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한국영화 100년사 중 63년 연기인생, 국민배우 안성기가 있기까지

거장 김기영 감독의 1960년 대표작 ‘하녀’에서 주인집 아들로 출연한 여덟 살 시절의 아역 배우 안성기. 이 장면은 올해 제17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개막공연에 상영됐다. [중앙포토]

거장 김기영 감독의 1960년 대표작 ‘하녀’에서 주인집 아들로 출연한 여덟 살 시절의 아역 배우 안성기. 이 장면은 올해 제17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개막공연에 상영됐다. [중앙포토]

지난달 31일 서울 광화문 씨네큐브 극장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이하 아시아나영화제) 개막식에선 진귀한 광경이 펼쳐졌다.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아 뮤지션 디폴이 고전영화 ‘하녀’(1960) 영상을 리믹스한 개막 공연. 스크린 속 눈이 뎅그런 당시 여덟 살 아역배우 안성기를 예순일곱 현재의 그가 객석에서 마주했다. “형님, 기억나세요?” 개막 사회를 맡은 후배 배우 박중훈의 너스레에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5일 폐막 17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출범부터 몸 담아온 안성기 집행위원장
한국영화 100주년 중 63년 연기 인생
"아버지 따라 갔다 얼떨결에 데뷔했죠"

 

연기인생 63년, 여전한 현역 배우

지난달 31일 서울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열린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AISFF)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한 안성기 집행위원장. 영화제 첫 출범부터 몸담아왔다. [연합뉴스]

지난달 31일 서울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열린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AISFF)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한 안성기 집행위원장. 영화제 첫 출범부터 몸담아왔다. [연합뉴스]

올해 100주년을 맞은 한국 영화사 가운데 자그마치 63년. ‘국민배우’ 안성기가 연기자로 살아온 세월이다.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한 그는 여전히 왕성한 현역이다. 한국영화 100주년 홍보위원장으로 바빴던 올해도 여름 대작 ‘사자’에서 까마득한 후배 박서준과 퇴마 사제로 호흡 맞췄다.  
“한결같이 살자”는 좌우명답게 충무로 대소사도 꾸준히 챙겨온 그다. 올해 17회를 맞은 아시아나영화제에서 집행위원장을 맡은 지도 15년째. 2003년 아시아나항공이 사회공헌 차원에서 단편영화 지원 및 기내 상영 취지로 만든 영화제로, 이경미‧김한민 등 신인 감독을 배출해왔다. 아시아나항공이 매각 초읽기에 들어가며 영화제도 향방을 모색하는 상황. 5일 폐막식에 앞서 그를 만났다.  
 

'실미도'로 최초 1000만 기록한 그해

31일 '아시아나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사진 촬영에서 안성기 집행위원장(가운데)이 후배 배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 [연합뉴스]

31일 '아시아나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사진 촬영에서 안성기 집행위원장(가운데)이 후배 배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 [연합뉴스]

영화제가 첫 출범한 2003년은 그가 주연 영화 ‘실미도’(감독 강우석)로 한국영화 최초 1000만 관객을 기록한 해다. 그는 “그해 1회, 이듬해 2회 땐 심사위원장을 했다. 지금의 손숙 이사장이 집행위원장이었고. 3회 때 이사회가 생기면서 제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고 돌이켰다.  
“배우로서 영화 촬영이 우선이지만, 나머지 시간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유니세프(1991년부터 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 활동 중)나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사장) 일도 그 연장 선상이죠. 내가 돕는다지만 가슴으로 느낀 게 많아요. 오히려 내가 도움받았죠.”
 
2019년 여름 대작 시장에 개봉한 '사자'(감독 김주환)에서 왼쪽부터 주연 배우 안성기와 박서준. 박서준은 이 영화를 인연으로 올해 아시아나영화제 최고 배우상을 뽑는 특별 심사위원에도 나섰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2019년 여름 대작 시장에 개봉한 '사자'(감독 김주환)에서 왼쪽부터 주연 배우 안성기와 박서준. 박서준은 이 영화를 인연으로 올해 아시아나영화제 최고 배우상을 뽑는 특별 심사위원에도 나섰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17회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2회 땐 중국의 지아장커 감독이 심사위원으로 왔는데 세계 단편과 우리네 단편 격차가 심했다. 10여 년 지난 지금은 거의 대등한 느낌을 받는다. 아시아나영화제의 큰 역할은 한국영화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좌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은 올해의 개막공연은 그에게 더욱 각별했다. “다섯 살 때 연기를 시작하고부터 필름 속에서 살아왔다”는 그다. 삶이 곧 영화고 영화가 곧 삶이었다.  
 

다섯 살에 배우 김지미와 동반 데뷔 

1957년 배우 김지미와 나란히 데뷔한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 이후 아역 시절 출연작만 70여 편. 연기자의 길로 이끈 이가 올해 1월 별세한 아버지 안화영씨였다.
배우 안성기의 데뷔작인 영화 '황혼열차'(1957)에 아들과 함께 출연했던 그의 아버지 안화영 모습.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배우 안성기의 데뷔작인 영화 '황혼열차'(1957)에 아들과 함께 출연했던 그의 아버지 안화영 모습.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아버님이 원래 체육인이세요. 뭐 10종 경기 하셨고, 동성고 체육교사로도 계셨는데 서른 전후에 배우를 꿈꿨어요. ‘황혼열차’에도 조금 아버지가 나오는데, 아역이 필요하대서 저를 데려간 것이었죠.”
아련한 듯 아버지를 떠올리던 그는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당시를 회고했다. 
 
데뷔작 촬영한 게 기억나나.  
“정릉 세트장에 놀러 갔던 기억은 난다. 정릉이 그때 한갓진 계곡, 시골이었다. 세트장이 껌껌했는데 뭘 좀 훔치라고 해서 살살 기어갔었지. 중랑교 철교에서 열차가 저어기서 쫙 달려오고 ‘뛰어내려!’ 그럼 침목 사이로 쏙 빠졌다. 밑에서 담요 잡고 있고. CG(컴퓨터그래픽)도 없던 시절이니까. 지금은 필름도 유실돼서 그 정도 기억이 다다. 김기영 감독님과 일고여덟 작품 했는데 필름 남은 걸론 ‘하녀’가 제일 빠를 거다.”  
올해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오픈토크 '영화인 김지미' 행사가 열린 4일 부산 남포동 비프광장 야외무대에서 배우 김지미(왼쪽)와 안성기가 토크를 나누고 있다. [부산=연합뉴스]

올해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오픈토크 '영화인 김지미' 행사가 열린 4일 부산 남포동 비프광장 야외무대에서 배우 김지미(왼쪽)와 안성기가 토크를 나누고 있다. [부산=연합뉴스]

 

"10대 땐 발랑 까진 아이였죠"

“‘황혼열차’에서 우리 꼬마가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양주남 감독의 ‘모정’(1958)에선 중요한 아들 역할을 했죠. 배우로 키웠다기보단, 계속 연결, 연결돼서 흘러간 거예요.”
전후 10대 부랑아들을 다룬 김기영 감독의 ‘10대의 반항’(1959)으론 일곱 살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영화제 소년특별연기상도 받았다. 한국 최초 해외 영화제 연기자 수상 기록이다. 중학교 3학년 땐 연극 ‘잉여인간’으로 이순재‧김성옥‧장민호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국립극장 무대에 섰다.  
 
어떤 10대였나.  
“왜 있잖나, 발랑 까진 아이. 나도 의식한 게 아니라, 어른들하고 어울리며 배운 말을 쓰다 보니, 엉덩이를 ‘빽판’이라 한다든지, 촬영하다 잠들지 말라고 화투장 쥐여주면 패 돌리고.(웃음) 그런데 고등학교 가서 사춘기를 치렀다. 고2 때 ‘젊은 느티나무’(1968) 하고선 10대 역할이 많지 않아 자연히 그만뒀는데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부담스럽더라. 성격도 내성적으로 바뀌었다.”
 

연기 멈췄던 시기, 인간적 성장했죠

이장호 감독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80년대 민중의 모습을 대변한 배우 안성기(오른쪽).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이장호 감독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에서 80년대 민중의 모습을 대변한 배우 안성기(오른쪽).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그는 이 공백의 시기를 “어릴 적 휩쓸려 살았던 명성 따윈 잊고 순수한 나로 돌아갔던 시간”이라 표현했다. 젊은 혈기에 베트남전에 가려고 한국외대 베트남어과에 갔고 학군단(ROTC) 출신으로 군대를 마쳤다. 전쟁이 한발 앞서 종식되며 사회생활도 했다. “그 시절이 없었으면 80년대 내가 맡은 소시민적 역할, 일반사람들의 감정을 잘 못 느꼈을 거예요.”
성인 배우로 다시 나선 70년대 말엔 엄혹한 시대가 찾아왔다. 그는 이 시기를 가장 힘겨웠던 암흑기라 했다. “60년대 전성기 지나고 유신이 딱 오고 나니까 검열이 강화됐죠. 반공‧새마을운동영화, 순수문예영화, 호스티스 영화가 즐비하다 보니까 영화 하는 사람들은 예술가 아니다, 이상한 사람이란 인식이 생겼어요. 그런 시선이 가장 힘들었죠. 나는 평생 연기를 할 텐데, 존중받고 싶다. 꼭 그렇게 되겠단 꿈이 있었죠.”
 

유신 10년이 영화에 남긴 아픔 

그런 변화의 신호탄이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이었다. 10.26 사태로 박정희 정권이 붕괴했지만 광주 비극이 있었던 80년, 어수룩한 청년 덕배 역으로 대종상 신인상을 안았다. ‘꼬방동네 사람들’(1982) ‘만다라’(1981) ‘칠수와 만수’(1988) 등 “의식 있고 시대적 고민을 담은 작품”을 부러 택했다. 그런 의지가 ‘화려한 휴가’(2007) ‘부러진 화살’(2012) 등 지금껏 이어졌다.  
다만, “유신 10년을 보내며 좋은 감독, 배우들이 사라지거나 스스로 떠나며 선‧후배가 단절된 것은 지금도 아픔”이라 했다. “늘 숙제였고. 이제라도 그런 단절이 없도록 노력하고 관계를 가져야죠.”
 
지난달 31일 제17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개막식에서 고전영화 '하녀'의 리믹스 공연을 선보인 뮤지션 디폴. 어머니는 배우 박순천씨로, 디폴 역시 어릴적 연출을 꿈꿨다고 전한다. [사진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지난달 31일 제17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개막식에서 고전영화 '하녀'의 리믹스 공연을 선보인 뮤지션 디폴. 어머니는 배우 박순천씨로, 디폴 역시 어릴적 연출을 꿈꿨다고 전한다. [사진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앞으로 한국영화? 걱정 없죠

앞으로 한국영화에 조언한다면.  
“한국영화는 본능적으로 잘 찾아간다. 우리 영화의 힘이다. 홍콩 누아르는 나라 상황도 있었지만 한 장르만 너무 오래 하며 스스로 무덤 팠다면 우리는 폭력적 아니냐, 비판하면 기획부터 다른 쪽 흐름이 슥 생기더라. 상업영화는 큰 걱정 없고, 여기에 독립영화, 작가 정신이 살아있는 분위기를 계속 만들어줘야지. 공존해서 같이 갈 수 있도록.”
 
이미 여러 영화제에 힘을 보태온 그다. 아시아나영화제 외에도 1998년부터 집행위원으로 참여한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DMZ다큐영화제 조직위원, 오는 8일 첫 개막하는 강릉영화제 자문위원장도 맡고 있다. “시간 뺏긴다는 생각은 안 한다. 받은 만큼 주는 기쁨이 훨씬 크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타고난 역할, 하고자 하는 역할이 있잖아요. 각자가 한눈만 팔지 않아도 이 세상이 잘 돌아가는 것 같아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한테 좀 더 충실할 필요가 있죠.”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