다가 남의 승용차를 긁고 말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두 차의 상태를 살피더니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사진 pixabay]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 해결해야지 어쩌랴. 나는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림과 동시에 굽실굽실 사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차주는 좀처럼 화를 풀지 않았고 급기야 차 수리를 해야겠다며 거액의 돈을 요구했다. 사실 육안으로 표가 잘 나지 않는 경미한 추돌이었다. 그러나 내가 저지른 실수니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죄송하다며 계속 빌었다. 차주는 나를 그대로 보내줄 수 없다고 맞섰다. 동네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두 차의 상태를 살피더니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최 사장, 젊은 애기엄마가 먹고살려다 그런 건데. 좀 봐주지그래?”
“심하게 긁힌 것도 아니구먼. 서로 운전하는 처지에 웬만하면 그냥 보내 줘요.”
“아이고, 표도 안 나는데 수리는 무슨….”
“나도 저 과일 장수 잘 알아요. 우리도 저 집 과일만 먹거든. 열심히 사는 애기엄마예요. 우릴 봐서 좀 넘어갑시다.”
 
이러는 것이 아닌가. 그날 동네 사람들 도움으로 무사히 사태를 모면했다. 하루 일당을 지킨 것도 물론이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네를 벗어나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순간, 며칠 전 평택 들판 농로길 사건이 떠올랐다. 역지사지라 했던가. 내가 만약 그날 젊은 기사에게 얼굴 붉히며 당장 과일값 배상하라 소리쳤다면, 오늘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했다. 나도 그날 젊은 가장이 안쓰럽고 딱해서 내 손해를 덮고 편히 보내주었다. 나의 그런 마음처럼, 오늘 동네 사람들이 나를 보던 마음도 그랬지 않았나 싶다. 서로 열심히 사는 모습을 응원하고, 측은하고 가엾게 여겼던 마음과 마음. 그날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아직은 그리 팍팍하지만은 않다고.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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