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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은 재현 불가능", 서사 없이 이미지로... 연기 없는 연극

연극 '휴먼 푸가'의 배우들은 소설 속 문장을 그대로 읽는다. [사진 남산예술센터/이승희]

연극 '휴먼 푸가'의 배우들은 소설 속 문장을 그대로 읽는다. [사진 남산예술센터/이승희]

“비가 올 것 같아. 너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무대 위 배우들은 한강 작가의 2014년 소설 『소년이 온다』속 문장을 그대로 읽듯이 말한다. 배우는 모두 7명. 이들은 같은 문장을 동시에 말하거나, 한 사람의 말을 문장마다 나눠서 외치기도 한다. 서로 다른 문장들이 돌림노래처럼 겹겹이 이어지기도 한다.

한강 『소년이 온다』국내 첫 무대화한 '휴먼 푸가'

 
6~17일 서울 소파로의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휴먼 푸가’다.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소년이 온다』의 국내 첫 무대화 작업이다. 소설에는 이때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실탄에 맞은 중학생, 그를 찾아다니던 어머니와 형, 성고문을 받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연극은 이 장면을 재현하는 대신 소설 속 문장을 골라 그대로 읽는 형식을 택했다.  
 
무대 위에는 이야기를 위한 배경이 전혀 없다. 서사 대신 이미지가 극을 끌고 간다. 수십개의 유리병, 소복히 쌓인 밀가루, 흰 천, 검은 의자, 카세트 테이프 같은 물건들만이 배우들의 대사와 함께 사용된다. 배우들이 작품의 내용에 맞도록 선택해 가져온 오브제들이다.
 
소설의 내용에 비해 연극의 방식은 다소 건조하지만 발화 자체는 여전히 충격적이다.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너는 도청 안마당에 모로 누워있었어. 총격의 반동으로 팔다리가 엇갈려 길게 뻗어 있었어.” 배우들은 이런 대사를 읊거나 외치면서 각자의 몸동작을 함께 한다. 무대 위 커다란 벽에 세게 부딪히거나 바닥에서 몸부림을 치고,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튼다.
 
5.18을 소재로 한 연극 '휴먼 푸가'는 여러 오브제로 인간의 내면을 상징한다. [사진 남산예술센터/이승희]

5.18을 소재로 한 연극 '휴먼 푸가'는 여러 오브제로 인간의 내면을 상징한다. [사진 남산예술센터/이승희]

 5일 열린 시연회 후 연출가 배요섭은 “5ㆍ18은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배우들이 소설 속 인물이 돼보기도 하고, 연기를 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몸만 남았다. 텍스트가 중요하다고 믿게 됐고 배우들에게도 그걸 절대 바꾸지 말라고 주문했다”고 했다. 이는 원작자인 한강 작가의 의견이기도 했다. 
 
“한강 작가와 1월에 만났을 때 소설 속 인물이 구체화돼 드러나는 것을 우려했다. 등장인물들은 관객일 수도 있고 무대 위의 퍼포머일 수도 있다. 정해지지 않은 무엇이어야 하는데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어서는 안됐다.” 배요섭은 “배우들이 연기하지 않고, 음악이 있다고 해서 춤추지 않고, 음악은 연주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작업했다”고 했다.
 
제작진은 여러번 광주에 들러 항쟁의 흔적, 희생자의 기록을 찾았다. 당시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과 만나고 취조를 하던 지하실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감정을 무대 위에서 몸짓으로 표현하기 위해 인도의 전통 무술을 배웠다.
 
‘푸가’라는 제목은 소설이 전개되는 방식에서 착안했다.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층위에서 흘러가기 때문이다. 푸가는 두 개 이상의 음악적 주제가 여러 성부에서 일종의 돌림노래처럼 진행되는 음악 형식이다. ‘휴먼 푸가’의 무대 위에서도 여러 인간의 말이 동시에 혹은 시차를 두며 발화되고, 서로의 말을 좇거나 변주한다.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줄거리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은 방식이지만, 소설을 아는 관객에게는 무대 위 발화가 거대한 화성적 작품처럼 보인다.
 
남산예술센터에서 6일 개막하는 연극 '휴먼 푸가'. [사진 남산예술센터/이승희]

남산예술센터에서 6일 개막하는 연극 '휴먼 푸가'. [사진 남산예술센터/이승희]

이번 연극은 서울문화재단의 남산예술센터와 공연창작집단 뛰다가 함께 1년 동안 제작한 프로젝트다. 남산예술센터의 송서연 기획제작 PD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는 딜레마 안에서 ‘인간은 악한가,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관객들과 나누고 싶었다”고 했다.  
 
‘휴먼 푸가’가 준비되는 동안 폴란드 크라쿠프의 스타리 국립극장에서도 『소년이 온다』를 원작으로 하는 ‘The Boy is Coming’이 제작ㆍ공연됐다. ‘휴먼 푸가’와 달리 폴란드의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중심으로 사건을 재현하는 방식이다. 남산예술센터는 5ㆍ18이 40주년이 되는 내년 5월과 10월 ‘휴먼 푸가’와 ‘The Boy is Coming’의 공연 교류를 준비하고 있다. 공연은 서울ㆍ광주ㆍ크라코프에서 열릴 것으로 보인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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