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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는 연기 같은 덧없는 생…낙엽을 태우며

기자
권대욱 사진 권대욱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41)

 
일교차가 크고 근처에 저수지나 강이 있으면 어김없이 안개가 핀다. 안개가 잦아지는 계절. 그 안개를 정말 잘 볼 수 있는 곳이 산막이다. 안개는 밤에도 피고 새벽에도 핀다. 새벽 안개는 새벽 안개대로, 밤안개는 밤안개대로. 그 아름다운 매력은 직진이 아닌 우회, 바로가 아닌 기다림인 듯싶다.
 
잔디가 누렇게 변하고 모든 식물이 잠시 생장을 멈추고 후일을 기다리는 계절 가을. 가을이 깊었으니 곧 겨울도 닥치리라. 혹독하다. 얼어 터지고 막히고 돌지 않는 겨울. 수십 년의 경험으로 미리 준비함을 안다. 보일러실, 배관, 야외 주방, 펌프실, 보온, 세미나실, 2층 단수, 부동액 주입. 보온 파이프를 덧씌우고 바람 들지 않도록 테이프로 잘 감고 보온재로 잘 덮는다.
 
산막은 일교차가 크고 지척에 계곡과 저수지가 있어 안개가 짙고 아름답다. [사진 권대욱]

산막은 일교차가 크고 지척에 계곡과 저수지가 있어 안개가 짙고 아름답다. [사진 권대욱]

 
단수할 곳은 미리 봐 두었다가 펌프를 중지시키고 자연 배수를 유도한 후 밸브를 잠근다. 야외 부엌 온수기도 밸브를 열고 퇴수 시켜 동파를 원천 봉쇄한다. 각 방 수조, 싱크대, 샤워기도 아래 밸브를 잠그고 헤드를 빼놓는다. 변기 물도 밸브를 잠근 후 다 내려버린다. 아니면 변기가 깨진다.
 
땔감도 미리 준비한다. 통나무는 지난번 벌목업자에게 받은 통나무가 아직 많으니 장작으로 주문한다. 착화제도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다. 한겨울 밤 난로 피우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머리로는 정리되나 실행은 어렵다. 무엇이든 그렇지만 실행의 큐가 잘 눌러지지 않아 번번이 때를 놓치고 후회하곤 한다.
 
이번엔 그 단초를 산막 지킴이 편에 만들었다. 애3개3 공순이 온다기에 읍내 철물점에서 아예 다 준비해 오라 일렀다. 그래야 겨우 실행의 단추가 눌러질 듯 싶었다. 이제 적당히 날 잡아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이렇게 가을은 깊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고 나는 또 멀지 않을 봄을 생각한다. 이렇게 또 한 해가 간다. 죽음을 앞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는 이어령 선생의 인터뷰가 참 마음에 와 닿는 오늘이다.
 
온천지에 들깨 향이 가득하다. 온몸과 마음이 저절로 정화되는 듯한 맑음의 냄새. 커피와 빵이 전해지고 깨 한 말이 주문된다. 얘들은 읍내 기름집에 보내져 나의 식탁을 풍요롭게 할 들기름으로 돌아올 것이다. 깨밭에는 화기와 친밀함이 가득하고, 책상 옆엔 난로가 타고, 그 온기를 즐기며 나는 글을 읽고 글을 쓰고 꿈을 꾼다.
 
내게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을 잘해주는 곡우에 감사하며,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한다. 이렇게 어느 가을날은 속절없이 흐르고, 베어진 깨밭에는 적막만 가득하다. 저녁에는 낙엽을 태울 것이다. 아침에 무서리 내리고, 빈들의 고향의 노래 울려 퍼지면 가을은 이미 깊은 것이다.
 
겨울이 머지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그 겨울이. 낙엽을 태우면서 생의 덧없음을 느낌은 나만의 생각인가? 선생은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되었다는데, 흩어지는 연기를 보며 모든 것은 왔던 자리로 돌아간다는 자연의 천리를 새긴다. 땅에서 온 것은 땅으로, 물에서 온 것은 물로, 불에서 온 것은 불로, 바람으로 온 것은 바람으로 날려간다. 우리도 그 천리를 벗어날 수 없음이니, 언젠간 바람으로, 흙으로, 불로, 물로 돌아갈 것이다. 가을이 깊었다.
 
 
내가 사는 법. 저이는 무슨 재미로 주말이면 산막에 간다더냐? 가서 종일 무얼 하길래 싫증 내는 법도 없다더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것도 같다. 가끔 곡우도 그런 얘길 할 정도니 무리도 아니다. 이것저것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강력한 이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날은 없지만, 정희재의 말처럼 ‘나 자신의 신념이 아닌 사회가 강요하는 트랜드나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라 해도 좋을 것이고 무위의 자유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저 이곳에서 온전히 내 하고 싶은 일을 내 하고 싶은 시간에 내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할 뿐이다. 요즘처럼 날 좋을 때면 앞산 바라보이는 데크나 밭 한가운데 의자 몇 개로 임시 서재를 꾸민다.
 
날이 추우니 난로도 준비한다. 독서에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어도 좋다. 주로 스카이라이프 채널 337번 클래식 음악방송을 듣는다. 그리고 마음 가는 책을 골라 읽는다. 꼭 다 읽어야 할 이유도 없고 읽다가 재미없으면 먼 산 바라보기도 하고, 맘에 닿는 구절 있으면 한 줄 읽고 한나절을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왕명의 뛰어난 작품 뒤에는 16년간의 유배 생활이 있었고,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을 쓴 것은 그가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 짓고 살던 10년 후였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것도 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난로불 지피고, 서가에서 마음에 드는 책 몇 권 뽑아 의자 위에 쌓아놓고 먼 산 안개 바라보며 책을 읽는다. [사진 권대욱]

난로불 지피고, 서가에서 마음에 드는 책 몇 권 뽑아 의자 위에 쌓아놓고 먼 산 안개 바라보며 책을 읽는다. [사진 권대욱]

 
내가 이곳에서 10년 전 보냈던 3년여의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았구나. 오늘의 나를 만들었구나. 그런 생각이 정당화되는 순간. 그것은 지금 내가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와 자유를 아껴야 할 참다운 이유와 산허리 돌아 찬란한 햇살을 예비하는 새벽 안개를 사랑할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배고프면 고구마 한쪽, 대추 한 알, 밤 몇 톨에 무 한쪽이면 족할 것이고, 무료하면 한숨 낮잠 자거나, 장작을 패거나, 소로를 생각하며 산길을 걸어도 좋을 것이다.
 
오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마음껏 누릴 것이다. 무위의 시간을 보내보지 않은 사람은 기다리는 법을 모른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기에 우리는 다만 현재의 한순간 한순간을 지극한 마음으로 살아갈 뿐이다. 아침에 아무것도 아닌 일이 저녁에 일어나는 엄청난 일의 씨앗일 수도 있다.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실감을 안겨주는 소중한 기회는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내려놓은 그 순간에 찾아온다는 여자 사람 정희재를 만나고 싶다.
 
(주)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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