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 조선소 쪽에서 내려다본 전망. 가운데 붉은 다리가 영도대교다. 대통령 어머니가 임종한 병원이 다리 건너에 있다. 사진 왼쪽에 자갈치시장 건물이 보인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11/12/ee3612ae-759f-49d3-b8f4-f6b68a29bea7.jpg)
부산 영도 조선소 쪽에서 내려다본 전망. 가운데 붉은 다리가 영도대교다. 대통령 어머니가 임종한 병원이 다리 건너에 있다. 사진 왼쪽에 자갈치시장 건물이 보인다. [중앙포토]
오두막 생가

거제도에 있는 대통령 생가 앞. 현재 집주인이 외부인의 접근을 일절 막고 있다. 손민호 기자
대통령 가족은 임시수용소에서 머물다 인근 마을에 정착했다. 처음엔 변변한 거처를 구하지 못했다. 농가 헛간 같은 오두막에서 겨우 비를 피했다. 1953년 강한옥 여사의 출산이 임박했다. 집주인이 오두막 산모에게 방 한 칸을 내줬다. 그 방에서 대통령이 태어났다. 100일이 지나자 산모와 아기는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노무 일을 했고, 어머니는 부산에서 계란 행상을 했다. 어머니는 거제도에서 싸게 산 계란을 머리에 이고 어린 아들을 업은 채 부산에 건너가 행상을 했다. 그때는 거제도에서 배를 타야 부산에 갈 수 있었다.

대통령 생가는 구경하기도 힘들지만, 생가 가는 길은 친절하게 안내가 돼 있다. 주민 불편은 아랑곳하지 않는 거제시청의 행정이 눈에 거슬린다. 손민호 기자
자치단체의 과잉 행정과 상관없이 마음이 불편했다. 지금 보이는 허름한 농가도 대통령의 집은 아니다. 이제는 흔적도 없는 오두막에서 꼬마 문재인은 무럭무럭 자랐다. 대통령 가족은 거제도에서 7년쯤 더 살다 부산 영도로 넘어갔다.
산으로 올라간 마을

부산 감천동. 알록달록한 색깔의 건물이 눈에 확 들어온다.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지만, 이 마을에 얹힌 사연은 눈물겹다. 손민호 기자
부산역과 부산항 주변으로 초량동·수정동·영주동·범일동·우암동·문현동, 자갈치시장 앞으로 남포동·광복동·부평동·보수동, 부산공동어시장 주변으로 부민동·감천동·아미동, 그리고 영도의 남항동·영선동·봉래동·신선동…. 생각나는 대로 적은 부산의 피란민 마을이다. 피란민 마을 대부분은 기차역과 항구 앞에 붙어 있거나 산 중턱에 걸려 있다. 해방 이전에 30여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한국전쟁 이후 70만 명이 훌쩍 넘어선다.

부산 초량동 168계단. 168개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면 부산역이 발아래에 있다. 사진에서 물지게를 지고 오르는 사람이 서병수 전 부산시장이다. 2016년 부산 산동네를 취재할 때 서 전 시장이 직접 시범을 보였다. 손민호 기자
감천동은 시방 부산에서 제일 북적이는 명소 중 하나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지붕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풍경이 사뭇 이국적이다. 감천동은 종교단체가 처음 터를 잡았다. 하여 집마다 크기도 모양도 비슷하다. 비탈을 따라 들어선 피란민의 집은 놀랍게도 뒷집의 조망을 가리지 않는다. 다른 산동네도 앞집이 뒷집의 햇빛을 가리지 않는다.
감천동 옆 아미동은 비석 마을로도 불린다. 일본인 공동묘지 위에 들어선 마을이어서다. 묘지에 쓰인 비석을 축대로 써 그 위에 집을 얹었다. 부산의 산동네에는 무덤 위에 들어앉은 마을이 수두룩하다. 우암동은 원래 소막마을이라 불렸다. 우암동의 피란민은 우사(牛舍)에 들어가 살았다.
육지의 피란민은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영도는, 육지에 터를 잡지 못한 피란민이 떠밀려 정착한 동네다. 육지의 산동네가 넘쳐나자 피란민은 바다 건너 영도로 들어갔다. 전쟁 직후 영도 사람은 줄배를 타고 육지를 드나들었다. 영도에서 배를 타면 자갈치시장이 바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대통령 가족은 부산의 피란민 사회에서도 제일 밑바닥에 있었던 셈이다. 부산가톨릭 의료원 메리놀병원. 대통령 어머니가 이 병원에서 임종했다. 영도에서 직선거리로 2㎞도 안 된다. 어머니는 아들이 대통령이 됐어도 영도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왜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했을까
![영도다리가 막 들려졌다. 여전히 많은 관광객이 이 장면을 보러 찾아온다. 다리 건너 영도가 보인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11/12/bb86a975-51d5-4b47-909d-130a8e9508f8.jpg)
영도다리가 막 들려졌다. 여전히 많은 관광객이 이 장면을 보러 찾아온다. 다리 건너 영도가 보인다. [중앙포토]
2013년 영도다리가 다시 올라갔을 때, 전국에서 엄청난 관광객이 몰렸다. 대부분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었다. 요즘엔 오후 2시마다 다리가 들린다. 영도다리 도개 행사가 재개한 직후. 잊지 못할 장면을 목격했다. 관광버스를 타고 온 어르신들이 올라가는 다리를 보며 울고 있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영도다리 앞으로 점집이 늘어선 시절이 있었다. ‘점바치 골목’이라 불렀다. 왜 점쟁이들이 영도다리 앞에 모여 있었을까. 다리 아래에서 헤어진 가족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피란민은 점쟁이에게라도 가족의 생사를 묻고 위안을 얻었다. 영도다리에선 유난히 많은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가족의 생사도 모르는 피란민이 고단한 피란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뛰어내렸다. 1950년대 영도다리에서 248명이나 구한 경찰도 있었다.
“우리가 남이가.” 1992년 14대 대선을 앞두고 초원복집에서 이 말이 녹음됐다. 이 말을 한 주인공이 당시 법무부 장관 김기춘이다. 사실 “우리가 남이가” 다음 말도 있었다. “다른 사람이 되면 부산 사람들 영도다리에서 빠져 죽자.”

영도다리 앞 점바치 골목의 마지막 점집. 2016년에 촬영했다. 영도다리 앞에 점집이 늘어섰던 건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그 문화유산이 사라졌다. 손민호 기자
‘깡깡이 아지매’를 아시나요
![영도 흰여울마을. 그림 같은 이 장면에도 피란민의 애환이 서려 있다. 가파른 해안 절벽 위로 피란민의 집이 위태로이 기대어 앉았다. 대통령도 바로 이 비탈 위에서 살았다. 해안 산책로 들어선 바닷가의 이름은 '이송도'다. 월사금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났던 초등학생 문재인이 놀던 바닷가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11/12/f27e7230-64e6-4569-8001-fcf2fb21b4ef.jpg)
영도 흰여울마을. 그림 같은 이 장면에도 피란민의 애환이 서려 있다. 가파른 해안 절벽 위로 피란민의 집이 위태로이 기대어 앉았다. 대통령도 바로 이 비탈 위에서 살았다. 해안 산책로 들어선 바닷가의 이름은 '이송도'다. 월사금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났던 초등학생 문재인이 놀던 바닷가다. [중앙포토]
영도의 피란민 어머니를 상징하는 단어가 있다. ‘깡깡이 아지매.’ 옛날 영도 어귀 조선소에선 선박의 녹을 벗길 때 망치를 사용했다. 망치로 배를 때릴 때 깡깡 울리는 소리가 울렸다. 피란민 아지매들이 이 위험한 작업을 했다. 아파트 4, 5층 높이 허공에 떠 있는 널빤지에 앉아 온종일 망치질을 했다. 깡깡 소리 때문에 귀를 먹은 아지매도, 널빤지에서 떨어져 불구가 된 아지매도 많았다. 대통령은 어머니가 부산역에서 암표 장사를 할 뻔했다는 일화는 소개한 적 있지만, 깡깡이 아지매 얘기는 하지 않았다.
영도에는 ‘이송도’라는 지명이 있다. 해안 산책로가 난 영도 서쪽 해안을 이른다. 국내 최초 해수욕장이 부산의 송도해수욕장이다. 그 송도처럼 예쁜 바닷가라고 해서 ‘이송도’다.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났던 초등학생 문재인은 종종 이송도에 내려가서 놀곤 했다. 남항초등학교. 대통령이 졸업한 초등학교다. 이송도 바로 위에 있다.
![영도 흰여울마을의 영화 '변호인' 촬영지. 관광객이 찾아오면서 벽에 흰 페인트칠을 했다. 영화에서 국밥집 아들의 집으로 등장한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911/12/6126ab64-e85a-4cbe-84eb-6fb59e1dd5ce.jpg)
영도 흰여울마을의 영화 '변호인' 촬영지. 관광객이 찾아오면서 벽에 흰 페인트칠을 했다. 영화에서 국밥집 아들의 집으로 등장한다. [중앙포토]
부산 밀면과 돼지국밥

부산 우암동 동항성당의 예수상. 동항성당 신부님이 성당 아래 내호냉면에 구호품 밀가루로 삯국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던 게 밀면의 시초가 됐다. 손민호 기자
돼지국밥은 돼지고기로 설렁탕 맛을 낸 음식이다. 신창국밥·할매국밥·송정3대국밥·쌍둥이돼지국밥 등 돼지국밥 명가가 여러 곳 있지만, 부산의 돼지국밥은 맛이 비슷하다. 대부분 뼈째 삶아 국물이 무겁다. 대신 고릿한 냄새는 감수해야 한다. 개인적인 취향은 정구지(부추)가 수북해야 한다. 대통령은 돼지국밥을 참 좋아했다. 부림사건 피해자들과 ‘변호인’을 관람하고서 먹은 음식도 돼지국밥이다. 부산 사상구 국회의원이었을 땐 사상구 돼지국밥 지도를 트위터에 공유하기도 했다.

내호냉면 주인 가족과 수십 년 단골. 사진 왼쪽에 내호냉면 3대 대표 이춘복씨와 남편 유상모씨 4대 대표이자 아들 유재우씨가 서 있다. 유손민호 기자
1959년쯤 우암동 동항성당의 신부님이 배급 나온 밀가루로 ‘삯국수’를 해달라고 내호냉면에 부탁했다. 삯국수는 면 뽑는 삯만 받는 국수라는 뜻으로 면 요리를 즐기는 이북에서 흔했다고 한다. 당시 내호냉면의 2대 대표 고 정한금 여사가 오랜 시도 끝에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 비율을 7대 3으로 밀냉면을 만들었다. 내호냉면은 여전히 밀가루와 고구마 전분을 섞어서 면을 뽑지만, 요즘의 부산 밀면은 대부분 밀가루 면만 쓴다.
내호냉면은 올해 개업 100년을 맞았다. 함경남도 흥남 내호시장 입구의 ‘동춘면옥’이 원조다. 현재 4대 주인의 증조 외할머니가 1919년 10월 문을 열었다고 한다. 대통령의 부모도 흥남 출신이다. 동춘면옥은 당시 흥남에서 제일 유명한 농마국수(함흥냉면) 집이었다. 대통령의 어머니도 동춘면옥 농마국수를 알고 있었을 터였다. 실제로 대통령은 내호냉면 단골이었다.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던 시절 어머니를 모시고 자주 찾았다고 한다. 지금도 내호냉면의 함흥냉면은 이북에서의 맛이 남아있다고, 피란민 어르신들은 입을 모은다.

부산 내호냉면의 밀면. 이 집에서 부산 밀면이 탄생했다. 손민호 기자
내호냉면 벽에 볼펜으로 그린 내호리 지도가 걸려 있다. 2009년 정한금 여사의 남편 고 유복연씨가 돌아가기 열흘 전 그린 유물이다. 유복연씨도 대통령의 아버지처럼 함흥농고를 나왔다. 그도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다 갔다. 대통령의 부모도 다르지 않았다.
레저팀장 ploveson@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